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13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3. 3. 13. 05:32

 

2023년 3월 13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가 4,24ㄴ-30)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native pla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람 장수 나아만은 나병 환자였다. 엘리사 예언자가 그의 병을 고쳐 주자, 나아만은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고향 사람들이 예언자를 거부하기 때문에 복음은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전해진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A와 B 두 사람이 있습니다. 차례로 동전을 던져서 두 사람 모두 앞면 또는 뒷면처럼 같은 면이 나오면 둘은 100만 원씩을 받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면이 나오면 두 사람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이제 A가 먼저 동전을 던졌습니다. 앞면이 나왔습니다. 이제 B가 동전을 던질 차례입니다. 지금의 경우 앞면이면 100만 원을 받고, 뒷면이면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드디어 B가 동전을 던졌습니다. A, B 모두 “제발 앞면”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뒷면이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누가 죄책감을 더 느끼게 될까요? 거의 모두가 B가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죄책감도 더 느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수치가 자그마치 92%입니다. 심지어 A로부터도 “앞면을 던졌어야지.”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A가 비난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자신이 처음에 뒷면을 던졌더라면 100만 원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도 50%의 잘못이 있음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는 남 탓을 먼저 하곤 합니다. 그러나 남 탓하기 전에 자기 탓은 어떤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남을 판단하지 마라.’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닐까요? 남 탓하면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들은 탓을 외칩니다. 분명히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지만, 예수님 탓을 하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여주셔도 의심하면서 또 다른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향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탓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면서 산 벼랑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남 탓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고 하지요. 남 탓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된 습관입니다. 습관적으로 남을 먼저 탓하는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좋은 말을 남에게 베푸는 것은 비단옷을 입히는 것보다 따뜻하다(순자).

​화가 나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거부한 상태인 이유

-전삼용신부-

https://youtu.be/FugE3ftyqvg

 

 

채종기 씨는 자신의 토지를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분노로 숭례문에 불을 질러 우리나라의 오랜 상징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범행 당시 68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는 2년 전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현장 검증에서 이런 망언을 늘어놓습니다.

“내 말 한마디만 들어줬어도 이런 일 없었어요. 그렇지만 사람 인명피해가 없고 이런 문화재는 재 복원하면 되잖아요.”

 

토지 보상은 자신의 생존에 달린 문제입니다. 건설사는 약 1억 원의 감정 평가를 내렸고 채종기 씨는 5억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분노를 나라에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분노는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당화 시킵니다. 따라서 분노가 일어났을 때 행위를 바로잡으려고 하면 늦습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채종기 씨의 경우처럼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십니다. 마치 일부러 화가 나게 하시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분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며 사렙타 마을의 과부와 나아만의 예를 드십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 와서 자신들이 메시아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예수님을 참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를 유유히 빠져나가십니다. 그들의 분노가 예수님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임을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밀어 떨어뜨리려 하는 행동보다는 예수님의 말에 분노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어야 합니다.

 

감정을 추스르는 법을 배우려면 어떻게 감정이 생기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나 문제는 반복됩니다. 감정이 생기는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김주환 교수는 우리가 여러 감정을 말하지만 모든 감정의 근저에는 ‘두려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은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세 가지인데 투쟁-도피-경직의 세 반응입니다. 이러한 반응이 일어나면 이성은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위협에 다시 직면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식입니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났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고 달아나게 됩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생각합니다. ‘담부턴 이 산에 오면 안 되겠다. 근데 나라는 뭐 하는 거야? 저런 멧돼지를 잡지도 않고. 아 짜증 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이젠 운동도 하지 말라는 건가?’ 이렇게 감정은 생각 다음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몸을 인식한 다음에 생겨납니다. 몸의 반응은 생존을 위해 저절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뇌 가장 깊숙한 곳에는 편도체의 아미그달라라는 생존 본능을 담당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진화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입니다. 이 부분과 연결된 것이 자율 신경계입니다. 자율 신경계는 몸의 근육이나 장의 운동, 심박수나 체온 등을 담당하는데 생존을 담당하는 편도체에 붙어있습니다. 대뇌는 생각을 포함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변연계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생존을 위해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대뇌는 신체의 변화를 해석하여 다시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감정을 일으킵니다. 사람은 그때의 기억보다도 감정을 기억하며 그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삶을 유지합니다. 이 역할을 전두엽이 합니다. 전두엽은 인간만이 가진 가장 발달한 뇌의 부분입니다.

