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12일 사순 제3주일

Margaret K 2023. 3. 12. 06:24

 

2023년 3월 12일 사순 제3주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요한 4,5-42)

 

Whoever drinks the water I shall give will never thirst;

the water I shall give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 모세에게 불평하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바위를 쳐 물이 나오게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며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주님을 가리는 장막

-키엣 대주교-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이 서로 왕래하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돌아가려면 다리가 필요합니다. 민족과 믿음을 가로막고 있는 강과 벽을 넘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다리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인간을 영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다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물 옆에서 한 여자를 만나셨습니다. 여자는 경멸의 눈빛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피곤하고 목이 마른 그저 보잘것없는 유대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물을 가지고 있기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물을 길을 두레박과 가족도 있고 가르디움산 위에 견고하게 세운 성전도 있었기에 교만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그 허상들이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아끼는 우물은 영혼을 키우는 생명수가 아니라 더럽혀진 우물일뿐이고 세상의 가족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가족이 될 수 없으며 주님이 계시지 않는 벽돌로만 지은 성전은 위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한 순간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초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깨달은 순간 믿음과 희망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근원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입니다. 지금 나엑게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는 것들이 어쩌면 나를 가두는 감옥인지도 모릅니다. 나를 보호해주는 집과 재산, 욕망은 장막이 되어 그리스도를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우물에 있던 그녀가 믿고 의지했던 삶을 찢고 조각내었습니다. 믿음의 샘물에서만이 하늘나라의 보물을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자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길을 밝혀주는 등불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영적인 삶으로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몸을 묶고, 눈을 가린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독수리 날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날지 못하는 닭입니다. 아직도 다리 저편을 건너지 못하고 이쪽에 머물러 있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여자는 모든 것을 버렸지만 우리는 아직도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아직도 속세의 꿈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재산과 욕망은 믿음으로 가는 강물을 가로막는 무덤입니다. 위선과 환상, 형식적인 믿음, 불효는 여전히 우리의 내면을 볼 수 없게 덮고 있어 주님을 만날 수 없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거둬내야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려야 가볍게 주님이 계신 곳으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이 흑과 백을 구분하는 칼날이 되어 죄와 속세의 편안한 삶과 위선적인 믿음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소서.

주님의 말씀이 저를 가두고 있는 무덤을 무너뜨려 믿음의 강물이 흘러 내리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도록 하여 주소서.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위해 사랑이 피어나게 하여 주소서.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사마리아 여인이 믿음을 깨우치는 것을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2. 세상이 발전할수록 우리의 삶은 바쁘고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갈망하고 있는 영적인 삶은 무엇입니까?

3. 은혜의 강이며 행복의 원천이신 주님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말씀의 나눔

1. 물질적 부족함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의 은총으로 영혼의 부족함을 알게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영적인 삶에 어떤 의미입니까? 참회와 묵상을 통해 주님께 기도해보십시오. 주님께서 영적인 삶으로 가는 길로 인도하여 주실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나라에서는 못생긴 사람을 오징어에 빗대어 말하기도 하고, 또 호박이나 메주에 빗대어서 말합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까 싶어서 찾아보니, 일본에서는 배꽃처럼 못생겼다고 말하고, 불가리아에서는 샐러드처럼 못생겼다고 말하더군요. 나라마다 못 생김의 기준으로 삼는 사물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물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 같습니다. 자기 세계에서는 전혀 못생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고 또 최고로 멋진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잘 생기고, 못 생기고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구분이 그렇게 의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책을 보니, 요즘에 거북목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모니터를 많이 보면서 거북목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로 계속 나가다가는 거북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표준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계속 진화되는데, 진화의 방향이 거북목으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백 년 후, 거북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상이고, 거북목 없는 사람이 비정상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미의 기준이 이제껏 계속 바뀌었던 것을 생각하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지금의 판단이 결코 옳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 미의 기준도 바뀌는 것처럼, 지금 맞다는 것도 어느 순간 당연히 틀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섣부른 판단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온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이 여인에게 물을 청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목이 마르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온 세상 구원에 목이 마르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이 이방인 취급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 명의 예외 없는 구원에 목마르셨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수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현실적인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동문서답하는 형식으로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화하십니다. 그 결과 진정한 예배에 대한 말을 나눌 때는 처음 생수에 관한 대화하는 다르게 일 보 전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이제 고을에 사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직접 증언할 정도가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아무도 없는 벌건 대낮에 우물가를 찾았던 여인인데 말이지요.

