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8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태 20,17-28)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다고 주님께 하소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예루살렘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린이들에게 춤을 춰 보라고 하면, 한때 ‘개다리 춤’만 췄었습니다. 다리를 흔들면서 박수치며 손을 번갈아 머리로 넘기는 춤입니다. 코미디언 배삼룡씨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춤이었는데, 최근까지도 아이들에는 인기 있는 춤입니다. 한번은 방송에서 한 연예인이 이 춤을 따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박장대소합니다. 겨우 이런 춤을 추냐는 비웃음도 보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 동창 신부가 “이 춤 진짜 어려워. 너도 한 번 춰봐.”라고 말합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저의 뻣뻣한 몸으로는 도저히 출 수 없는 어려운 춤임을 깨달았습니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BTS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의 뮤직비디오를 보여준 뒤, 그 중 딱 6초 동안의 안무를 보고서 춰 보라고 했습니다. 딱 6초입니다. 전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 춤을 제대로 추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나는 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운전 실력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에게 자기 운전 실력을 스스로 점수 매겼습니다. 사람들 모두의 평균 점수는 몇 점이었을까요? 80점? 85점? 아니었습니다. 자그마치 93점이었습니다. 모두가 90점 이상의 베스트 드라이버인데 왜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을까요? 미국 코미디언 조지 칼린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보다 느리게 운전하는 사람은 똥멍청이이고, 나보다 빠르게 운전하는 사람은 또라이다.”
자신은 잘한다는 착각. 이 착각으로 얼마나 남을 판단하고 단죄했을까요? 훨씬 부족함이 많은 나인데도 말이지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면서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히 부모님의 마음으로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소망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의 관점에서 자기 아들이 다른 제자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고, 그 당연한 생각을 예수님께서 인정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들 역시 스승님의 왼쪽과 오른쪽에 앉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강조하십니다. 당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하시면서,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달리, 나를 낮출수록 높아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 자기는 잘하고 남은 못한다는 교만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과 함께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마크 트웨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가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곧 섬김의 방법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자신을 낮추어 누군가를 섬기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더 겸손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냥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더 높은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누가 더 겸손한지 내기하듯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는 겸손과 비굴함의 차이를 잘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겸손은 높은 사람이 낮아지는 것이고 비굴함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이신 당신이 그들을 씻어주었기 때문에 그들도 그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겸손해지려면 먼저 주님이며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수력 발전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낮게 흐르는 물은 아무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높이 있는 물은 위치에너지를 가집니다. 그것이 낮아질 때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줍니다. 바다의 물은 어떤 나무에도 도움이 안 되지만 위에서 내리는 비는 나무에 생명을 줍니다. 이처럼 높이 있다가 낮아질 때 누군가에게 자존감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의 전 재산은 오래된 자동차 한 대였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 가난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역의 제과점에서 물건을 배달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청년 시절엔 과도한 관료주의와 잘못된 정치에 대해 저항하는 삶을 삽니다. 총을 여섯 차례 맞았고 무려 13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후 2009년 정당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는 법에 따라 재임을 스스로 거부하고 대통령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국민들의 많은 성원을 받아 퇴임할 때가 더 높은 지지율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한번은 우루과이 남서부에 거주하는 헤랄드 아스코타라는 사람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려 화제가 된 내용인데, 그는 도로위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직장에 출근하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지갑까지 잃어버려 택시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대의 차들이 그냥 지나쳤지만 잠시 뒤 낡은 자동차 한 대가 와서 정차 했습니다. 운전자는 그에게 대통령 궁까지만 태워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단 탑승이 중요했던 아스코타는 기쁜 마음으로 차에 올랐는데 어딘지 낯익은 사람이 운전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운전자와 동승자는 다름아닌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영부인이었고 운전자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이에 놀란 그는 사진을 찍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며 자신의 SNS에 올렸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호세 무히카가 대통령 궁이 아닌 자기 사저인 농가에서 생활하며 운전기사 없이 출근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궁은 국민의 재산이라며 날씨가 추워져 지내기 힘들어진 노숙자를 위해 피어있는 대통령 궁을 내어주기도 했고 재임 기간의 급여 90%를 빈민 주택 기금으로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재임 기간 중 경제성장률을 상승 시켰고 극빈 계층을 위해 교육 제도를 정비하여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먼저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먼저 성체를 영하고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누군가의 발을 씻어줄 때 그 사람도 자신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이 믿음 없이 하는 겸손은 그저 상대에게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한 비굴함에 불과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느님임을 믿읍시다. 그리고 상대도 그렇게 대해줍시다. 이것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던 겸손함이었습니다
-조재형신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회전하고 있습니다. 태양계가 속한 은하를 ‘우리은하(Via lactea)’라고 합니다. 태양계에 있는 별들 중에 지구와 비슷한 별은 금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금성은 태양과 너무 가까워서 생명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별은 지구보다는 작지만 화성이라고 합니다. 관측결과에 따르면 화성에는 지구처럼 ‘물’이 풍부했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물은 지구나 화성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고, 우주에서 고체의 형태로 날아왔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는 아직도 생명의 터전인 물이 풍부한 반면 화성에는 그 많았던 물이 모두 우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장’의 크기라고 합니다. 지구에는 강력한 자기장이 있어서 태양풍이 지구에 도달하는 것을 지구 밖 35,000킬로까지 밀어낸다고 합니다. 그 힘으로 지구의 물은 우주로 사라지지 않고, 지구의 품에 남게 되었고,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화성에는 자기장이 약하기 때문에 강력한 태양풍을 그대로 받아야 했고, 그 결과 화성을 가득 채웠던 물은 허망하게도 우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구의 자기장과 관련된 영화 중에 ‘코어(The Core)’가 있습니다. 2003년에 나왔으니 20년 전의 영화입니다. 영화는 지구의 자기장이 멈추면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지구의 자기장이 멈추면 첫째, 지구 대기권을 이루는 공기층이 얇아지거나 사라집니다. 