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2월 26일 사순 제1주일

Margaret K 2023. 2. 26. 06:22

2023년 2월 26일 사순 제1주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오 4,1-1)

 

Jesus said to him,

“Get away, Satan!

It is written:

The Lord, your God, shall you worship

and him alone shall you ser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나의 말과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며,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 능숙한 모든 일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이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 버벅거렸고, 실수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반복과 연습을 통해 능숙하게 또 ‘잘한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걷는 아이가 있을까요? 말은 어떻습니까? 또 글 쓰는 것 역시 처음부터 잘할 수 없습니다. 원래 잘했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은 펜을 잡는 손을 바꿔서 써보십시오. 아마 글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앞으로 걷지 말고, 뒤로 걸어보십시오. 평상시에는 너무나 쉬웠던 걷기가 뒤로 걸을 때는 그렇게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반복과 연습을 통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깨닫는다면, 포기와 좌절이 얼마나 잘못된 감정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왜 나는 운이 없을까? 왜 나는 잘하지 못할까?’ 등의 말은 모두 반복과 연습의 부족에서 나오는 말일 뿐입니다.

수천 번 수만 번의 실수 끝에 지금의 내가 된 것입니다. 수천수만 번 넘어진 뒤에 지금 잘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수천수만 번 글씨를 적다 보니 능숙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포기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는데, 커서는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좌절할까요? 바로 남과의 비교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는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입니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하면서 비교 대상이 보입니다. 그들보다 늦은 ‘나’를 바라보며, 자기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합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남과 비교하면서 하지 못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성장시키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반복과 연습이라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단식한 뒤였습니다. 배고픔과 피곤함이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태에서 악마는 유혹합니다. 첫 번째 유혹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 즉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보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혹은 악마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시겠다는 유혹이었지요.

이 모든 유혹은 오로지 성경 말씀으로만 이겨내십니다. 그 어떤 것과 비교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에만 집중하니 그 유혹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준비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광야에서의 사십일의 시간, 어쩌면 우리 삶 안에서 체험하는 반복과 연습의 시간이 아닐까요?

하느님 말씀에 집중하면서, 늘 그 뜻에 맞춰 살 수 있는 반복과 연습의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멋지게 악마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불행은 그 사람의 위대함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파스칼).

​유혹을 이기는 법: 말씀의 검을 갈아놓으라

-전삼용신부-

https://youtu.be/3y7Mkf6q7QQ

 

인터넷에서 어떤 가톨릭 신자의 이런 근심 거리를 읽게 되었습니다. 한 젊은 여자가 누군가를 도와주러 지방에 가게 됐는데 일이 끝나고 주인 사모가 사례를 못해서 미안하다며 다른 분에게 무당 집 복 비를 건네주며 그 자매를 꼭 데려가서 점을 보게 해주라고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식사하러 가는가 했더니 무당 집이었습니다. 자매는 기분 좋게 하루 휴무를 풀로 도와주고는 기분 완전히 잡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집안 모든 식구가 성당을 다니고 자신은 여유가 없어서 계속 못 갔는데 최근 들어 어떻게든 다녀야겠다고 맘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당이 자매에게 “신내림을 받아서 무당 할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무당은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그 자매의 앞날에 재수 없는 일들이 많을 것이라 겁을 주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무시하고 절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무당이 되어야지 안 그러고 성당이나 교회를 가면 반드시 병신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권태기인데 그 사람과도 끝장이 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분명 무시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 충고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은 ‘기도’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한 자매가 무당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안 되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몸도 아프고 가족이 큰 재난을 당하게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요즘 누가 무당이 되고 싶겠느냐며, 그러나 자신은 어쩔 수 없다며 무당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탄은 말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하느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십니다. 다시 말해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말싸움에 졌기 때문이고 유혹을 이기는 이유는 그 말을 이길 엄청난 힘의 말씀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이길 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은 따 먹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말을 흐렸습니다. 말씀에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단호하게 끊을 수 있는 힘이 말에 더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유혹의 달콤한 말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힘, 곧 성령을 말씀에 더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 어떤 말보다도 믿을만하고 진리라는 확신을 주어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다른 말을 이기게 합니다. 만약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을 이겨낼 수 없게 됩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의 간단한 줄거리입니다. 닉은 엄청난 부자인 친구인 탐에게 초대 받아 함께 머물게 됩니다. 탐의 아내 데이지는 개츠비의 옛 연인이었습니다. 개츠비는 가난했지만, 주류 밀수로 큰 돈을 벌어 빼앗겼던 연인을 찾기 위해 데이지의 집 앞에 커다란 저택을 구입하고 매일 데이지가 오기를 기다리며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순진하기만 한 개츠비는 데이지를 만나고 그녀의 사랑을 얻습니다. 탐도 자기 아내의 불륜을 조금씩 눈치챕니다. 그러다 데이지가 탐의 내연녀를 차로 치는 사고를 냅니다.