주님의 뜻에 우리 모두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운다면 주님 뜻이 세상에 펼쳐지지 않습니다. 우리 구원에 목이 마르시는 주님의 갈증을 풀어 드릴 수 없습니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움직여야 한다(알버트 아인슈타인).

​부모를 예배하지 않으면 온전한 부모가 될 수 없다.

-전삼용신부-

https://youtu.be/iDPKdexhUuw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김창옥 강사는 수많은 강의를 하며 기쁨과 공감을 주는 일을 했지만, 현실은 공허함과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있었지만, 심지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어디라도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한 노 수사님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수사님은 일을 잠시 쉬고 프랑스 시골에 있는 수도원에 가서 두 주 정도 피정을 하라고 권해주었습니다. 얼마나 절박했는지 김창옥 씨는 생전 처음으로 휴가를 내고 말도 안 통하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피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자기 내면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듣고는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 너 여기까지 잘 왔다!”

 

이 위로를 받고 어느 정도 다시 힘을 낼 수가 있었습니다. 김창옥 씨의 아버지는 김창옥 씨에게는 능력 없고 창피한 분이었고 무섭고 닮기 싫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로 살아야 했고 또 아버지와 다르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쳐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 하는 분에게 힘을 얻어 그분처럼 살아갑니다. 김창옥 씨는 예배 할 대상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을 청합니다. 당신께 예배 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녀는 여섯 남자와 살고 있었지만, 삶에 지쳐 물을 뜨러 온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의 물, 곧 영과 진리를 주실 분임을 밝히십니다. 여인은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으로 자신의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에 예수님도 양식을 먹은 것처럼 흡족해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예수님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고 그렇게 흡족해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배 드리지 않는 인간은 삶에서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심순덕 시인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3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리움에 사무쳐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시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엄마가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발뒤꿈치 다 해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는 내용입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알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밤중 자다 깨어 방 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특히 자신이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고 엄마가 액자 속 사진으로만 남았을 때, 엄마는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 시인은 이 시를 쓸 때 힘이 들었을까요, 아니면 힘이 났을까요? 어머니를 생각하며 자신도 아이를 키우는 처지에서 힘을 내야겠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머니를 예배 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되는 방식입니다.

심순덕 시인에게 어머니께서 보여준 모범과 가르침이 ‘진리’입니다.그리고 자녀를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이 ‘영’, 곧 ‘은총’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 하는 자는 또한 영과 진리로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은 또한 나의 피 흘림인데 어머니를 예배 하며 피 흘리면서도 힘을 냅니다. 교회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 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 하게 함으로써 생기 있는 신앙인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한 중학교에서 도덕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써 오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처음엔 아이들도 쑥스럽고 부모도 쑥스러워했습니다. 서른 번의 칭찬이 끝나고 아이들은 “그냥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이었는데, 요즘 집이 좋아요.”, “부모님을 칭찬하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칭찬을 마친 내가 참 대견스러워요.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아요”와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참조: ‘엄마가 울었다’, 지식채널 e, 유튜브]

이런 예배를 통해 아이들도 이제 부모가 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부모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 하지 않는 자가 온전한 부모가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생명의 물을 마셔라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GSFk4l6NUBc

 

​-조재형신부-

LA 신문 홍보를 하면서 ‘교회신문’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서부지역에 있던 ‘가톨릭신문’이 철수하였습니다. 그동안 가톨릭신문을 구독하던 독자들은 3년 동안 교회신문을 구독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서부지역에 신문홍보를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톨릭평화신문’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었고, 구독신청을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홍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고, 교우들에게도 적극 권면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신문홍보를 하려고 합니다. LA에 머무는 동안 연도와 연미사를 봉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면서 깊은 상심에 빠져있는 교우가 있었습니다. 제게 연도와 미사를 부탁하였고, 저는 기꺼이 고인을 위한 연도와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서 동부에서 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고인을 기억하고, 유족을 위로하려는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입니다. 한국의 감독은 ‘히딩크’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평가전에서 5:0으로 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히딩크 감독의 별명은 ‘오대영’이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감독들은 한국 선수들이 체력은 강하지만 기술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좋은데 체력이 약하다고 하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강한 체력을 요구하였습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16강을 넘어 8강까지 올라갔을 때입니다. 모두가 만족하고 있을 때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I am still hungry!” 나는 여전히 목마르다고 하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목마름을 채워주듯이 한국 선수들은 4강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독일에게 아깝게 1:0으로 패배해서 결승까지는 가지 못하였지만,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끌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고, 2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말라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의 순위가 올라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우리들의 신앙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태함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사제들의 식어버린 열정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강론을 준비하고, 환자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하는 대신에 개인적인 취미활동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제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해보지도 않고 미리 포기하는 좌절감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자신의 책임을 교회와 제도의 탓으로 회피하는 무능함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이미 지나간 팬데믹을 핑계 삼아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신자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좌절하는 신자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주교님께서는 교회의 이름으로 저를 미주가톨릭평화신문으로 보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신문구독자를 늘리는 것입니다. 직원들과 함께 교회의 소식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문사를 재정적으로 안정되게 운영하는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팬데믹 때문에 신문홍보를 제대로 못하였지만 이제는 열심히 신문홍보를 다녀야 합니다. 신문사 운영을 위해서 광고를 유치고, 좋은 필진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동북부 엠이의 일을 맡겨 주셨고,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도 맡겨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맡겨 주셨으니 지혜를 주시기를 청하며 좋은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릴 때, 그 작은 씨앗 안에 숨어 있는 열매와 곡식을 보기 때문에 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꿈 꿀 수 있고, 이 세상의 것들을 넘어서는 참된 진리를 위해서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총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딜 가도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 갈증에 매일 허덕이는 오늘 우리들!

