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0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21,33-43.45-46)
The stone that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ornerstone;
by the Lord has this been done,
and it is wonderful in our ey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야곱이 요셉을 더 사랑하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다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넘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린 악한 소작인의 비유를 드시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코로나19 팬데믹 전, 이탈리아 성지 순례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때 특별히 한 성인이 인상 깊었습니다. 바로 베네딕토 성인이었습니다. 수도생활을 하셨던 수비아코, 서방교회 수도원의 발생지라고도 말하는 성인께서 직접 건립한 몬테카시노 등을 순례하면서 베데딕토 영성에 큰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순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베네딕토 규칙서’ 책을 샀습니다. 혹시 잘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규칙서의 주석서를 구매했지요. 그만큼 성인의 영성을 알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끝까지 다 읽는 저입니다. 그러나 이 규칙서의 머리말을 읽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웠고 그만큼 지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작년 말에 사제 피정을 신청하라는 인천교구 공문을 받았습니다. 여러 피정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중에 ‘베네딕토 영성과 가르침’이 보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피정 지도 신부님은 제가 구매한 책의 저자였습니다. 이 피정을 신청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피정 강의를 통해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규칙서에 대한 지도 신부님의 설명을 통해 성인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이었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신부님께 왜 ‘베네딕토 규칙서’를 읽기 힘들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책은 베네딕토 성인을 잘 아는 사람을 위한 해설서입니다. 따라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어려운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피정을 마치고서 이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성인의 기본 영성을 알고 난 뒤에 이 책을 이해하기는 훨씬 편했습니다. 책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전해주십니다. 밭 임자가 맡긴 소작인들은 포도원이 자기 것인 양 행동합니다. 그래서 소출을 받으러 온 종들을 오히려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아들까지 죽여 버립니다. 그들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소작인들이 해야 할 포도밭을 직접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등의 일을 직접 한 주인의 자비와 사랑은 잊어버리고, 마치 자기 것인 양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악한 자들을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줍니다.
알고 모르고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알려는 시도와 또 알아가면서 그 사랑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력을 과연 계속해서 하고 있을까요? 혹시 주님의 사랑을 몰라서 계속해서 불의한 소작인들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첫인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정확성은 그리 신뢰할 만하지 않다(이드리스 샤흐).
『어린 왕자』에서 사막 여우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어린 왕자에게 관계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은 참으로 의미 깊습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제때’입니다.
어린 왕자는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난 아주 쓸쓸하단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우는 “난 너하고 놀 수 없어. 난 길들여 있지 않으니까”이라고 말합니다. 어린 왕자는 길들인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여우는 “그것은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이야”라고 말합니다.
아직도 궁금해 하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말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넌 아직 수많은 아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내아이일 뿐이야. 그리고 네게는 나라는 것이 수만 마리의 여우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아쉬움을 느끼는 사이가 될 거야. 내게는 네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것이고, 네게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어린 왕자는 그럼 어떻게 하면 서로 길드는가에 관해 묻습니다. 여우는 상대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한에서 조금씩 다가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말합니다.
“아주 참을성이 많아야 해. 처음에는 내게서 좀 떨어져 그렇게 풀 위에 앉아 있어. 내가 곁 눈으로 너를 볼 테니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이란 오해의 근원이니까. 넌 매일 조금씩 가까이 다가앉게 될 거야.”
다음날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제때’의 중요성에 관해 말해줍니다.
“같은 시간에 왔으면 더 좋았을텐데.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을 느끼겠지. 네 시가 되면 안절부절못하고 걱정이 되고 그럴 거야.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될거란 말이야. 그러나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나는 몇 시에 마음을 곱게 치장해야 할지 알 수가 없잖아. 친해지는 데도 의식이 필요하거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못된 포도밭 소작인들에 대해 말씀하시며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라고 하십니다.
소출은 에덴 동산의 선악과이고 우리가 바치는 교무금이며 십일조입니다. 내 집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소출을 “제때”에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 집에 얹혀산다고 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제때에 음식을 해서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의 주인이라고 하면 나는 제때에 음식을 바쳐야 합니다. 음식을 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때에 바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그분과 나는 서로 길들여져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주인이신가요, 손님이신가요? 나의 집은 주님의 집입니다. 어떤 교구장님이 한 본당에 방문하러 갔는데 주임 신부가 이렇게 소개했다고 합니다.
“저희 본당에 주교님께서 방문해주셨습니다.”
