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2월 25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Margaret K 2023. 2. 25. 06:12

2023년 2월 25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가 5,27-32)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to repentance but sinner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어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는 외국어를 잘 못합니다. 솔직히 언어에 재주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매일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노력 부족이었습니다. 그래도 한국말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더군요.

책을 읽다가 ‘홍소를 터뜨렸다’는 문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홍소’. ‘소’자야 웃음 소(笑)일 것 같은데, ‘홍’자는 한자로 무엇일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넓을 홍(弘)일까요? 아니면 붉을 홍(紅)일까요? 그래서 사전을 보니 홍소(哄笑)에서 ‘홍’은 ‘떠들썩할 홍’이었습니다. 매우 크게 웃거나 떠들썩하게 웃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가 제 형제들과 함께 전주 한옥마을에 간적이 있습니다. 이때 묵은 한옥팬션 이름이 ‘서로’였습니다. 짝을 이루거나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인 ‘서로’라고 생각했는데, 한자로 ‘서로(徐路)’라고 쓰며 천천히 걷는 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외국어를 잘 못해도 우리말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우리말도 한참 부족했습니다. 이 역시 노력 부족입니다. 지레짐작으로 알 것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득 주님께 나아가는 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그 길은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그분을 알려고 온 힘을 기울일 때, 그 간격은 좁아질 것입니다. 혹시 그 좁아짐에 기뻐서 주님도 또 자기 자신도 ‘홍소’를 터뜨리지 않을까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당시에 세리의 직분은 ‘매국노’라는 소리를 듣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니 세리는 더 돈 욕심을 세웠고, 정의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리도 부르십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손길에 달려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죄인들 모두가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 당신의 사명임을 밝히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스스로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하느님의 일에 스스로 개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가 없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이해되지 않는다며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기뻐서 ‘홍소’를 터뜨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모습에 주님께서도 ‘홍소’를 터뜨리실 것입니다.

스스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다(성 아우구스티노).

​회개한 사람 주위엔 잔치가 벌어진다

-전삼용신부-

https://youtu.be/VzXAy6t1SEg

 

영화 ‘패터슨’(2016)은 미국 뉴저지의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이라는 이름의 버스 운전수의 일주일 간의 일상을 그린 영화입니다. 패터슨은 버스 운전을 하며 일상의 작은 것들로 자기만의 비밀 노트에 시를 쓰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시리얼로 아침을 대신하고 출근합니다. 버스에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의 말들과 일상의 작은 변화들로 미소를 짓습니다. 돌아와서는 강아지와 산책하고 긴장을 풀기 위해 바에서 한 잔 마시기도 합니다. 이때 패터슨은 바 주인이 물어보는 말에 대답도 하고 실연 당한 남자와 옆자리에서 술을 마셔주기도 합니다. 아내가 비싼 기타를 사겠다고 하는 것도 잘 참아냅니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지만 슬프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패터슨이 쓴 시를 출판해보자가 제안합니다.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그러자고 합니다. 둘이 함께 영화를 보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강아지에 의해 시가 담긴 노트가 산산조각 난 것을 발견합니다. 패터슨은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강아지가 밉습니다. 실연남을 길거리에서 다시 만났는데 위로해 줄 힘이 없습니다. 강아지 없이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아 혼자 신세 한탄을 합니다. 이때 어떤 동양인이 와서 노트 한 권을 줍니다. 새로운 노트에 시를 써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이 다시 시작됩니다.

 

패터슨에게 시를 쓰는 노트는 모든 일상을 감사로운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이것 저것을 말씀드리면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이 됩니다. 그러면 일상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자신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돈을 벌려고 해서는 안 되듯이 패터슨은 시를 쓰는 것을 돈벌이로 여기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상을 감사가 아닌 돈을 버는 목적이 되게 합니다. 시선이 바뀌고 모든 것이 불만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도 위로할 수 없고 짜증만 납니다. 다시 자기만의 시를 쓸 수 있는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이것을 회개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라는 세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는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릅니다. 레위는 이것이 고마워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러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잔치에 참석하였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것에 분개합니다. 그리고 따집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를 짓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레위와 같은 세리와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고마워 잔치를 베풉니다. 내어 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 내어 놓을 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덕분에 다른 이들도 그 잔치에 참여합니다.

 

한 죄인이 회개하면 이렇듯 가진 것을 내어 놓기 때문에 잔치가 벌어집니다. 회개한 죄인 주위에는 그래서 즐거움이 넘치고 하느님 나라가 형성됩니다. 회개는 다시 일상의 고마움을 찾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자로서 모든 일이 감사한 것이 되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회개한 사람은 자신도 행복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잔치가 됩니다.

 

큰 가시 물고기의 사랑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빠 물고기가 새끼들이 부화할 때까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지키고 산소를 공급하다가 결국엔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은 아빠의 살로 잔치를 벌입니다.

회개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 엄마들은 자신들이 아빠 엄마가 되면서 자신들의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자신들도 자녀들에게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살과 피를 통해 잔치를 벌입니다. 즐겁게 웃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즐거우라고 그리스도께서도 회개하시어 당신 살과 피를 내어 놓으십니다.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에 따라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 잔치가 말씀과 성체의 미사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위에는 잔치가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면 나는 회개한 사람입니다.