-양승국신부-

 

오늘 소개되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 장면은 하느님께서 허물투성이요 죄인인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접근하시고, 어떻게 대하시며, 어떻게 동반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이 아무도 없는 대낮 정오 무렵에 물을 길으러 마을 공동 우물가를 찾았습니다. 근동 지방의 정오 무렵은 햇빛이 강렬함으로 인해 너무나 뜨겁고 건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급적 외출을 삼갑니다. 따라서 아낙네들 더위가 한풀 꺾인 해질녁 우물가로 모여 들었습니다. 거기서 그녀들 특유의 잡담과 뒷담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하필 정오 무렵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정오 무렵 우물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인은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동네 여인들의 입방아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그녀는 다섯 번이나 남편을 교체했던 사연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다섯 번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녀 내면에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컸던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녀의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여인은 혹시나 하고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 헤매다녔던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이런 욕구불만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평생을 두고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는 않는 여인의 갈증을 채워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다가서십니다. 이윽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보십시오! 예수님만이 그녀 내면의 깊은 상처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그녀가 평생토록 지고 왔던 십자가의 무게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예수님께서 건네주시는 생명의 물 한잔으로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물은 다름 아닌 구원의 샘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생명의 샘물을 건네십니다.

 

자비하신 예수님과 ‘참 만남’, ‘일생일대의 은혜로운 만남’을 통해 여인은 서서히 자신이 처한 비참한 실상을 파악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끝도 없는 갈망을 영원히 채워주실 분이 바로 자기 앞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야말로 제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리더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담자이며 상담 고객인 사마리아 여인을 밀어붙이지도 않습니다. 그릇되게 살아온 삶에 대해 질책하지도 않습니다.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놔주십니다. 그렇다고 완전 방임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 자극도 주시고, 다른 한편으로 격려도 하십니다. 천천히 인내롭게 과정을 밟으면서 그를 영원한 구원의 샘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 참된 리더의 전형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딜 가도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 갈증에 매일 허덕이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수님 존재 자체가 그 지독한 갈증을 영원히 채워주실 생명수이십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주님께서 매일 건네시는 영원한 생명의 물을 받아 모시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마실 물을 좀 다오”>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의 장면을 들었습니다.

다섯 번이나 결혼하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지만, 결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빈 물동이를 들고 우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한 사마리아 여인과 자신을 내어주고 내어주어도 결코 다할 수 없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퍼주는 샘솟는 물을 들고 우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렇게도 목말랐던 이 여인은 이제 마침내 일곱 번째 남자, 완전한 남자, 완전한 사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목마른 두 영혼의 만남, 이 아름다운 만남은 곧 십자가에 메달리신 예수님과의 만남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사랑과 생명에 대한 목마름으로, 영과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여기 ‘양주 올리베타노 수도원’이라는 우물에 물을 기르러 와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주시는 “샘솟는 물”(요한 4,10)을 마시겠다고 이 ‘거룩한 미사’에 함께 모였습니다.

