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2월 22일 재의 수요일

Margaret K 2023. 2. 22. 06:10

2023년 2월 22일 재의 수요일

재 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 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은 단식과 금육을 함께 지킨다.

☆☆☆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오 6,1-6.16-18)

 

"Take care not to perform righteous deeds

in order that people may see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당신이 만드신 것을 하나도 미워하지 않으시며,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죄를 덮어 주시고 용서하시니, 주님, 당신은 저희 하느님이십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제 막 걸음마를 걷기 시작한 영아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2,368걸음으로 701미터를 걷고, 1시간에 17번 넘어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몇 번이나 넘어져야 제대로 걷게 될까요? 한 천 번은 넘어졌다가 일어나야 이제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잘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성인이야 걷는 것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생각하지만, 영아에게는 어떨까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일을 반복하는 과정을 거쳤기에 점점 넘어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또 잘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걷는 것을 넘어서 뛰어다니게 됩니다.

우리 삶도 이 영아의 걸음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부터 잘 걷고, 잘 뛰는 영아가 없는 것처럼, 실패 없는 안정된 삶이란 소위 성공의 삶만을 살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욕심이 아닐까요?

영아는 그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좌절이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지금 성인인 사람 모두 이렇게 좌절이나 절망하지 않았던 영아의 시절을 지나갔음을 떠올린다면, 좌절이나 절망하지 않는 DNA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실패의 순간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늘 도와주시기에 그분 안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실패를 경험하곤 합니다. 처음에 주님과의 만남에서 얻었던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 어느 순간 아무런 감정이 없게 됩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도 됩니다. 주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도 생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뒤로 미룹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여유가 생기면, 할 것 없으면, 복잡한 일이 없어지면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도 실패 없이는 제대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하려는 사람만이 신앙생활의 큰 진전을 이루게 됩니다.

교회가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고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지요. 사순 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기쁜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는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수난과 죽음의 길을 우리도 따라가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물론 주님처럼 실제로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시련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절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을 봐야 하는 것처럼 우리 삶 너머에 있는 희망의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사순시기를 통해,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의 진척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불안과 공포는 반응이고, 용기는 결정이다(윈스턴 처칠).

기도, 자선, 단식이 위선이 되지 않게 하려면

-전삼용신부-

https://youtu.be/_-NE3LFY_x8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는 게 중요하다 할 수 있겠지만, 성경은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라고 하고 죽으려고 해야 살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내가 죽는 방식이 ‘자선-기도-단식’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이려 하지는 말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를 죽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살리려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목적으로 사순을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머문다는 말은 그의 뜻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려면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아무리 기도-자선-단식을 해도 위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불러내시는 이유는 나를 죽이는 것이 사랑과 영원한 생명, 곧 행복의 길이기에 나를 미워하는 삶을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영화 ‘어톤먼트’의 줄거리입니다. 1935년 영국, 부유한 집안 출신인 13살 브라이오니 탤리스는 침실 창문 밖을 통해서 언니 세실리아와 가정부의 아들 로비 터너를 염탐합니다. 브라이오니는 언니와 로비의 관계를 질투합니다. 로비가 농담으로 쓴 편지를 보며 브라이오니는 로비를 점점 성 도착증 환자라고 의심을 해갑니다.

그러다 브라이오니의 사촌 로라가 강간 당하고 어떤 남자가 도망치는 것을 봅니다. 로라와 브라이오니는 그녀를 폭행한 걸 로비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들의 증언, 세실리아에게 쓴 노골적인 쪽지를 근거로 그는 체포됩니다. 감옥에 있던 로비는 4년 후 제2차 세계 대전에 강제 참전하게 됩니다.

 

어느덧 성인이 된 브라이오니는 확실함 없이 로비를 범죄자로 몰고 간 걸 후회하고 속죄의 삶을 살기로 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 출판하고 언니에게 찾아가 사죄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이 자신의 거짓 증언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영화는 로비가 누명을 벗고 세실리아와 로비가 재결합하고 같이 가려고 했던 바닷가에서 행복하게 재회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납니다. 그러나 브라이오니가 나이가 들어 밝힌 사실은 조금 다릅니다. 사실 그녀는 세실리아와 로비를 찾아가고 사과하지 못했습니다. 세실리아와 로비는 재결합하지 않았고 로비는 덩케르크에서 패혈증으로 사망했고 세실리아는 몇 달 후 블리츠에서 폭탄 테러로 사망했습니다.

 

브라이오니는 소설에서 두 사람에게 현실에서 자신이 빼앗은 행복을 돌려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그저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이 자전적 소설로 성공한 작가로 평생을 산 브라이오니의 표정에서는 언니와 로비에게 전혀 미안해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속죄’인데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으로 언니와 로비에게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믿습니다.

