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5일 사순 제2주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오. 17,1-9)
"This is my Son,
the Beloved, my Chosen on e.
Listen 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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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시며,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복을 내려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시어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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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눈
-키엣 대주교-
사람들은 사랑과 우정 등 마음으로 보는 것은 보고 있어도 잘 알지 못합니다. 물질적인 선물을 받고, 말로 표현할 때만이 사랑을 느낍니다. 사람의 마음, 내면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은 마음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얼굴과 외형적인 모습을 봅니다. 그 사람은 내면은 노력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혼 또한 볼 수 없습니다. 맑고 신성한 영혼은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비슷한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의 육체 속에 하느님 영광을 간직하고 계셨지만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신성을 본 제자들은 희망에 넘쳤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봐야만이 믿는 제자들의 모습,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인 아우구스티노의 고백처럼 그분께서는 우리 인간의 모든 관계에, 모든 순간의 기쁨과 모든 사람의 우정과 사랑 속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모든 행복의 근원은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 성아우구스티노, '고백록'10권 27장 중에서 -
하느님의 신성은 저절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죄의 허물이 벗겨지면 벗겨져야만 하느님의 빛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내면의 침묵 속으로 가라앉을수록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형제의 마음 속에도 하느님 영광의 씨앗이 계십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 역시 성령의 씨앗을 기르는 고귀한 밭이기에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금식은 바로 마음의 때를 벗기고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금식은 바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신성한 씨앗이 싹틀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 내면을 밝게 비추어주신다면 내 안에 계신 하느님도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다시 어둠에 헤매이는 사람의 앞길을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며 부활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 형제 안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소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현실도 볼 수 있는 섬세한 마음을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의 변모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있습니까?
2. 주님의 변모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짊어져야 하는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고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이 되었습니까?
3. 내 몸 안에 계신 하느님 영광의 빛을 비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4. 하느님 영광의 빛을 가리고 있는 불쌍한 형제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의 나눔
1. 이번 사순절에는 금식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마음 깊이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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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매주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매합니다. 주로 신간을 먼저 보면서 관심 많은 분야의 책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런데 ‘치매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볼 수 있습니다. 휘프 바이선이라는 네덜란드 최고의 임상 심리학자가 자그마치 30년 동안 연구한 끝에 내놓은 치매 안내서와 같은 책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2021년에 주님 곁으로 가신 제 아버지가 말년에 치매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평생 공부하셨던 아버지였지만 몇 차례의 큰 수술로 처음에는 섬망 증세가 오더니 결국 저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에 걸리셨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알던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당시 저의 말과 행동이 오히려 아버지에게 큰 혼란을 주었겠구나 싶었습니다.
치매 환자를 대할 때 중요한 소통 규칙, 치매 환자에게 편안한 환경 만들어 주기, 치매 환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할 수 있는 말 등등…. 저 자신이 얼마나 이 부분에 무지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와 다름에 원망했고, 치매가 정말로 못된 병이라는 생각만 했었습니다. 치매 걸린 아버지가 저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어보니 저의 모름이 아버지를 더 힘들게 했었음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똑똑한 척하는 우리이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리입니다. 상대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도 자기 기준에 맞춰서만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판단이 또 다른 아픔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또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이 제일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 모습이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정말로 하느님이셨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고,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체험이 있었습니다. 피정하면서 계속 이 피정의 집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고, 그 행복 속에 계속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들은 생각은 주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한곳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마지막 말씀이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을 볼 때, 머무는 삶이 아닌 계속 움직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도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 말이 틀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지요.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머무는 삶이 아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쓰디쓴 시련으로 보이는 것들이 때로 변장한 축복일 수 있다(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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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면 오시는 두 분: 모세와 엘리야
-전삼용신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은 존 뉴턴이라는 성공회 신부가 노예선 선장을 하며 노예들에게서 들은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존 뉴턴은 1725년 영국 런던에서 가톨릭 신자인 아버지와 성공회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여 늘 어린 뉴톤을 무릎에 누이고 성경을 읽어주고 찬송을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뉴톤의 나이 일곱 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뉴톤은 열한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노예 무역선 선원이 됩니다. 그 당시 가축 이하의 대우를 받던 노예의 삶을 당연하게 여긴 존 뉴턴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청년이 된 뉴톤이 노예선 선장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싣고 대서양 해를 지나 런던으로 돌아오던 중 엄청난 폭풍을 만납니다. 폭풍우는 열 하루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물을 퍼내며 사투 하던 새벽 1시, 배가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도록 성난 폭풍 속에서 너무나 지쳐 기둥을 붙잡고 있던 뉴턴은 지난 날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들었던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잠언 1,23-33절이었습니다.
