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16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3. 3. 16. 05:21

2023년 3월 16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싸우면 쓰러지게 마련이고

한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이다.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는데

만일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 되겠느냐?”

(루가 11,14-23)

“Every kingdom divided against itself will be laid waste

and house will fall against house.

And if Satan is divided against himself,

how will his kingdom stand?

For you say that it is by Beelzebul that I drive out demons.

If I, then, drive out demons by Beelzebul,

by whom do your own people drive them ou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백성에게, 주님께서 명령하신 길만 온전히 걸으면 잘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당신을 반대하는 자고, 당신과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선 이 실험의 참가자는 모두 여성이었습니다. 먼저 이들에게 독해력 테스트를 가장한 읽기 지문을 나누어 준 뒤에 수학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첫 번째 집단에는 ‘남성과 여성이 수학 시험에서 동등하게 우수한 성적을 냈다’라는 내용의 지문을 읽게 했고, 두 번째 집단에는 ‘Y 염색체에서 발견되는 일부 유전자 때문에 남성이 여성보다 5% 포인트 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라는 내용의 지문을 읽게 했습니다. 이제 수학 문제 테스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잠깐 지문을 읽었을 뿐인데도 두 번째 그룹의 성적이 첫 번째 그룹보다 25%나 더 낮았습니다.

여기에 세 번째 실험 집단도 있습니다. 이 집단도 두 번째 집단과 마찬가지로 남성이 여성보다 수학 시험에서 더 좋은 결과를 냈다는 지문을 읽게 했습니다. 다만 이 지문의 끝에는 ‘학창 시절 초기부터 이어진 교사들의 편향된 기대 때문’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테스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두 번째 그룹보다 월등히 좋았고, 첫째 그룹과는 성적이 비슷했습니다.

나쁜 결과를 가져온 것은 유전적 원인 때문이 아님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반대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생각으로 무장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만의 성장이 아닌 우리의 성장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장을 위해 내 이웃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요? 성장할 수 있는 말과 행동, 즉 칭찬과 응원 그리고 지지 등의 긍정적인 모습으로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기적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통한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잘못된 생각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서 남들도 주님 곁에 나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참 하느님이신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많은 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돈을 넣으면 물건이 나오는 자판기처럼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평불만을 하면서 주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다른 이들도 주님과 함께 못하게 합니다.

주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주님을 반대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뜻을 마음에 담으면서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하며, 이웃들도 주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적당히 일하고 좀 더 느긋하게 쉬어라. 현명한 사람은 느긋하게 인생을 보냄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그라시안).

예수님 편에 섰지만, 예수님의 적이 되는 사람들

-전삼용신부-

https://youtu.be/2e5s81WTusA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솔져보이’(2019)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맞서 싸운 여섯 살 최연소 소련군 군인입니다. 진짜 군대에서 주는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보급 지원 업무를 맡아 적의 매복을 찾아내고 편지와 보급품을 군인들에게 보급하며 사기를 끌어올렸습니다. 왜 여섯 살 소년이 전쟁에 그렇게 진심이었을까요?

 

그는 엄마, 아빠를 독일군에게 죽임을 당하여 잃었습니다. 그를 구해주려던 이모도 독일군 총에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면서도 정글과 같은 숲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다 자기를 발견하고 아들로 삼아준 사람이 소련군 대위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아빠를 돕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일은 아이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독특하지만 큰 영향을 주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전장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을까요? 아니면 미적지근하게 도울 수 있을까요? 자신의 가족을 죽인 독일군과 자신을 아들로 맞아주고 사랑해주는 군대를 위해 어떻게 중립일 수 있을까요? 신앙도 전쟁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고 악은 어둠입니다. 그 어둠은 우리가 아는 많은 이들을 지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미적지근한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런데 군중 가운데 몇몇이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탄도 서로 갈라지면 망하게 된다고 하시며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악령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성령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의 어떤 이들은 마치 악과 선이, 그리고 어둠과 빛이 섞여 있다고 믿는 이상한 혼합 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사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과 악마에 대해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러한 미적지근한 신앙의 방식을 이 한마디로 정리해주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 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반대한 적이 없어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반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예수님을 방해한 적이 없어도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지 않으면 방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빛 안에 머물지 않으면 그것은 어둠 안에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중립이나 미지근한 신앙은 없습니다.

 

제가 축구를 좀 하는 편이었고 군대 신임 병 때 나름으로 열심히 뛴다고 뛰었는데 선임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저에게 기대한 만큼 제가 뛰어주지 않으니 다른 선임들도 기운이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야단을 맞고는 죽기 살기로 뛰었습니다.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전투에서 중립이나 미지근함이나 욕을 안 먹으려고만 하는 소극적인 군인은 오히려 해가 됩니다. 그래서 전진 명령이 떨어졌을 때 뛰지 않는 군인은 총살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죽어라 싸우지 않으면 싸우지 않으면 적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의와 선의 편에 섰다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기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주님의 양식은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당신의 양식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따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영혼 구원에 힘쓰기 위해 은총과 진리의 양식을 청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매일 청한다는 말입니다. 전쟁 중에 휴가가 어디 있겠으며 휴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교를 위한 열정으로 매일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 밖에 있게 됨을 명심합시다. 매일 조금이라도 기도해야 하고 그 목적이 나와 이웃의 영혼 구원이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신앙인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힘과 교회의 의욕을 잃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시니