 

내가 살면 누구를 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자선-단식을 하는 우리의 자세도 마찬가집니다. 유다인들은 기도-자선-단식의 광야 생활을 하면서도 결국 그것을 자랑으로 내세웠습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자기를 죽여야만 사랑이 가능하기에 그것을 연습하는 시간이 광야의 사순인데, 그들은 그것 자체에만 의미를 두었습니다. 마치 영화에서 자기에게 재물과 명성을 많이 벌어준 책을 써 놓고 언니와 로비에게 할 책임을 다했다고 말하는 브라이오니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자기를 왜 죽여야 하고, 자기 목숨을 왜 미워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지내는 사순절은 그래서 위선이 됩니다.

 

나의 생명을 미워할 때에야 이웃의 생명을 소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의 죽음 없이는 이웃에게 피해만 끼칠 뿐입니다. 올해의 사순은 기도-자선-단식으로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는 기쁨을 장착하는 훈련의 사순절이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다시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hZ_wlteFJWM

 

​-조재형신부-

50이 넘은 분들 중에서 탤런트 김혜자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분을 ‘전원일기’에서 조용한 내조로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정숙한 아내요 엄마의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사랑의 머길래!’에서는 보수적인 남편에 순종하지만 자신의 딸은 자유롭게 살도록 도와주는 현명한 엄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엄마의 바다’에서는 갑자기 다가온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며 가정을 지키는 강인한 엄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화보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의 소개를 보면서 아프리카의 굶주린 어린이를 돌보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탤런트 김혜자 선생님은 “나는 직업을 탤런트라고 쓰는 사람을 보면 너무 이상해요. 연기는 그냥 나예요”라고 말하였습니다. 탤런트를 직업이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합니다. 연기는 그냥 숨 쉬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라고 합니다. 주인공이 아니면 작품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에서 교만함이 아니라, 자신의 일(mission)에 대한 자부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역할이 곧 자신이라는 열정으로 61년을 연기자로 살아왔습니다.

 

저도 뉴욕에서 지내면서 몇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의 일,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일, 퀸즈성당의 일, 동북부 엠이 대표 사제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기회를 주셨으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일을 핑계로 지금 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비겁한 행동입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한다고 자랑한다면 교만한 행동입니다. 신문을 만들 때면 매의 눈으로 교정을 보고, 직원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주면 됩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면 미리 고백성사를 주고, 강론 준비를 성실히 하면 됩니다. 동북부 엠이와 함께 할 때면 미리 일정을 잡고 계획된 일이 차질 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됩니다. 제게 주어진 일(mission)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기쁘게 지내면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주시고, 축복을 주심을 믿습니다. 촉매가 있으면 더 큰 에너지를 얻는 것을 봅니다. 제가 함께 하는 성당의 교우들이 신문사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동북부 엠이에서는 행사가 있을 때 신문사에 광고를 주고 있습니다. 신문사에 필요한 기사를 보내 주기도 합니다. 군림하는 주인공이 아닌, 봉사하는 주인공이라면 언제든지 응답해야 합니다.

 

교회는 오늘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은혜로운 회개의 때를 시작하면서 신앙인들은 사순시기의 주인공이 되면 좋겠습니다. 대림과 성탄 그리고 연중의 신앙생활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순시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4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사십일 동안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4가지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자선’입니다. 나의 능력과 재능을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누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진 재물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면 좋겠습니다.

둘째는 ‘봉사’입니다. 손이 두 개 있는 것은 하나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발이 두 개 있는 것도 하나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 성체조배, 성경읽기, 십자가의 길, 피정은 사순시기를 풍요롭게 하는 보물창고입니다.

넷째는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셨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절제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는 것이 진정한 단식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갑자기 죽음을 맞지 않게 하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소서.”

​겸손→성찰→회개→자신의 비참함 인식→이웃 사랑의 실천!

-양승국신부-

 

또다시 재의 수요일이 돌아왔습니다. 사제는 교우들의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외칠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다시 맞이한 사순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어떤 분에게 회개 좀 하라고 했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회개할 거리가 없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회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 자신의 힘과 능력만 믿는 사람,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회개는 겸손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겸손의 덕을 지닌 사람에게 성찰의 능력을 선물로 주십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성찰이라고는 단1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 많습니다. 반대로 틈만 나면 자신을 성찰하고, 공동체의 현실을 성찰하고, 부조리하면서도 고통스런 현실을 성찰하고, 다양한 사건 사고를 성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찰하게 될 때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참한 존재인지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없이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잘 압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잘 알고 있기에, 자연스레 그의 시선은 자신보다 더 비참한 동료 인간의 현실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그의 고통, 그의 상처에 깊은 연민과 측은지심을 느끼게 되고, 자연스레 도움의 손길, 즉 자선을 펼치게 됩니다.

 

겸손→성찰→회개→자신의 비참함 인식→이웃 사랑의 실천, 바로 이 사순시기 우리 내면에 이루어져야 할 영적 여정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이영근신부-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를 ‘회개’로 초대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요엘 2,13)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 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신앙의 빛>에서는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첫째는 ‘회개’가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회개’가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수도승들은 ‘제2서원’으로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적인 회개는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응답으로 지속됩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적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의 요청이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소명의 삶을 불러옵니다.