“내 훈계를 들으러 돌아오너라. 그러면 너희에게 내 영을 부어 주어 내 말을 알아듣게 해 주리라. 내가 불렀건만 너희는 들으려 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건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기에…. 파멸이 너희에게 폭풍처럼 닥치고 불운이 너희에게 태풍처럼 들이치며 곤경과 재앙이 너희 위로 닥칠 때 나는 그렇게 하리라….”
그는 오랜만에 간절한 기도란 걸 하게 됩니다. 그는 이날을 제2의 탄생일로 삼고 1775년 선장직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그의 나이 39세 때 성공회 사제가 되어 43년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변모하실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장면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성령을 나타냅니다.
성령은 두 형태로 오시는데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가르침이고 엘리야는 사랑의 불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새로 태어나게 할 때 가르침과 보호를 주는데 이것을 진리와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위에서 존 뉴턴이 떠올린 잠언의 구절 “내 훈계를 들으러 돌아오너라. 그러면 너희에게 내 영을 부어 주어 내 말을 알아듣게 해 주리라”에서 훈계가 진리이고 영이 은총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전했습니다. 진리를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은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신 것은 기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에서 은총과 진리가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은총과 진리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마치 존 뉴턴이 어머니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늦게나마 새로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라고 하신 것은 당신처럼 기도하는 것이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지만, 그것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당신만이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선교할 때 정글에서 한 아버지와 아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의 아빠가 급한 목소리로 “얘야, 얼른 땅에 바짝 엎드려라!”, “자, 이제 내게로 빨리 기어 와라!” 하고 시켰습니다. 아이는 시키는 대로 하였습니다. 아이와 선교사는 나무 위엔 길이가 5m나 되는 무서운 독사가 매달려 있는 것을 봅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새로 태어났고 선교사도 은총과 진리를 받아 변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여 얻는 은총과 진리로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일, 이것만이 우리 부활을 약속합니다.
야곱은 야뽁 강에서 하느님과 씨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이기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엉덩이뼈가 다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창세 32,23-33 참조). 덕분에 자신과 가족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비록 나의 죽음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진리와 은총으로 내 가족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부활을 약속하는 삶입니다. 광야에서 뱀을 장대에 다는 법을 배우는 사순은 곧 기도를 배우는 시간이고 이것을 배워야 나도 살고 내 가족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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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교포사목으로 오시는 신부님들은 한국어는 물론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면 좋습니다. 언어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는 마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교포사목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언어의 문제가 본질은 아닙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사제를 모시기 위해서 한국까지 갔었던 신부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몇 개 교구를 다니면서 사제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능력은 있지만 겸손한 사제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결국 한국에서 사제를 모시는 것은 포기하였고, 미국에서 사제를 양성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합니다. 잠시 머물다 왔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섬기는 사제, 겸손한 사제를 못 만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 자신을 돌아보면 저 역시도 섬김을 받는 삶에 더욱 익숙했습니다. 복음적인 삶, 겸손한 삶 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소금처럼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녹이면서 맛을 내는 사제들이 많았다면 사제를 모시러 갔던 신부님은 기뻐하며 돌아왔을 것 같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의 교구장님의 본당 사목방문을 보았습니다. 본당에는 영어미사, 스페인어 미사, 한국어 미사가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3개 공동체의 미사를 모두 집전하였습니다. 미사는 오전 9시, 10시 30분, 12시에 있었습니다. 영어와 스페인어는 주교님께서 잘 하시기 때문에 주례를 하였지만 한국어 미사는 제가 주례를 하였습니다. 사목방문 하시는 주교님의 열정에 놀랐습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교중미사만 주례를 하시는데 주교님은 모든 주일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주교님의 소탈함과 겸손함에 놀랐습니다. 미사가방도 직접 들고 왔습니다. 제의도 본인이 직접 입었습니다. 한국어는 못 하시니 제게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영어로 미사경본을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한국 공동체의 미사니 한국어로 하라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 미사에 함께 하셨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주교님은 한국어 미사에 함께 하면서 소통하려고 하였습니다. 미사 후에 교우들과 사진도 같이 찍고, 몸이 아픈 사람에게 안수를 해 주었습니다. 격식과 절차를 넘어서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사제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은 주로 ‘본당’입니다. 봉사자들이 있고, 사제관도 있고,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큰 어려움 없이 사제로 지낼 수 있습니다. 둥지를 벗어나야 새는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본당 사목에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목의 현장으로 떠나는 신부님들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 아마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 아이티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음식과 문화와 풍토가 다른 곳입니다. 