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6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3. 3. 6. 06:16

 

2023년 3월 6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가 6,36-38)

"Be merciful,

just as your Father is mercifu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린 예수님을 사흘 동안 못 찾았을 때가 있었지요.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께서 행방불명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뒤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원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이 사건에 대해 복음에서는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화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이해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 이해의 순간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언젠가는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그 순간에는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도저히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깨닫습니다. “맞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구나.”라면서 그 순간이 은총이었고 감사할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신학생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능력도 없고 자신감도 부족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하자, 하나같이 우리가 같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바쁜 신학교 생활에 자기 일하기도 벅찼으니까요. 그때 말만 하고 도와주지 않는 친구들을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얼마나 저 자신이 성장했었는지를 말입니다. 은총이고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용서하고 주라고 하시지요. 솔직히 예수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판과 단죄를 반복하고, 용서할 수 없다고 또 절대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나의 손해가 너무 큰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서두르게 판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해하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서두름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은 어떠했을까요? 너무 급한 서두름으로 하느님의 손길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걱정은 출처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를 약화시키는 것이요, 용기를 앗아가는 것이요, 인생을 단축시키는 것이다(존 란카스터 스팔딩).

어린 예수님을 사흘 동안 못 찾았을 때가 있었지요.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께서 행방불명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뒤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원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이 사건에 대해 복음에서는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화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이해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 이해의 순간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언젠가는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그 순간에는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도저히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깨닫습니다. “맞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구나.”라면서 그 순간이 은총이었고 감사할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신학생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능력도 없고 자신감도 부족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하자, 하나같이 우리가 같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바쁜 신학교 생활에 자기 일하기도 벅찼으니까요. 그때 말만 하고 도와주지 않는 친구들을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얼마나 저 자신이 성장했었는지를 말입니다. 은총이고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용서하고 주라고 하시지요. 솔직히 예수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판과 단죄를 반복하고, 용서할 수 없다고 또 절대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나의 손해가 너무 큰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서두르게 판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해하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서두름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은 어떠했을까요? 너무 급한 서두름으로 하느님의 손길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걱정은 출처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를 약화시키는 것이요, 용기를 앗아가는 것이요, 인생을 단축시키는 것이다(존 란카스터 스팔딩).

-전삼용신부-

https://youtu.be/1vmB5-F_atw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고 노래를 불렀던 가수 윤복희 씨의 삶을 간단히 살펴봅니다. 윤복희 씨는 극단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으로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무대의 내용 때문인지 아버지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아이들의 생계를 위해 극단을 쫓아 떠돌게 되며 윤복희 씨 형제들은 고아처럼 길거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잠을 잘 곳과 먹을 것을 걱정하며 살던 중에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말을 듣습니다.

윤복희 씨는 어린 나이에 삶의 이유를 잃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출소하였으나 생을 마감하여 그야말로 혼자 삶을 극복해 나가야 했습니다. 이제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는 말의 가사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워낙 천재적인 무대 기질이 있었던 터라 열여덟 살부터 미8군 무대에 섰고 때마침 세계적 톱스타 왓 어 원더풀 월드를 부른 루이암스트롱이 방한하였습니다. 루이암스트롱은 한국에 자신보다 왓 어 원더풀 월드를 잘 부르는 가수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윤복희 씨를 찾았고 윤복희 씨의 노래를 듣고는 깜짝 놀라 함께 공연하러 다니기로 합니다. 이렇게 윤복희 씨는 소속사에서 집을 세 채씩이나 사 줄 정도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때 사랑도 찾아옵니다. 서울대 출신이자 독일계 혼혈 가수인 유주용 씨와 결혼합니다. 유주용 씨는 자신보다 윤복희 씨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일을 그만두고 매니저를 자처합니다. 이때부터 그들의 사이는 벌어집니다. 유주용 씨가 윤복희 씨와 당대 최고 가수 남진 씨의 사이를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싸움을 벌이던 끝에 윤복희 씨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 그 소문이 맞는다고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혼 후 정말로 남진 씨와 결혼합니다. 나중에 윤복희 씨는 그 결혼이 유주용 씨에게 질투를 유발하기 위함이었기에 남진 씨에게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어쨌거나 윤복희 씨는 자기 남편이자 부모의 역할까지 해 주기를 바랐던 유주용 씨도 자기를 부모처럼 책임지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윤복희 씨는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무대에서 혼절하는 때도 있지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나가고 있고 치매만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혼자이기에 치매가 걸리면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여전히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고 누군가를 찾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소망은 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라는 게 틀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받으려면 먼저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윤복희 씨는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부모와 같은 사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무언가 해 줄 사람을.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부모처럼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일입니다. 독립시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할 때 받지 못하니 그 빈 곳만 바라보며 계속 누군가 나를 위로해줄 사람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명확해야 그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게 됩니다.