 

자, 이제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생존을 포기하면 됩니다. 생존을 생각하는 마음이 ‘불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존을 포기할까요? ‘평안’하면 됩니다. 아이들은 이 해답을 압니다. 자신의 생존을,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줄 대상에게 마치 보험 들 듯이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네 살 아이가 호흡 곤란으로 목숨을 담보로 한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결국 아이는 부모에게 자신을 안아 달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신을 안으면 자신은 부모를 더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존재 안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임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에서 죽은 존재들입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부모의 포옹에 맡기는 것처럼 하느님 품에 안긴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겼기 때문에 더는 잃을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잃을 생명이 있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부모의 품 안에서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이때 분노나 화, 두려움 등이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생존권을 내어 맡길 대상을 만나지 못한 이들의 것입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나의 생존권을 보장 받아야 한다면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겠다고 오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 품에 맡깁시다. 그러면 모든 나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험이고 보험입니다. 왜 돈에 대한 보험은 들면서 감정에 대한 보험은 들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의 믿음에 목마르신 예수님

-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PYn8LFz5zGo

 

​-조재형신부-

영어로 ‘이해’는 ‘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서 있으면 이해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근대의 문을 열었던 유럽의 르네상스는 문학, 예술, 과학, 의학에서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였습니다. 1000년 동안 이어오던 중세의 ‘규범과 틀’을 과감하게 벗어버렸습니다. 이슬람 문명이 번역한 고대의 학문과 철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중심의 새로운 사상이 시작되었고,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밝혔습니다. 반면에 ‘오해’는 ‘mis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서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내가 왕년에 다 해 봐서 안다.’라는 말을 자주 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조선은 서양의 학문과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학문이라고 천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인 서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이 유일한 통치기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주교를 박해하였고,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외면하였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도 합니다. 영어는 주어 다음에 동사가 나오기 때문에 처음 들어도 대충 이해할 수 있지만 한국어는 동사가 맨 나중에 나오기 때문 끝까지 들어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판단한 적이 많았습니다. 예전에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노인대학 미사가 화요일에 있었습니다. 제대회에서는 소성당에 미사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저는 착각하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대회 자매님께 먼저 묻지도 않고 미사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짜증을 냈습니다. 자매님은 소성당에 모든 준비를 해 놓았는데 제가 짜증을 냈으니 무척 난감하였습니다. 그래도 저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착각하였다는 것을 알았고, 자매님께 사과하였습니다. 자매님도 저의 사과를 받아 주었고, 제대회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도 조조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고 충실한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였습니다. 적벽대전의 패배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았던 조조의 성급함에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보낸 나아만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았습니다. 아람 왕이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나아만을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는 자초지종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만을 보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도 요르단 강 보다 좋은 강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자초지종을 듣고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었던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었고, 그의 나병은 깨끗해 졌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자초지종을 듣기 보다는 자신들의 판단을 먼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기 보다는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은 그 색안경의 색깔대도 보이기 마련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나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길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그 길로 갔기 때문에 나병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희생, 순명, 사랑, 헌신, 봉사’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목적이 아닙니다. 길은 목적지를 가기위한 도구입니다.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길’은 굳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길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 지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계명과 율법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계명과 율법을 초월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 굳이 땅위의 길이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하느님께로 가는 계명, 율법, 규정이 필요 없으신가요? 아니면 사랑의 계명, 봉사의 율법이 아직은 필요하신가요?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동족으로부터 발길을 돌리시는 예수님!

-양승국신부-

 

나자렛 사람들은 참으로 큰 축복과 은총,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하느님, 그토록 간절히 고대하던 메시아 예수님과 동향(同鄕)이라는 것 얼마나 큰 영예였을까요?

 

예수님 입장에서도 나자렛 사람들, 참으로 고마운 존재들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면서 갖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었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을 향한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계셨기에, 그 어떤 사람들에 앞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파하고 싶으셨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대상자가 나자렛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도 무시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불경한 사람으로 단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 모두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즉결심판에 처하려고 합니다. 일정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습니다. ‘죽입시다!’ ‘옳소!’ 하는 식의 인민재판식으로, 다수의 폭력으로 예수님 한 사람을 처단하려고 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참으로 큰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인간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천부당만부당한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뜨리려 합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구사일생으로 궁지에서 빠져나오셔서 자신의 갈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을 끝까지 거부하고 단죄하는 나자렛을 영원히 떠나십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다 보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고향마을을 등지십니다.

 

이제 고향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복음, 구원의 기쁜 소식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이방인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비록 동향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복음의 수혜자가 됩니다.

 

세례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수도 생활이나 사제생활의 연륜이 많다고 해서, 성당 가까이에 산다고 해서, 단체장을 맡는다고 해서 절대로 신앙의 프리미엄이 붙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진지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하느님의 자취를 찾아 나가려는 매일의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동족으로부터 발길을 돌리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가 몸 담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지 진지하게 반성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 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30)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루카 4,2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함은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