 

순진한 개츠비는 이것을 자신이 다 뒤집어씁니다. 그러자 데이지는 개츠비를 버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빠져나가 다시 탐에게 가려고 합니다. 이를 눈치챈 닉은 개츠비를 위해 데이지를 그만 믿으라고 말합니다. 평생 데이지의 사랑만을 믿으며 살아온 개츠비는 데이지의 실수로 죽은 아내의 남편에게 총을 맞아 사망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데이지의 이름을 부릅니다.

 

개츠비는 정말 위대한 사랑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닉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사랑만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데이지는 개츠비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개츠비는 닉보다 데이지를 더 사랑했습니다. 개츠비가 살 수 있는 길은 닉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닉과 시간을 보내며 그를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이것이 기도와 같습니다.

 

저도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유혹이 끼여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결혼해서 자녀를 많이 낳아 사제도 만들고 수녀도 만들면 더 주님께 나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 말이 저에게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에서 기도할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널 원한다!”

 

이 말씀이 얼마나 강력하던지 더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원하시는 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전에는 그 말씀에 힘이 없었습니다. 마치 천사의 말을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말씀이 인간이 되게 하셨듯이, 기도를 거친 말을 말씀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 묵상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 무기가 많을수록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유혹을 이길 한 마디의 말씀이 없어서 우리가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광야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광야에서 말씀의 무기를 가져 모든 유혹을 물리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처럼 나도 누군가를 위한 사람이 되고 그만큼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zSMYhUVQVUk

 

​-조재형신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되었던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강력한 힘으로 전 세계를 떨게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도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의욕적으로 준비했던 홍보와 강의는 저의 원의와는 상관없이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교회도 문을 닫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비 오는 날 저녁 바티칸 광장에서 홀로 기도하였습니다. 물질 만능주의에 푹 빠져서 하느님을 멀리했던 우리들의 삶을 반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저의 모친도 2020년 9월 10일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한국에 가지 못하고, 뉴욕에 머물면서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With Corona'라는 말을 할 정도로 코로나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었고, 치료약도 나왔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에 한 번씩은 걸렸기에 면역력도 생겼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초창기에 한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대처했습니다. '드라이브 스루우(Drive Through)'라는 신속하고 안전한 검사를 개발했습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자발적으로 코로나 확진지역으로 찾아가서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한국은 ‘검사(Test), 추적(Trace), 치료(Treat)'라는 방식으로 코로나의 확산을 막아내는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인류는 이전에도 많은 ’역병‘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지나치게 바쁘고 분주했다는 것도 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오염되었던 대기가 깨끗해 졌습니다.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자연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다시 오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설사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혹은 무증상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유혹은 달콤한 과일처럼 찾아오기도 하고, 유혹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찾아오기도 합니다. 마치 나방이 불 속으로 날아들 듯이 우리는 유혹이라는 강렬한 불 속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인류에게 첫 번째로 찾아왔던 유혹을 전해 줍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과 같아 질 것이라는 교만은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웃의 공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박수칠 때 떠날 줄을 모릅니다. 교만한 사람은 차별과 편견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의 위험성을 잘 아셨기에 언제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발을 씻어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40일 동안 단식하셨던 예수님께 찾아온 3가지 유혹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 놓은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유혹은 너무도 달콤하기에 우리는 스스로 그 유혹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위선에 대한 유혹입니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잉태하기 마련입니다. 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했던 카인은 하느님께서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가식도 비난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완장을 차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교만, 재물, 위선, 권력’에 대한 유혹을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우리도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갑시다!