 

저는 행복을 바랐습니다. 행복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나 돈, 명예 등이 행복의 조건이라 생각했습니다. 나중에는 ‘사랑 받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니 사랑 받으려면 사랑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저는 사랑 받기 위해 사제가 되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꿈은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외롭지 않고 싶다”로 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외롭지 않게 해 줄 것인지 찾는 것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원하는 것은 “~ 하고 싶다”가 되어야 합니다. “~ 하고 싶다”라고 원해야 그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누가?”나 “무엇?”을 찾는다면 하느님이 배제되고 그러면 줄 것이 없어져서 얻을 것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순수하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수하게 원하는 것이 결정되었다면 이제 그것을 남에게 해 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해 주려면 부족한 게 없어야 합니다. 먼저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 해 주시는 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니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탈리오의 법칙과 하느님의 자비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HrlnKtudnOc

 

​-조재형신부-

‘흑기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대신 해 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술자리에서 간혹 흑기사를 볼 때가 있습니다. 술이 좀 과했거나,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부득이 하게 술을 마셔야 할 때에 대신 술을 마셔주는 우정(?)을 보여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술 상무’라는 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래처와 회식이 있을 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술도 곧잘 마시면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직원이 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는 않지만 친구를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LA에 신문 홍보를 오면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저를 맞이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보내 주시는 흑기사입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와 주시고, 제가 있는 동안 차량 봉사를 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편안한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아침에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니다. 가족처럼 지내는 부부들도 기꺼이 시간을 내 주곤 합니다. 제게도 흑기사가 되어 주시지만 LA에 오시는 다른 신부님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LA로 가는 발걸음은 늘 가볍고 편합니다.

 

주변을 보면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기꺼이 시간을 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퀸즈 성당의 본당 신부님은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나그네 사제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남미에서 선교하는 신부님들, 유럽에서 공부하는 신부님들은 옹달샘에서 목을 축이는 다람쥐처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사제관에서 머물다가 소임지로 돌아가곤 합니다. 때로 귀찮을 수도 있지만 신부님은 기꺼이 사제들을 위한 사랑방을 마련해 주십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작년에 손님 신부님들이 왔었습니다. 시카고에서 공부하는 신부님, 메릴랜드에서 공부하는 신부님, 한국에서 은퇴하신 신부님이 머물다 가셨습니다. 기꺼이 흑기사를 하지는 못하지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머물다 가라고 했던 것처럼 저도 신부님들이 머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젊으신 신부님들은 알아서 뉴욕을 다니기에 차량 봉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흑기사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지상 최대의 흑기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5000명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흑기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어야 했던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고 율법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흑기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이웃들과 내가 만나는 지점은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장소입니다!

-양승국신부-

 

수도자로서 수십 년 세월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해왔는데, 이 정도 연륜이라면, 이제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탁월한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데...아직도 손톱만한 일에 걸려 넘어지고, 분노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때로 공동체 구성원들과 사사건건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원인분석을 해나가면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과오로 인해 내게 다가온 상처, 대화 부족과 상호이해 부족으로 인한 고통, 최근 내 불편한 심기로 인한 부딪힘, 난데없이 다가온 십자가...

 

그럴 때마다 생각하셔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웃들과의 의견충돌이나 마찰, 그로 인한 상처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발버둥치다보면 결국 남는 것은 또 다른 상처요 또 다른 고통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지고,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열 일 제쳐 놓고 이제 하느님께로, 영적 생활로 돌아가라는 표시로 보는 것입니다. 판단이나 단죄, 그로 인한 영적 고통의 길을 그만 접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라는 표지로 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서고 나서 계속되어야 할 영적 작업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보다는 침묵, 판단보다는 묵상, 단죄보다는 용서의 길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려운 작업이 남아있습니다.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영적으로 재무장한 다음, 내적 평화를 되찾은 다음, 다시 한번 이웃들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공동체 생활의 리듬, 사이클을 요약해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들과의 관계 안에서 입은 상처와 고통☞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표시로 인식☞침묵 가운데 영적 생활☞내적 평화의 획득☞다시 그 형제들에게로 돌아감.

 

이웃들과 내가 만나는 장소는 참으로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주님을 알아보는 장소입니다.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장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장소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이웃들의 요구와 상황에 무관심하고 공동체에 대한 내 사랑이 결핍되고 있다면 결코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부정의 지침이요, 소극적인 지침입니다.

뒤의 둘은 ‘용서하고 베풀어 주어라’는 긍정의 지침이요, 적극적인 지침입니다.

첫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여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 10,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