참 아름답고 거룩한 만남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 바로 “샘솟는 물”(요한 4,10)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요한 19,28)라고 하셨던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라고 청하면서, 바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이 아름다운 만남의 때는 십자가에서처럼 우물가에서도 “정오 무렵이었습니다.”(요한 4,6)

우리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요한 4,23)

 

바로 이때가 서로 상종하지도 않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진 때요, 십자가에서 성전 휘장을 찢으신 때요(마태 27,51), 당신의 말씀과 몸을 쪼개어 오시는 ‘바로 지금’입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네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요한 4,10)

이 질문은 목말라하고 있는 우리가 ‘진정 참된 목마름이 무엇인지’, ‘대체 무엇에 목말라해야 하는지’, ‘그것을 채워줄 자가 누구인지’를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결국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주제’는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이지에 대한 것이요, ‘둘째 주제’는 그 선물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것입니다.

‘첫쩨 주제’인 ‘하느님의 선물’은 바로 짧은 복음에서는 “샘솟는 물”(요한 4,10)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인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라고 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아닌 것에는 그 어떤 것에도 더 이상 목마르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만을 만나게 되는 일을 말해주며,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자기를 내어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예수님의 목마름이 솟아오름이요, 그 물이 그 사람 안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이웃에게 번져감이요,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시킴을 말해줍니다.

바로 이 물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진 그 물이요(요한 19,34),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요, 영이며 진리요, 곧 구원입니다.

바로 이 물이 제1독서에서 예표된 호렙의 바위에서 터져 나온 그 물입니다(출애 17,6).

그래서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로마 5,5)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로마 5,8)

오늘 복음의 ‘둘째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것입니다.

곧 참된 예배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주실 분, 메시아인 그리스도라는 계시입니다(요한 4,25).

 

참된 예배는 장소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드리는가, 그리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지금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요한 4,23)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영이요 진리이신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께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미사가 십자가에 제헌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드리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로마 5,1-2)

이제 이 아름다운 만남의 마지막 장면을 보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만남의 마지막은 신앙고백으로 마무리 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이방인 백부장이 “이분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6,39)라고 고백했듯이,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마리아인들이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분이야말로 진정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요한 4,42)

이처럼 만나는 이를 믿는 일, 그리고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만남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만남이 바로 오늘 복음의 우물에서의 만남이요, 또한 십자가에서의 만남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에서의 만남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만남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부분인 ‘짧은 복음’만을 살펴보았습니다.

‘긴 복음’에서는 제자들과의 대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는 ‘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제자들과의 대화인 ‘긴 복음’에서는 ‘빵’(양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 중에 당신 자신을 “샘솟는 물”(요한 4,10)로 주심에 감사드리며, 그 은총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내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이 이루어지는 일, 그래서 하느님 아닌 그 어떤 것에는 목마르지 않는 일, 동시에 모든 일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일, 그리고 하느님이 내 안에서 샘솟게 하는 그 물을 이웃에게 퍼주는 일, 그리하여 이웃들과 함께 “이분이야말로 진정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요한 4,42)라고 고백하고, 영과 진리로 아빠 아버지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일을 몸소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요한 4,7)

 

주님!

빈 물동이의 목마름으로 우물에 긷게 하소서.

당신을 만남이 믿는 일, 사랑을 고백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소서.

십자가의 우물에서 샘솟는 물을 마시게 하소서.

몸을 쪼개는 일, 장벽이 무너지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소서.

제 몸을 부수어 샘솟는 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생명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생명을 줍니다. 활력을 줍니다. 특별히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생명의 물’과 차별 없는 사랑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필요한 은총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 번째 주제입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으로 살려면 말씀이 필요합니다. 물은 흘러야 합니다. 그래야 썩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습니다. 물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합니다. 정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은 영혼의 거울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더러움을 비추어주고 깨끗하게 하도록 일깨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한 말씀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혼을 맑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목말라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4,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단순히 마시는 물이 아니라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고 행동하게 될 때 그 안에 구원의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신앙인이 영적 양식인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듣지 않으면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4,34). 결국, 단 하루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않으면 진리 안에서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양식은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무엇입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하루라도 소홀히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화답송을 기억해 보십시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묵시록 22장 17절에 보면“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물을 거저 받아라.’그야말로 ‘공짜로 받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준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담을 그릇은 내가 준비해야 합니다.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으니 문제입니다.