열병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고, 납치의 위험을 겪기도 하고, 외로움에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비록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하지는 않지만 신부님들은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아픈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일지라도 섬기는 삶을 산다면, 겸손한 삶을 산다면 그곳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평과 불만의 삶을 산다면 그 어떤 곳도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섬김과 겸손의 문제입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늘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함께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천막을 3개 만들어서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이 있어야 빛이 나는 것입니다. 강을 버리는 물만이 바다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꽃을 버리는 나무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섬김과 겸손의 삶을 산다면 지금 이곳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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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단 가운데 핵심급이라고 할수 있는 제자 세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정상에 도달한 제자들은 잠시후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스승님의 얼굴과 분위기가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 거룩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움의 시작일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전설로만 여겨왔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장차 이루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핵심 제자들에게 살짝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만 살짝 천국 문을 열어 보여준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황홀경에 도취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과 더불어, 이 좋은 곳에서 저 위대하신 인물들과 함께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아귀다툼의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오 복음 17장 4절)
베드로의 제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해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놀라서 반쯤 얼이 빠진 제자들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서들 일어나거라.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황홀한 산 위 풍경을 뒤로한 채, 다시금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수난을 향한 여행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리석은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어찌 그리도 우리들의 생각과 흡사한지 놀랄 지경입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부족한 존재입니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너무나 게으르고, 잠시 편안하기만 하면 그냥 그곳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직 멀고도 멉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 십자가와 원수로 살게 될 것 입니다.(김승훈 신부,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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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사순시기에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이며, 어디로 가는 ‘길’인지를 밝혀줍니다.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습니다.”(창세 12,4)
그 길은 비록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길이지만,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 놓은 ‘주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길’에 우리의 동참을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2티모 1,8)
그런데 사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길’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2티모 9-10)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에게서 환히 드러난 영광된 변모를 보여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 본래의 신적 초월성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가는 이 ‘사순의 길’이 어디로 향하여 가는 ‘길’인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마태 16,21-28)를 하신 다음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가올 수난으로 닥쳐올 절망과 위기를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면서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니 이 ‘수난의 길’은 동시에 생명과 부활의 빛나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그러기에 내적 기쁨으로 차오르는 ‘은총의 길’이 됩니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는 박노해 님의 시가 떠오릅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
그리움을 좋아한다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너에게 사무치는 걸 좋아한다
기다림이 지켜간다
그리움이 걸어간다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그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내 사랑은
그리움이 가득하여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기다림이 걸어간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으로 ‘변모의 길’을 걸어갑니다.
‘길’이 되는 그리움으로 ‘부활의 길’, ‘영광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이 ‘길을 가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름 속에서 들려주신 가르침입니다.
곧 신약의 ‘쉐마’입니다.
‘들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 17,5)
하느님께서는 직접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확인시켜주시면서, 그를 ‘따르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곧 그를 따라 ‘변모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분과 함께 변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말씀 아래 머물러 있는가?
그리고 들은 말씀으로 인하여 변모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곧 나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됩니다.’(에페 21-22 참조).
그러면, 우리는 변모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오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변모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마태 17,7)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7,7)
그리고 ‘의연히 변모의 길을 가라!’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 17,5)
주님!
말씀 아래에 머물게 하소서.
말씀께 제 자신을 건네 드리게 하소서.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제 자신을 허용하게 하소서.