지구의 자기장은 마치 비를 막는 우산처럼 태양에서 오는 태양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 유전자의 심각한 파괴로 지구 생태계가 위기에 빠집니다. 태양풍이 사람이나 동식물에게 그대로 피폭되면 세포의 유전자가 파괴됩니다. 셋째, 지상의 전력 시스템과 지상의 통신 시설에 큰 피해가 발생합니다. 수시로 내려치는 어마어마한 번개의 위력 앞에 지구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구의 온도는 상승하고 바닷물은 증발하게 되고, 결국 화성과 같이 사막뿐인 행성이 되고 맙니다. 영화는 멈춰버린 지구의 자기장을 되살리면서 끝이 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의 자기장이 지구를 보호하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인간들이 인공지진으로 무기를 만들면서 지구의 핵이 멈추는 일이 생겼다고 설정합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인공지진으로 지구의 핵이 멈추면서 자기장이 멈추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죽이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리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하느님과 관계가 멀어지는 사람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기장이 사라지면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결국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공지진처럼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억누르려는 권력에 대한 욕망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요구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재물을 하느님의 자리에 놓은 사람들도 하느님과 맺어진 관계를 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들의 자기장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섬김과 겸손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제자들의 극단적 미성숙, 세속적 야심 앞에서 슬퍼하시는 예수님!
-양승국신부-
저는 개인적으로 복음서를 읽고 묵상할 때 꾸며낸 이야기라든지 공상 소설이 아니라 참이라는 것을 종종 깨닫습니다.
냉정하고 정확한 복음 사가들은 제자단의 모습을 묘사할 때마다 아주 가차없습니다. 수제자건 애제자건 핵심 제자단이건 상관없습니다. 나름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인데 그들의 모습을 절대로 미화시킨다거나 영웅시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무런 가감 없이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의 약점과 흠결, 미성숙과 흑역사를 감추지 않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야욕으로 가득했던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어머니까지 합세해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낯뜨겁게도 노골적인 인사청탁을 합니다.
인사청탁하면서 절대 그냥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품질 좋은 포도주 한 병, 그리고 고급 안주도 들고 왔을 것입니다. 백주대낮에 부끄러움도 없는지, 이렇게 예수님께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그 광경을 목격한 다른 열 제자가 불같이 화를 내며 불쾌해했습니다. 그중에 어떤 제자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좋은 엄마 계셔서 좋겠다. 우리 어머니는 대체 뭐하는 건가?’
예수님 입장에서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극단적 미성숙, 세속적 야심 앞에 혀를 내둘렀을 것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들의 모습에 엄청난 실망감과 자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다시 크게 심호흡을 하십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을 또다시 용서하시고, 크게 인내하시며, 가르치고 또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20장 26~27절)
「무엇을 원하느냐?」
-반영억신부-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해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명의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행동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놓인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군림해서 힘으로 내리누르는 삶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삶을 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낮춤과 섬김」
-송영진신부-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8).”
하느님 나라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일이 없는
나라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리는 일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압박과 억압을 받는 일도 없고, 권력에 대한 두려움도
불안감도 불쾌감도,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일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남들보다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낮은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런 일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즉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욕망과 남들에게 세도를 부리고 싶은
욕망을 버려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 라는 말씀과 “첫째가 되려는 이”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서 ‘너희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그냥 단순하게 ‘너희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 라는 말씀과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너희가 바란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과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쪽 세상에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쪽 세상에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저쪽 세상에,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방법이고,
그 나라에서 살기 위한 준비이며 훈련이고,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권력욕, 명예욕, 지배욕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라는
말씀은, 당신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오셨고,
어떻게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직접 모범을 보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고 시키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기만 하면 됩니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그 일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들 대신에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고,
낮춤과 섬김의 최고 단계를 보여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신 낮춤과 섬김은
겉으로만 낮추고 섬기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는 일입니다(요한 15,13).
만일에 사랑 없이 겉으로만 낮추고 섬긴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마음속으로는 하기 싫으면서도 그래야 한다니까 겉으로만 낮추고,
겉으로만 섬기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낮춤과 섬김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니까 그 일은 곧 기쁨입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 20,18-19).”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낮춤’과 ‘섬김’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5-9).”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을 낮추셨지만
부활하신 다음에는 원래의 높은 자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은
예수님처럼 부활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가신 그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입니다.
낮춤과 섬김 자체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목적지로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생략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설명해도,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과,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일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 분께서 그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시고, 마치 힘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일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내가 저 사람 쪽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그냥 손을 뻗어서 저 사람을 내가 있는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이 질문의 답은 “사랑하니까.”입니다.
<우리가 가서 살게 될 하느님 나라는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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