사실 성당을 지으면 그 키를 예수님의 대리자인 주교님께 봉헌합니다. 실제로는 사제와 신자들이 그 성당을 짓기는 하였지만, 그 주인은 주교님과 예수님이고 그 안에 사는 우리는 종들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지었으니 나의 것이라고 여기면 주교님과 예수님은 손님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되고 주인을 손님 취급합니다. 아니 자신들의 집을 차지하려는 적으로 여깁니다. 그렇게 여기지 않으려면 소득의 ‘10분의 1’을 바쳐야 합니다. 구약의 요셉이 자신이 마련한 베텔이라는 성전에서 주님께 어떤 약속을 하는지 봅시다.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10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2)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손님이 되십니다. 손님과 주인은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일방적 관계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싶다면 받지 말고 잘해주기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가 부담스러워 알아서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도 일방적인 주는 관계가 아닌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주고받음은 제때가 있어야 합니다.
저에게 찾아오는 신자분들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정해진 때에 규칙적으로 오시는 분들이 있고 자신이 원할 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누구와 관계가 오래 지속될까요? 때를 정해 놓고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왠지 그들의 외로움을 채워주기 위해 이용 당하는 느낌도 들고 그렇게 갑자기 연락하면 거의 시간이 되는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성전으로 봉헌하기 위해 제때에 예물을 봉헌하는 주님의 종들이 됩시다.
-조재형신부-
기시감(旣視感, 프랑스어: Déjà Vu 데자뷔)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만났는데 예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 가는 곳인데 예전에 와봤던 곳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혀 다른 공간과 장소인데 비슷한 전설과 신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인드라망처럼 어쩌면 우리는 모두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된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숙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처음 가는 장소인데도 예전에 와 봤던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신경과 혈관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있지만 우리는 하나의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몸의 여러 지체를 통제하고 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생각의 지평을 더 넓게 보았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이라고 보았습니다. 교회는 여러 곳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보다 2000년 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수님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막내로 태어났던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은전 스무 닢에 팔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은전 서른 닢에 팔렸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였고, 가족들에게 편안한 집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요셉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잘못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를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기시감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소작인은 주인의 포도원을 잘 가꾸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은 포도원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소출을 거두려고 주인이 종들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주인은 아들까지 보내서 소출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아들을 상속인이라고 생각하고 죽였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의 소작인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소출을 잘 내는 다른 소작인들로 바꾸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쁜 소작인들과 기시감을 느끼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교회의 부끄러운 역사를 인류와 역사 앞에 깊이 사과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 교회의 분열, 합리적인 지성에 대한 단죄, 마녀사냥, 권력과의 야합이 있었습니다. 나쁜 소작인의 모습을 보이는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도 나쁜 소작인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지 2000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유혹했던 악의 세력인 사탄을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닮아야 할까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빌라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께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했던 군중을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굳은 믿음을 보여주었던 백인대장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던 자캐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자캐오의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았다는 기시감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아」
-반영억신부-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써의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시며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속을 들켜버린 것을 알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옛 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면(마르6,14-29),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장엄하게 죽어가는 예언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헛된 약속을 하는 바람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요한의 목을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의인은 당당하고 불의한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주님 앞에서 항상 떳떳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죽음을 통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희생을 통해 다른 이를 이롭게 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송영진신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특권과 영예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 말씀’은 확정된 일을 통보하신 말씀이 아니라,
끝까지 당신 말을 안 들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조건부 예고’입니다.
결국 이 경고 말씀은, 너무 늦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는 호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끝끝내 예수님 말씀을 안 들었습니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안 믿었습니다.)
유대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선택된 백성’이라는 지위를 잃었고,
그들이 누리던 특권과 영예는 그리스도교로 넘어왔습니다.
만일에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도 유대교처럼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종교이니, 예수님께서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교를 향한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19-22).”
(여기서 잘려 나간 가지들은 유대교를 뜻하고,
접붙여진 ‘그대’는 그리스도교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5-6).”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도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마태 7,21).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고,
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머무르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즉 구원받지 못합니다.
신앙인이라는 신분 자체가 구원을 보장해 주는 특권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신앙인으로서 살 때에만 특권이 됩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마태 21,33-36).”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구약시대 역사를 요약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각 개인에게 주신 인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인생으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잘 가꾸고 보살펴서
많은 열매를 맺은 다음에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몫의 소출’은 ‘내가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느님께 드린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전부 다
가져가시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바꿔서 우리에게 돌려주십니다.
따라서 내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실하게 사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래 하느님께서 고용하신 소작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여기서 소작인이라는 표현은, 자녀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소작인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어떻든, 나의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나는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막 살아도 되는
권한이 없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뜻합니다.
예언자들이 한 일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한 일, 즉 ‘큰 죄’를 지은 일이었습니다.
소작인들이 포도밭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이야기는(마태 21,37-39),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이야기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소작료를 징수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살고 싶으면 나를 믿고 따라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앞장서서 가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고, 회개도 안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않겠다고, 즉 허무하게 죽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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