-양승국신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으로 가득 차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거칠고 황량한 유다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사순절을 시작한 우리도, 스승 예수님을 따라 깊고, 황량한 광야,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고, 춥고 배고픈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번 사순절, 광야로 들어갈 때는, 다른 해처럼 준비 없이 들어가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에 이끌려,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들 생애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사순절이 많은 경우 실패로 끝난 이유는, 주님 없이, 성령 없이, 내 힘만 믿고, 나 홀로 광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이라는 것,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한낮에는 피할 곳도 변변치 않은데, 엄청난 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합니다. 밤이 되면 기온은 또 얼마나 내려가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백 퍼센트 인간 조건을 그대로 지니셨던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허기와 갈증은 또 얼마나 극심했을까요? 어쩌면 그분께서는 언젠가 겪게 될 골고타 언덕에서의 극심한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광야에서 미리 맛보셨던 것입니다.

 

올해도 우리의 광야인 이번 사순시기, 여느 해처럼 갖은 고통과 시련, 세찬 모래바람과 극한 체험으로 가득하겠지만, 성령과 함께라면 큰 문제 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여행길에 밀착 동반하신다면, 광야 생활 결코 외롭거나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맞이한 사순시기 우리 앞에 펼쳐질 광야는 어디일까요? 나와 너무나도 다른 그, 정말이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용납이 안 되는 그가 득실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광야입니다. 평생토록 혼신의 힘을 다해 한번 벗어나 보려고 그토록 발버둥쳐 봤지만, 그 지독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복되는 내 악습과 결함이 광야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갖은 유혹 거리로 가득 찬 내 부끄럽고 참혹한 매일의 일상이 광야입니다. 바로 그 광야에서 주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새출발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에는 악마로부터의 유혹도 많겠지만,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맙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이영근신부-

사순 첫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유혹입니다.

제1독서는 에덴동산에서의 유혹이요, 복음은 광야에서의 유혹입니다.

그리고 제2독서는 아담이 유혹에 걸려 넘어진 결과와 예수님이 유혹을 이기신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대전환을 가져온 거대한 두 사건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이 모든 것이 풍요로운 낙원에서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유혹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로 생명을 받게 되었던 사건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된 사건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합니다.

세례 때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하느님의 영은 이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최초로 하신 일은 바로 광야에서 기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곳이요, 오롯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호세 2,16-18).

또 불모의 황폐한 사막이요 유혹받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야곱을 아껴주신 곳이요(신명 32,10),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펴주고 인도하신 곳이요(신명 2,7;8,15; 느헤 9,18-19), 시험의 장소이기도 하지만(신명 8,2),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요(1열왕 19,4), 사랑을 알게 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예레 2,2-3).

 

또한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귀와 승냥이들이 우글거리는 하느님의 부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천사가 시중드는 곳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우리 삶을 뒤흔드는 위협에 맞서, 하느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자리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이 세상이요,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마침내 허기지셨던 예수님은 쇄약해지셨고,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태에 처했습니다.

가장 허약한 순간을 노려 악마의 끈질긴 유혹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피하시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돌파하십니다.

아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유혹은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사막에서 받은 유혹을 상기시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은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유혹받으시나 승리하시는 예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새로운 모세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물질적 유혹입니다.

빵에 대한 유혹이요, 필요와 효용성, 소유와 능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육신을 살리는 물질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벽에서 뛰어 내려라. 그리고 천사들이 손으로 받들어 다치지 않게 하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정신적 유혹입니다.

영예에 대한 유혹이요, 과시와 인기, 교만과 허영, 영웅주의에 대한 유혹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임을 증명해보라는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 4,7)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허영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그분의 뜻 이루어지기를 바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이 세상 왕국을 모두 당신에게 주겠소.”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영적, 신앙적 유혹입니다.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지배와 권위, 존경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상을 믿고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이로서 그분만을 섬기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혹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체 악마는 무엇을 노리고 다가왔던 것일까요?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루어야 할 사명을 방해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이토록 광야에서의 유혹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삶을 제시해줍니다.

곧 이 사건은 우리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신비로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술이나 기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유혹을 이기시고, 사랑으로 사명의 길을 가셨으며, 아버지의 뜻에 희망을 두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이 헌신에 힘입어, 결코 그 누구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자 누구입니까?

환란입니까? 궁핍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 힘입어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주권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5-38)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태 4,4)

 

주님!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고, 소유하기보다 소유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