-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JSRr-Dg9j5Q

 

​-조재형신부-

착각과 왜곡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전혀 다릅니다. 착각은 의도하지 않은 실수입니다. 그래서 착각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곡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키는 범죄입니다. 그래서 왜곡은 큰 상처를 주기도 하고, 법의 심판을 받기도 합니다. LA로 홍보를 갔을 때입니다. 점심 먹고 산보를 가면서 바다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습니다. 30분이면 간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한참을 가도 바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2시간이 넘게 걸었더니 멀리서 바다가 보였습니다. 나중에 전화를 받아보니 걸어서 30분이 아니라 차로 30분 걸리는 거리였다고 합니다. 제가 제대로 듣지 않았던 실수도 있었지만, 자매님은 당연히 차로 가는 거리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돌아오는 길에 차로 마중 나와서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왜곡 중에는 역사적인 사실도 있습니다. 독도는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의 땅인데 일본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지만 일본은 아직도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독도 주변의 지하자원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욕심입니다. 임진왜란, 일본의 식민통치를 통해서 대한민국을 침략했던 일본의 야욕입니다. 왜곡 중에는 정치적인 사실도 있습니다.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조작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고문과 날조로 증거를 만들었고, 정권에 눈치를 보며 판결했던 부끄러운 역사가 있습니다. 언론과 검찰의 합작으로 무고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했지만 재판 결과는 무죄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는 무도함이 있습니다. 왜곡은 주로 힘이 있는 권력과 조직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왜곡의 대상은 주로 약자이거나, 제거되어야 할 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도 왜곡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야는 아무 것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헤로데는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였습니다.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는 예수 한 사람이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거짓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왜곡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베엘제불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곡과 날조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과 날조는 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했던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사순시기는 거짓과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왜곡과 날조를 밝혀내고 진실과 자유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성령을 거스르고 모독한 죄는 가장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유다 사상에 따르면 수많은 마귀들을 통솔하는 마귀들의 ‘보스’이자 ‘대(大)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의 이름은 ‘베엘제불’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어둠의 통치자’ ‘악의 통치자’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대마귀와 결탁해서 다른 새끼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성령으로 마귀들을 내쫓고 있는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대마귀와 손을 잡고 마귀를 쫒아내고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큰 죄요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 어리석은 율법학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한 마디 던지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이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루카 복음 11장 17~18절)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사탄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존재로, 그리고 당신은 오로지 하느님의 힘으로 사탄을 굴복시키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느님 힘의 소유자요 관리자임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내쫓으시는 사건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공생활로 인해 마귀의 세력은 점점 소멸되어 갈 것이며 언젠가 당신 앞에 굴복하게 될 것임을 드러내고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업적을 훼손시키며 성령을 모독한 율법학자들의 미래는 참담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거스르는 죄는 단순한 죄, 일회적인 죄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고집스런 영혼의 태도입니다. 끝까지 이 땅에 오신 메시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수용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영예와 능력에 대항하며, 하느님의 구원행위와 맞서는 죄입니다.

 

이렇게 한 인간이 끝까지 완강하게 하느님과 맞서게 될 때, 하느님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전해주며,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오히려 적대하며 악담을 퍼붓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들어라” 라고 할 때 “들어라”라는 동사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을 온전히 걸어라” 라고 할 때 “걸어라” 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의 표본, 곧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 것의 표본은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양 떼”입니다.

곧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라 걷는 이의 표상입니다.

한편, 그 반대의 표상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가 있습니다.

벙어리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따라 걷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실현을 훼방하는 방해꾼입니다.

 

이 방해꾼은 제1독서에서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 그리고 화답송에서의 “무딘 마음”의 표상입니다.

곧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곧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따라 걷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악담으로 대적하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카 11,20)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 곧 하느님 권능의 임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을 듣고도 따라 걷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무딘 마음이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이 있어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따라 걷고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양 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이로세”

(시편 95,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카 11,20)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신앙의 어중간은 없다」

-반영억신부-

‘두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깃발이고, 하나는 마귀두목 베엘제불의 깃발입니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선택하면 부귀영화나 명예, 매혹적이고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가난, 업신여김과 모욕, 때로는 박해와 순교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매순간 선택의 삶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3,15-16).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집 때문에 사실을 바꾸고, 때로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고, 진실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마귀의 패거리로 몰아붙이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함이 쌓이면 마음속에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거짓 속에 묻힌 마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장상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지냈답니다. 장상의 사목지침에 구애받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독불 장군식으로 지내다가 성경 말씀이 가슴 깊이 다가왔는데 루카복음 7장3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신부님은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으며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십시오’(시편95,1-2).

 

가끔 세상의 정치적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당이십니까? 야당이십니까?” 그러면 말합니다. 저는 ‘천주당’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