​나의 거룩한 날을 짓밟지 말라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XMu4XGUjCWA

 

​-조재형신부-

동창 신부님들 중에 ‘도시빈민사목’을 하는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5년도 힘든데 어느덧 10년을 넘기고 20년째 하는 신부님들입니다. 봉천동, 삼양동, 금호동, 장위동에 건물을 얻어서 지내고 있습니다. 건물은 사제관이며, 미사를 봉헌하는 성당이며, 친교를 나누는 사랑방이며, 업무를 보는 사무실입니다. 주방을 맡아 주는 직원도 없고, 사무실을 맡아 보는 직원도 없습니다. 모든 업무는 신부님이 도맡아 합니다. 신부님들은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거리미사를 집전하였고, 세월호 참사의 현장에서도 거리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이태원 참사의 현장에서도 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가을의 낙엽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이 신부님들은 그렇게 힘들고, 외로운 곳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동창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출소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대출해주는 은행도 만들었습니다. 남들은 모두 꽃길을 원하는데 굳이 가시밭길을 찾아다니는 동창 신부님들입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있어서 자랑스러우면서도 낮은 곳을 찾아가지 못하는 저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중남미 과테말라에서 10년째 선교사로 사목하는 후배 신부님이 있습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현지인들과 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신부님이 사목하는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생들이 현장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과테말라 현지에서 지내면서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사제가 되면 선교사가 되겠다는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지만 굳이 먼 타국에서 선교사로 지내는 후배 신부님을 보면 자랑스럽습니다. 기름진 밭에서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시밭길에서도, 돌밭에서도 땀 흘려 1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아이티에서 10년 넘게 선교사로 지내는 신부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보내 주는 글을 읽으면 하루하루가 북새통입니다. 납치의 위험도 겪어야 했고, 총을 든 강도도 만났었고, 온 몸이 썩어가는 환자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지내고 있는 신부님이 진정한 사목자라는 생각입니다.

 

소록도에서 50년을 수도자로 지내던 수녀님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평생 한센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수녀님들은 이제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봉사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어느 날 편지 한 장 남기고 수녀님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선우경식 선생님은 요셉의원을 설립하셔서 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인술을 베풀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도 선생님들 도와서 요셉의원에서 3년간 봉사하였습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한센인들의 ‘틀니’를 만들어 주신 강대건 선생님도 있습니다. 그동안 진료한 한센인들이 만 오천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독고 노인들에게 명절 때면 떡을 드리던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신 형제님입니다. 저는 그 선행을 면장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목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행의 빛을 비추는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제도와 화려한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의로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벗이 되어주었던 사목자와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3년 사순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밝은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이 나도 종교를 가지면 천주교를 선택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계급과 신분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무시는 예수님

-양승국신부-

 

언젠가 지방 출장 강의를 갔다가, 동네 사우나를 갔었는데, 카운터에 앉아 계시는 자매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협회 회원입니까?” “협회요? 저는 그런 사람 아닌데요.” “아, 네 잘 알겠습니다. 6천 원이고, 저리로 들어가세요.”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는데, 저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협회라는 게 아마도 조직원들의 협회였던가 봅니다. 여기저기 등을 밀고 있는 사람들의 넓은 등짝에는 멋진 용 문신, 호랑이 문신이 가득 새겨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저는 대충대충 샤워만 하고 초스피드로 빠져나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데, 예수님 시대 세리들은 오늘날 ‘그들’과 비슷했습니다.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자릿세 받고, 고리대금업에 손도 대고, 과도한 이자 부과로 사람들 괴롭히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말단 세리가 아니라 중간 보스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형님’에게 거금을 상납해서 일정 담당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담당구역을 돌며 마음껏 부를 축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들의 악명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백성들을 그들을 두고 공공연하게 ‘도둑’이라고 칭했습니다.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으로 첫손가락을 꼽았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들들 볶아대던지 ‘세리가 다가오면 집들이 공포에 떤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더구나 유다 민족들은 징수된 세금이 식민지 지배자 로마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리들을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로 칭했으며 재판에 증인으로 서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이런 세리의 두목인 레위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그야말로 ‘깜놀’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어떻게 저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가, 하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예수님,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인선이었습니다. 갈 때 까지 간 세리, 공공연한 도둑, 매국노 레위에게 당신 구원 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으로 큰 위안을 받습니다.

 

더 놀랄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를 위한 송별식이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조폭들의 파티였습니다. 그 잔치에는 당대 내놓으라는 지하 세계 인생들은 다 모였습니다.

 

참으로 부담스런 자리, 너무나 껄끄러운 자리가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으십니다. 완벽하게 그들과 동화되십니다. 한 가족이 되시고, ‘절친’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말구유 탄생 때 보여주신 그 지극한 겸손이 예수님 생애 내내 계속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광경입니다.

 

계급과 신분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무시는 예수님, 격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신 예수님,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멋져 보이는 장면입니다.

<"나를 따르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하지만,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인 까닭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우리 역시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의인을 자처하는 죄인」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 하시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셨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실패인 듯이 보일 수 있으나 믿음은 희망을 이루어 줍니다.

 

성 안또니오 아빠스는 어느 주일 성당에 들어갔을 때 우연히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10,21).는 말씀을 듣고, 이 말씀대로 자신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준 다음 수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도 매일 매일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들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십니다”(교부 사르마타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 는 성경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해야 하겠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고해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으니 기뻐하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