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 3월 1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3. 3. 1. 06:07

 

2023 3월 1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이 세대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루카 11,29-32)

 

No sign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Jona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나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각각 차 사고를 연출한 장면을 보여주기 전에, “차가 부딪쳤다.”라고 설명해주고 보여준 그룹과 “차가 박살 났다.”라고 설명하고 보여준 그룹의 기억 차이를 비교한 것입니다.

그 결과 ‘차가 박살 났다.’라는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그 장면에서 ‘차의 유리 파편이 튄 모습이 있었다.’라고 기억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보여준 사고 장면에는 그런 모습이 없었습니다. ‘박살 났다.’라는 강한 표현의 단어를 들은 것만으로도 사고가 크게 났다는 느낌이 마음에 남았고, 그로 인해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을 돌이킬 때 유리 파편이 날리는 모습까지 같이 떠올린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은 거짓 기억 또는 잘못된 기억이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기억만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억이란 결코 바뀔 수 없는 명확한 기록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때로는 거짓 기억, 잘못된 기억에 의해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경우도 너무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어쩌면 우리의 거짓 기억, 잘못된 기억에 따른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는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가득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멈추지 말고 바라는 것을 청하고, 포기하지 말고 얻을 것을 찾을 것이며, 망설이지 말고 하느님을 향한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따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고 하십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곡된 사랑이 아닌 진실한 사랑을, 나의 욕심을 채우는 사랑이 아닌 이웃의 만족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을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기억과 거짓 기억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남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자신보다 나아질 것을 목표로 삼으라(달라이 라마).

​예배의 3요소와 그 순서의 중요성

-전삼용신부-

https://youtu.be/qOF9nOTTH4Q

슈퍼맨이 될 수 있음에도 슈퍼맨이 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소년의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더 보이’(2019)입니다. 한 아이가 어떻게 좋은 부모 밑에서 사악해지는지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는 미국 중부의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버트가 12세 생일을 맞이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버트는 어릴 적부터 가족의 노력과 사랑을 받아 건강하게 자란 아이입니다. 그러나 생일을 맞이한 이후부터 갑자기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면서 그의 성격과 행동이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부모보다 엄청난 능력을 지닌 자신이 부모의 아들일 리 없다고 의심하게 됩니다.

 

아이는 자꾸 자신이 부모의 자녀가 아니라 우주에서 날아온 슈퍼맨과 같은 존재라고 믿어갑니다. 그리고 점점 더 부모의 말보다는 자신이 타고 왔다고 믿어지는 우주선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바로 지구를 차지하라는 목소리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점점 자신의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부모는 걱정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랑합니다. 그럴수록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에 악영향을 미칠 그를 제거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의 힘은 너무 세졌습니다. 영화의 결말에서는 버트는 부모의 대항을 뚫고 이웃 마을로 가게 되는데, 그 마을에서 버트는 더 많은 인간들을 공격하고 마을을 파괴합니다. 마지막에 버트의 아버지는 그를 정지하고자 하는데 실패하고, 버트는 아버지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한 어머니를 살해하고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아이가 사춘기 때 빗나가게 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처음엔 부모가 자신의 출처일 수 없다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아이는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부모가 아이의 영혼까지 넣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인정하지 않게 되자 아이는 더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을 부모라 믿게 할 수 있는 음식과 희생 또한 무의미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3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봉헌-말씀-성체’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아이는 먼저 부모를 자기 창조자로 고백해야 합니다. 성막으로 치자면 뜰에서 이것이 이루어집니다. 제물을 봉헌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피조물로 인정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것이 성막의 성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곳에서 봉헌되는 빵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는 아이는 부모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 순서를 어긴다면 부모를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언가 배우겠다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말씀 다음이 성체입니다. 성체는 표징입니다. 하느님께 배우려 하지 않으며 믿음만 요구하는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부모 앞에서 잔소리 말고 밥이나 차리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배의 순서를 어기는 세대가 악한 세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거치지 않고 표징만을 원하는 이들을 악하다고 하십니다. 이들을 심판할 이들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찾아온 남방 여왕과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드릴 때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합니다. 말씀의 전례가 바로 설교입니다. 그리고 성찬의 전례는 표징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를 위한 지혜를 주고 성찬의 전례는 믿음을 줍니다.

 

요한 복음에서 첫 표징은 카나의 혼인잔치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을 본 제자들은 믿었다고 합니다. 이 믿음은 말씀만으로는 불가능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신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성체 이전에 말씀의 전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전례 이전에 봉헌이 있습니다.