 

묵시록 3장 20절에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분께 매달리기도 전에 먼저 나를 위해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 일에 바쁘면, 내 안이 시끄러우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은 그분뿐이심을 알고, 다가갈 때에만 비로소 그분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청하지 않는 데 억지로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생명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데 너무도 귀한 말씀이라고 책장 안에 고이 모셔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금박을 입히고 가죽으로 포장하여 지퍼를 채운 채…. 어떤 사람은 어떤 말씀이 있나 들춰보기는 하는데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사실 실천함으로써 풍요롭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행하게 될 때 은총이 됩니다.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씀대로 실행함으로써 축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병원에 봉성체를 다녀오면서 환자분에게 “성경을 읽으십시오.”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눈이 잘 안 보여서 읽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읽는 법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성경을 탁자에 갖다 놓고 간호하시는 분이나 누가 병문안을 오거든 꼭 성경을 몇 구절 읽어달라고 청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 읽는 사람도 혹 신자가 아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접하는 기회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군불 때고… 일석삼조입니다.”

 

어느 집에 환자방문을 갔더니 개신교 신자가 요양보호사로 와 계신 데 시간이 남으니까 환자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계시다라고요. 참으로 기뻤습니다.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는 그분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묵주기도를 바치나? 생각해 봤습니다. 활기 있는, 생명 있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주제입니다. 복음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는 물을 달라는 예수님께 “선생님은 유다 사람이면서 사마리아 사람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유다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앙숙관계, 상종하지 않던 때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에 관해 예수님의 얘기를 듣고는, 인간적인 마음에“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4,15). 하고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이틀이나 머물렀습니다. 상종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함께 지냈다는 것은 벽을 넘은 것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옳지 않은 사람도, 의견이나 성격이 다른 경우에도 예수님의 사랑을 참되게 만나면 사람이 바뀝니다.

 

우리도 벽을 넘어야 합니다.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며 멀리했던 사람들, 상처받았다고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나만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편견과 오해의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구원에 집중했듯이 오늘 우리의 영혼 구원에도 집중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을 등진 사람은 많았지만, 예수님께서 등을 돌리시고 포기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절망하는 여인을 찾아 나서서, 그의 영혼의 갈증을 해소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위로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목이 타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아 욕구불만과 정서불안, 정신적인 아픔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체성사로 다가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 양식을 주십시오.”하고 간절히 청하면서 그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결국에는 깨달음과 더불어 더 큰 은혜를 입게 됩니다.

 

특별히 성경 말씀 안에서, 그리고 미사성제를 통하여, 성체조배나 일상기도 안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양소입니다. 매일 섭취해야 하는 양식입니다. 구원의 생명수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가운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

-송영진신부-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요한 4,7).”

 

마실 물을 좀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일이 연상됩니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9,28).”

예수님의 ‘갈증’은, 구원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여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잘 보면, 사마리아 여자는 처음에는

예수님께 물을 드리기를 거절했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다음에는

물을 드리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요한 4,28).

이 이야기는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물을 드린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생명의 물’을 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는

참된 행복과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참되고 영원한 행복과 안식과 평화를 얻어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물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샘’도 주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생명의 물’의 원천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 안에도

‘물이 솟는 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생긴 샘에서 솟는 물은 나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다른 사람들을 그 생명으로 인도해 주는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능동적인 신앙생활’과 ‘이웃에게 봉사하는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산상설교에 있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분인데,

‘빛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등’도 주시는 분입니다.

신앙인은 각자 하나의 등불이 되어서, 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자신의 앞도 비추고, 사람들 앞도 비추어서,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마태 5,15-16).>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요한 4,16-18)”

 

예수님께서는 왜 갑자기 여자에게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셨을까?

여자가 ‘몸의 갈증’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요한 4,15), 우선 먼저

‘영혼의 갈증’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즉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여자는 심각하게 갈증을 느끼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갈증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는

말씀은,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의 인생을

예수님께서 꿰뚫어보셨음을 나타냅니다.

그 여자가 도덕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생활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자가 참된 행복과 안식을 찾아서 방황하는 인생을

살았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도 영적 갈증에 시달리면서

방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남편’이라는 말을, 그 여자가 찾는 행복과 안식처를,

즉 참된 종교와 신앙을 상징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이라는 말씀은, 그동안 참된 종교와

신앙을 찾으려고 여러 종교를 전전했지만 찾지 못했다는 뜻으로,

또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라는 말씀은,

지금 속해 있는 종교도 참된 종교가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5-26)”

 

여자는 ‘메시아’를 알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었고,

막연한 심정으로, 그러나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직접 “내가 메시아다.” 라고

말씀하신 일은 없습니다.

여기서도 간접적으로 말씀하시는데,

뜻으로는 “내가 바로 메시아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라고 여자에게 말씀하신 것은,

여자가 믿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나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나그네 여행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만이 그 갈증과 허기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는 분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