말씀이 제 안에서 성취도록 승복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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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의 재료는 말씀입니다」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신앙의 삶이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손을 잡아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하고 죄를 짓더라도 “인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토마스 아퀴나스).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삶의 쇄신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간은 베드로가 짓고자 하였던 초막을 지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 그분과의 일치를 나누는 곳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 내려오셔서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산에 머물러 모세가 사십 주야를 그 산에서 지냈습니다(출애24,15-18.). 그리고 십계판을 받은 곳(신명5,22)도 산입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12제자를 부르신 장소도 산입니다 (루카6,12).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에 올라야 합니다. 등산하라는 말씀입니까?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곳, 고독한 장소를 찾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을 떠나 때때로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체조배를 한다든지, 성지순례를 한다든지 고요한 시간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십니까? 끝맺음에 기도하십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묵주기도 하지 말고 별도의 시간을 만들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투리 시간에 기도하려 하지 말고 온전히 바치는 시간을 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초월적 존재로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데 모세는 하느님의 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을 참된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예언자입니다. 두 예언자의 공통점은 하느님의 백성을 올바른 길로,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은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예수님도 바로 그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결국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줍니다. 다시 말해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준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느라 무기력해질 모습, 십자가형 앞에 우리 인간과 똑같이 두려워할 모습 앞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당당하고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링컨).고 합니다. 사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의 얼굴은 독살스런 모습으로 변합니다.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은 살기가 도는 얼굴로, 절망감이 가득 찬 사람은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슬픔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만큼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한 것처럼 나의 얼굴도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좀 더 거룩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명함은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하안주 신부님께서는 시를 쓰셨는데 ‘임쓰신 가시관’ 이라고 있습니다.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고 하셨습니다(노래 한번 할까요?) 우리도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서 베드로는 놀라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9,33). 하고 말하였습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초막을 지어서라도 함께 머물고 싶어 하였는데 초막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초막을 짓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바로 ‘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마태17,8).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초막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사는 곳에 지어지는 것입니다. 초막의 재료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제발, 말 좀 들어라!”했을 때 말 듣는 것이 귀로 듣는 것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부모의 뜻대로 하였을 때 비로소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동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거기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영성체하며 기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정신을 살아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말씀 익히기 자료를 나눠 드렸는데 풀어보신 분도 있고, 그렇지 않으신 분도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체조배를 하며 아침저녁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이 되도록 성경 한 줄도 안 읽고 기도를 소홀히 하신 분도 계십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평일 미사참례를 더 자주 하시고, 성경도 더 자주 읽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문제의 해답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듯이 이제 우리의 모습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머물고 싶었던 곳, 그곳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39,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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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이영근신부-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마태 16,21)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이고, 사실상 하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만
알아듣고서 기가 꺾여 있었던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힘을
주시려고 당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 뒤에 누리시게 될 영광을 미리 목격했고,
나중에 자신들이 누리게 될 하늘나라의 행복을 미리 체험했습니다.
그 일은, 십자가는 영광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며, 목적지가 아니라
중간 경유지라는 것, 진짜 목적지는 승리, 부활, 영광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시청각 교육입니다.
‘모습’이 변하셨다는 말 때문에
‘겉모습’이 바뀐 것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겉모습’을 바꾸신 일이
아니라, 당신의 본성, 또는 본질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예수님의 옷이 빛처럼
하얘졌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인데,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영광’을 묘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의 우리 인생은 지나가는 경유지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집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목적지가 분명한 여행입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제자들이 체험한 그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3-4)”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구약시대의 대표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대화의 내용보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상황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또는 이대로 영원히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행복하고 황홀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마태 17,5-6).”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말을 중간에 끊으셨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하늘나라의 행복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당신의 외아드님이시고, 당신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하느님의 공식 선언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의 ‘그의 말’은,
앞의 16장 24절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십자가를 건너뛰고 영광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하느님의 나타나심 자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경외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마태 17,7-9).”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는 “그들을 어루만지시며”입니다.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사랑의 손길’입니다.)
“일어나라.”는 “이제 산에서 내려가자.”이고,
“두려워하지 마라”는 “놀라지 마라.”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헛것을 보았다가 정신을 차렸다는 뜻이 아니라,
황홀경에서 벗어나서 현실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지금 본 것을 당신의 부활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온전히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은
부활 신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체험을 했으면서도
예수님 수난 때에 왜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는가?”
제자들은 특별한 체험을 했지만, 그 체험이 아직 ‘온 삶으로’ 믿는
믿음으로 발전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수난 때에는 그랬지만,
예수님 부활 후에는 온 삶으로 믿는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과 힘과 용기를 주신 것은
당신의 수난 때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제자들 자신들이 박해와 순교를 받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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