 

요즘은 누가 봐도 봉헌과 말씀이 약해졌습니다. 봉헌을 통해 하느님이 주님임을 인정하지 않고 강론이 길면 빨리 성체만 영하고 집으로 가고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배의 순서를 어기는 게 악한 것입니다. 부모를 인정하는 봉헌이 없으면 말씀이 약해지고 말씀이 약해지면 부모의 가르침은 거부하면서 밥만 먹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표징인 성체 성사도 소용없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의 순서를 잘 지켜서 악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렇게 회개하여라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P1QTwR61y8c

 

​-조재형신부-

초등학교 다닐 때입니다. 학교에서는 가끔 ‘환경미화 운동’을 하였습니다. 교실에서 환경미화는 당연히 교실 뒤편에 있는 ‘게시판’의 정리입니다. 게시판에 그림을 붙이기도 하고, 예쁜 글씨로 제목을 붙이기도 하고, 각종 도표를 만들어서 붙였습니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은 초를 가지고 닦았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환경미화는 주로 교실 청소였습니다. 들과 산은 굳이 미화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식목일이면 나무를 심기는 했지만 개울에서는 물장구를 치고 놀 수 있었고, 산에는 도토리, 밤이 있었습니다. 동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당연히 수돗물을 마셨습니다. 등산객들이 그리 많지도 않았지만 산에서 밥을 해먹고, 고기를 구워먹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산에서의 식사는 극히 제한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물은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수돗물을 마시는 가정도 거의 없습니다. 봉이 김 선달이 대동강물을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불과 한 세대 사이에 우리의 자연환경은 많이 변하였습니다. 우리가 오염시킨 강과 바다 그리고 공기는 이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워버린 석유와 석탄은 ‘기후변화, 지구온난화’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쌓아올린 문명이라는 탑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우리가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가 계속 자연을 파괴하면 그래서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자연은 우리가 예측하기 힘든 방법으로 되갚아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는 인간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표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꿀벌의 개체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 생태계에 큰 영향을 주는 현상입니다. 꿀벌에 의지해서 번식하는 식물의 감소를 가져오고, 그런 식물을 먹고 번식하는 초식동물의 감소를 가져오고, 생태계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기록적인 한파, 극심한 가뭄, 녹아내리는 빙하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표징입니다.

 

한 소녀가 더 이상 우리의 지구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위기는 너무 심각해서 인류가 실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문명의 종말을 초래할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집에 불이 난 것처럼 행동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불이 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위기로 취급된 적이 없는 즉각적인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고 있지만, 우리 지도자들은 모두 어린애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한 거액의 돈을 벌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미래는 팔려 나갔습니다. 하늘처럼 무한하고 한번 뿐인 이 세상이라는 말을 여러분이 할 때마다 우리의 미래는 도난당했습니다. 어른들은 우리에게 미래는 기대할 만한 것이라고 말했잖습니까? 여러분들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헛된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레타 툰베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변화를 일으키기에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절제와 극기’를 이야기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순시기 동안 금주와 금연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순시기 동안 성경 필사를 하기도 합니다. 2023년 사순시기에는 우리의 지구를 위해서,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는 절제와 극기의 삶을 실천하면 어떨까요? “저희가 절제하고 극기하며 선행을 실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항일운동, 또 다른 31운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또다시 31절입니다. 혹독하고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하루하루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이 땅의 백성들에게 이건 정말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그 누구로부터 지배되지 말아야 할 자주 독립 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날입니다.

 

은혜롭게도 저희 공동체 지척 거리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독립운동가의 생가가 있어 자주 들르는 편입니다. 33인 대표이며, 31운동의 효력이 미미해지자 제2의 31운동까지 기획한 옥파 이종일 선생님(1858-1925)이십니다.

 

이분은 1894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한 이후 전국 각지의 7개 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898년에는 한국최초의 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31운동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직접 독립선언문을 인쇄를 주도하고 낭독했습니다. 또한 당시는 물론 지금도 어마어마한 양인 자주독립선언문 3만 5천부를 인쇄해 배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연히 일제 총독부의 눈에 그는 존재 자체로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31운동을 주도한 죄목으로 이종일 선생님은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은 후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 정도 고생했으면 심신도 완전히 망가졌겠다, 만사 제쳐놓고 휴양이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이종일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어찌 내 한 몸만 걱정하겠냐며 또다시 독립운동을 기획합니다.

 

31운동 3주년인 1922년 3월 1일에 맞춰 주도면밀하게 행사를 준비하고 유인물을 인쇄하여 준비를 마쳤으나 누군가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한평생을 한결같이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던 이종일 선생님의 황혼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 못지않게 무척이나 서글픕니다.