결국 회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올바르게 유지하는 견인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 받고자 했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의로움은 단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진실된 마음을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이 당신 사랑에 씻기어지고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의로움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 마음이 기도로 순결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고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부활의 기쁨을 희망하며」

-반영억신부-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이라는 말은 40일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중대한 사건을 두고 그를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재를 지켰고, 엘리야도 호렙산에 갈 때 천사가 주는 음식만 먹으며 40일을 걸었으며,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전 40일 동안 단식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인 부활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기간을 정하여 기도와 희생으로 재를 지키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몸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기쁨이 큰 만큼 거기에 걸맞은 부활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자선과 기도, 단식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자선할 때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하라.” 단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모르게 할 때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며, 좋은 평판을 받기를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힘을 길러 그런 것에, 민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적인 힘이 있으면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입니다. 그냥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단식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순간부터 배고픈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돕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내가 허기져봐야 굶주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듯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해 줍니다(구엔 반 투안 ).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사실 기도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살려면 호흡하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왜 호흡을 해야 합니까? 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자선은 단식과 기도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또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리면 열매는 천국에서 넘치도록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함이 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은 서로를 보완해 줍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재의 수요일을 맞으면서 기도하고 단식을 지켰는 데 그 희생을 누구를 위해 봉헌하려고 하셨나요? 아침을 굶고 나니 배가 고파요. 그래서 점심을 평소보다 더 많이 잡수셨어요. 그렇게 한다면 알맹이가 빠진 것이지요. 평소에는 굶어도 굶었다는 생각도 없이 지나치는데 사순절이 되면 유난히 배가 고파 옵니다. 마음먹고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유혹의 빌미는 항상 있습니다.

기도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해요.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빠서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베풀면 베풀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쉽고 아까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기뻐하게 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한꺼번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시는 분은 평생 아무 일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에 자주 듣는 말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죄를 뉘우치는 것입니다. 죄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하느님께로 다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외적인 기도와 단식, 자선에 앞서 마음의 단식과 자선, 그리고 기도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은혜로운 때, 구원의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순 시기』

-송영진신부-

사순 시기는 부활절을 잘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어서 할 필요가 없는 말 같지만,

사순 시기의 의미만 생각하다가 부활절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으니,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만 바라보다가 부활을 잊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십자가 수난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순 시기는 부활절이 있기 때문에 중요한 시기입니다.

부활절이 없으면 사순 시기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순 시기 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그 일에 참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에 동참할 생각이 없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할 이유가 없습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우리 인생 전체가

하느님 나라에서 부활하려고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순 시기입니다.

바로 그 목적과 목적지를 잊어버리면, 또는 믿지 않으면,

인생은 그냥 허무한 방랑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재의 수요일’에 거행하는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은

인생의 진짜 목적과 목적지를 잊지 말라고 거행하는 예식입니다.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인생을 살지 말라는 뜻으로

재를 머리에 얹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사람인데,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이 아니라, 그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완전히 도착할 때까지는 방심하면 안 됩니다.

자만하고 방심하면, 배반자 유다처럼 중간에 탈락할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위선자가 되려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진실한 신앙인이 되려고 결심하고,

또 그렇게 노력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만 의식하게 되는 일이 자꾸 생깁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데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게 되고, 신경 쓰게 되고,

그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사실 칭찬을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일이고,

기쁜 일이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칭찬’은 함정이 숨어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 칭찬 때문에 교만해지고,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아마도 마귀는 처음에는 ‘칭찬부터’ 하면서 접근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말부터 해서 경계심을 없애고,

그다음에 유혹하는 말을 할 것입니다.

“너는 지금 아주 잘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도 너를 보면서

기뻐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잘하려면, 그리고 끝까지 가려면,

힘을 좀 아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힘을 전부 다 쏟아 부으면, 언젠가는 힘이 빠지고, 지치고,

결국 끝까지 가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끝까지 잘하려면 좀 쉬엄쉬엄 해라.”

“바오로 사도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선교활동을 열심히 하는가?

그동안 충분히, 많이 했으니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은가?”

이런 말들이 바로 ‘칭찬 같은 유혹’입니다.

마귀는 그런 식으로 유혹할 텐데, 실제로 우리가 자주 듣는 말입니다.

말하는 사람 자신은, 자기 말이 유혹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유혹하는 마귀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만,

듣는 사람 쪽에서는 아주 위험한 함정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못 보는 것도 보시고,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아시는 분”

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인간은 하느님께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느님은 인간들을 감시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감시자’가 아니라 ‘보호자’ 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어떤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을 할 때,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조심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인데,

하느님이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보호에 응답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취해서 우쭐해지면,

마음이 풀려서 위선자가 되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려면,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감시하고,

내가 나 자신에게 브레이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