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2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3. 3. 2. 05:39

2023년 3월 2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오 7,7-12)

Do to others whatever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에스테르 왕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구하는 기도를 바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각각 차 사고를 연출한 장면을 보여주기 전에, “차가 부딪쳤다.”라고 설명해주고 보여준 그룹과 “차가 박살 났다.”라고 설명하고 보여준 그룹의 기억 차이를 비교한 것입니다.

그 결과 ‘차가 박살 났다.’라는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그 장면에서 ‘차의 유리 파편이 튄 모습이 있었다.’라고 기억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보여준 사고 장면에는 그런 모습이 없었습니다. ‘박살 났다.’라는 강한 표현의 단어를 들은 것만으로도 사고가 크게 났다는 느낌이 마음에 남았고, 그로 인해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을 돌이킬 때 유리 파편이 날리는 모습까지 같이 떠올린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은 거짓 기억 또는 잘못된 기억이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기억만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억이란 결코 바뀔 수 없는 명확한 기록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때로는 거짓 기억, 잘못된 기억에 의해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경우도 너무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어쩌면 우리의 거짓 기억, 잘못된 기억에 따른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는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가득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멈추지 말고 바라는 것을 청하고, 포기하지 말고 얻을 것을 찾을 것이며, 망설이지 말고 하느님을 향한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따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고 하십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곡된 사랑이 아닌 진실한 사랑을, 나의 욕심을 채우는 사랑이 아닌 이웃의 만족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을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기억과 거짓 기억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남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자신보다 나아질 것을 목표로 삼으라(달라이 라마).

​당신께 누군가가 청하면 정말 다 들어주시느냐고 묻는다면?

-전삼용신부-

https://youtu.be/aOdpeYxMba0

 

우리가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청을 다 들어주실까요? 대부분 선뜻, ‘예!’라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들어주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다 믿으시는 것은 들어주시고 그렇지 않은 것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가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청을 들어주시고, 그렇지 않고의 조건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느닷없이 나오는 이 말씀에는 조건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는 ‘이웃 사랑’을 뜻합니다. 역시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계명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이 여호수아서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다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을 차지하여 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들을 사방으로부터 평온하게 해 주셨다. 모든 원수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대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주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던 것이다. 이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하신 그 모든 좋은 말씀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여호 21,43-45)

 

하느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땅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법이 지켜지는 나라입니다. 에덴 동산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지켜져야 했던 것은 주님께 선악과를 봉헌하고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었습니다. 이 계명이 십계명에 그대로 나타나고 주님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뜻을 지키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도 하느님 나라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들어지지 않는 이유는 아직 우리가 순종 하지 않아 하느님 나라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소리가 그분께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간증 중에 중요한 두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선 동안 교회의 신도 수가 늘어나자 91년도에 50억 정도의 예산을 잡아 새 교회를 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한 것입니다.

“50억은 큰 돈입니다. 우리가 50억 교회를 지으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5억짜리 개척 교회를 짓고 50억짜리 교회를 지으면 쉬울 것입니다.”

십일조를 생각한 것입니다. 신도들이 다 동의했다고 합니다. 그때 성전 건축을 위해 6억 정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선 개척 교회를 먼저 짓고 자신들의 교회는 나중에 짓자며 6억으로 개척 교회를 하나 내 주었습니다. 일산 동안 교회입니다. 그 교회도 나중에 크게 성장하여 김해에 20억짜리 개척 교회를 세워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일산 동안 교회를 짓는 동안 재정이 네 배가 늘어 아주 쉽게 100억짜리 건물을 짓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두 배 큰 예배당을 두 배 쉽게 지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청이 들어지는 순서입니다.

 

이분은 이웃 사랑에 대한 간증도 있습니다. 높은 뜻 숭의 교회를 할 때 대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다 나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를 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탈북자들을 위한 공장과 사업을 위해, 곧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200억을 모아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성전을 지으면 됐습니다. 하지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것으로 탈북자들이 일할 일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고는 교회를 네 개로 분리하여 각자가 새로운 자리에서 새 교회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 교회는 지금도 매우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 목사님의 예를 들어서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분의 정신은 참으로 오늘 복음에 맞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그분의 나라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분은 에덴 동산에 계십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선악과를 바쳐야 합니다.