 

정처 없이 그리고 기약 없이 떠돌던 그의 육신은 1925년 8월 31일 꿈에 그리던 고향 태안이 아니라, 물설고낯선 땅, 경성 종로 평동 으슥한 뒷골목 거적 대기 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영양실조였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거저 이룩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종일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여 큰 물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대한독립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항일운동, 제2의 31운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마태오복음에 비추어 보면,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앞 장면에서 그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1,16 참조).

사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달려왔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지역에서는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지혜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요나의 표징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고 외치는 회개의 때가 왔다는 표징이며, 동시에 그가 바다에 빠져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의 표징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표징을 볼 줄 아는 눈, 곧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일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활동이요 현존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루카 11,29)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먼저 베푸신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아멘.

「마음을 열어라」

-반영억신부-

누구나 소망을 지니고 그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여한이 없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루고 나면 언제 그랬는가 싶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한번 깨우침을 얻었다든지 소망을 이루었으면 그 감사함을 오래도록 지켜야 하는데 마음 같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릅니다.” 한결같은 마음을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기적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하고 말씀하시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는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표징을 보여줘도 마음을 닫아건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입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 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들이지 않고 딴 곳에만 마음을 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군중이 그랬습니다. 참된 신앙과 회개에는 무관심한 채 표징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하여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당신의 권능을 일깨워 주심으로써 새 삶으로 인도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에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육체적인 치유와 기적이 최고였습니다. 솔로몬을 능가하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귀한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그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표징을 일으킬 수가 없으셨습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미사참례를 하여 성체를 모시면서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가르치신 삶을 살기를 다짐하기보다는 이상한 현상이나 신비로운 표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이 표징 중의 표징이요, 기적중의 기적이지만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두를 주시지만 우리는 그저 밀떡 하나 받아먹는 것으로 만족하니 주님의 역사하심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준비하지 않은 나를 보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요구하기에 급급해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더 큰 것을 바라기에 앞서 지금 내가 주님 앞에 서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기적은 내가 지금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많은 실수와 잘못, 허물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이기는 자비에 힘입어 이렇게 살아있음이 사랑이신 주님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쫓기보다 내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영성체로 모실 수 있음을 기뻐하며 우리도 주님처럼 이웃을 위한 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빵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요나의 표징』

-송영진신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여기서 ‘이 세대’는,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구원의 길’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모든 시대의 ‘안 믿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안 믿는 사람들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는 분이고,

성경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는, 즉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구원의 반대쪽으로만 가기 때문에 ‘악한 세대’입니다.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겉으로는 표징을 보여 주면 믿겠다는

태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안 믿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태도입니다.

그들은 표징이 없어서 예수님을 못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했기 때문에

표징을 보여 주어도 표징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따로 보여 줄 표징은 없습니다.

(안 믿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표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표징도 보여 주지 않고서

무조건 당신을 믿으라고 윽박지르신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충분히 표징을 보여 주셨고,

그래서 그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빵의 기적’ 후에,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 듣기가 거북하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버렸을 때(요한 6,66),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똑같이 체험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똑같이 들었으면서도, 왜 누구는 안 믿고 떠나버리고,

누구는 믿고 예수님 곁에 남아 있었을까?

그것은 이해력의 차이가 아니라 ‘희망’의 차이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만 희망한 사람은 예수님을 떠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희망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 남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만 바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만

끝까지 남아 있게 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랠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이 말은, 예수님을 안 믿고 있던 제자들이

기적 덕분에 비로소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보고

자신들의 믿음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제자들만 본 것은 아닙니다.

일꾼들이 현장에서 직접 보았습니다.

과방장과 신랑은 기적은 못 보았지만 ‘기적의 술’을 맛보았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제자들의 믿음에 대해서만 말한 것은,

일꾼들과 과방장과 신랑은 예수님을 안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제자들은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바라보았는데,

일꾼들과 과방장과 신랑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 포도주만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빵의 기적’에서도,

예수님을 보지 않고 빵만 본 사람들은 떠나버렸고,

빵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본 제자들은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가 살아난 일을(요나 2,1.11) 가리키는 말이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말입니다.

그래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은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이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대한 표징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고 바탕입니다.

그렇지만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못 믿는 것인지,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것인지...>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어떤 물적 증거 같은 것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도들의 증언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자신들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두 순교했다는 사실이 증거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표징’이라는 말은 표지판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멸망하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 서 있는 도로 표지판.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을, 요나의 멸망 선포를 듣고서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일을(요나 3,5-10)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할 일은 표징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 회개하는 일이다.”, 또는 “표징만 요구하지 말고

회개부터 하여라.” 라는 뜻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