십일조를 바칩시다. 그리고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런 상태에서 구하는 것은 반드시 다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다만 구할 때 그 목소리가 주님께 들릴 수 있는 곳에는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통공, 겨레와의 통공

-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ZX8Bd2n2qxs

 

​-조재형신부-

과학자들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챗봇’을 개발하였습니다. 챗봇은 고객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고객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추천하기도 합니다. 인공지능 스피커는 날씨를 알려주기도 하고, 원하는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전화를 걸어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발전하는 챗봇은 우리사회 전반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온라인 상점은 챗봇을 고객 서비스 에이전트로 사용하여 제품 정보를 제공하고 맞춤화된 제품 추천을 제공하며 주문 및 반품 요청을 처리합니다. 은행과 신용조합은 챗봇을 지능형 에이전트로 활용하여 고객의 질문에 답변하고, 계좌 잔고 및 명세서를 제공하여 기본 트랜잭션을 처리하면서 저축 및 투자에 대한 조언을 제공합니다. 병원과 클리닉은 챗봇을 활용하여 예약, 의약품 정보 제공, 환자와 가장 가까운 병원을 찾도록 지원하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챗봇을 통해 학생 피드백, 교사 평가, 관리 업무를 지원합니다. 보험업계에서 챗봇을 가상 에이전트 및 어드바이저로 활용하여 청구서 제출, 상태 업데이트 제공, 기타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할 수 있으므로 직원들이 보다 전문적인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습니다. 제조업체는 챗봇을 통해 공급업체 관리 및 소통, 작업자 지원, 작업장 유지관리, 제품 리콜, 인사 업무 등을 처리합니다. 항공사와 요식업계는 챗봇을 활용하여 고객의 발권, 온라인 체크인, 기타 여행 관련 사항을 지원하는 대화형 에이전트로 사용합니다. 항공사와 요식업계는 챗봇을 활용하여 고객의 발권, 온라인 체크인, 기타 여행 관련 사항을 지원하는 대화형 에이전트로 사용합니다. 저는 주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거나, 주소를 알려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챗봇은 ‘만물박사, 척척박사’와 같이 우리 주변에 이미 가까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챗봇의 사용에도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 기원은 로봇의 3대원칙과 비슷할 것입니다. “첫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둘째,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인간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한 로봇이 인간을 통제하거나,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도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나의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동산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가질 수 있다. 너희는 이 동산에서 마음껏 지낼 수 있다. 다만 ‘생명의 나무’는 건드리지 마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르려야 할 것들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재물과 장수를 청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재물과 장수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들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부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그야말로 사면초가, 사방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 쌓여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어 힘겨워 하시는 몇 명 형제님들과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마음이 너무 착해서, 약삭빠르지 못해서 갖은 괴로움을 홀로 떠안고 가는 순박한 형제들의 눈망울 앞에 뭐라 할 말이 없더군요. 그저 힘들 내시라고, 언젠가 이 시련의 끝이 있을 것이라고, 기도하겠노라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했습니다.

 

겨우 오늘 복음 말씀에 다시 한번 희망을 걸고, 더 간절히, 더 열렬히 기도해보자고 초대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7장 7~8절)

 

여러 가지 이유로 사면초가에 몰린 분들, ‘더 이상 갈 곳이 없구나.’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부디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온 몸을 바쳐, 목숨을 걸고 한번 기도해보십시오.

 

나 혼자만의 기도로 부족할 것 같으면 ‘기도부대’를 동원하십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어려워하지 마시고 기도를 부탁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틈만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늘 외치십니다. “부디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기도로만 끝내서는 안됩니다. 실생활 안으로 들어오면 최선을 다해 현실에 맞부딪쳐보십시오. 반드시 은총의 하느님께서는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좌절과 고통의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무엇을 청할까, 무엇을 찾을까, 무엇 때문에 두드릴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 지향,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스런 모습이기도 하지요. 우선 ‘나’의 만사형통, 내 가족의 안녕, 우리 가문의 번성, 우리 고장의 발전이 이루어져야만, 이웃 봉사도 가능하고, 보다 나은 세상 건설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의 기도 지향이 너무나 극단적 이기주의로 치닫기에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기도라기보다 강요입니다. 하느님을 깎아내리는 행위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을 떠보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기도도 아닌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기도지향은 어떠해야 할까요? 무엇을 청할까요? 무엇을 찾을까요? 무엇을 위해 두드릴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의 비극이 없는, 더 이상의 무자비한 폭력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더 이상 굶주리지 않는, 더 이상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육에 매몰된 세상이 아니라 영으로 무장되었기에 건강하고 건전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께서 그 자리에서 즉시 들어주실 제대로 된 청원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께서 산 제물로 기쁘게 받으실 가장 바람직한 기도입니다.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

-이영근신부-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마태 7,7)

주님께서는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이요, 나아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네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라고 하십니다.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께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듯이 우리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들으며,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마태 7,7)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우리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