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2월 27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3. 2. 27. 06:25

 

2023년 2월 27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31-46)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se least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거룩하시니 주님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당신께 해 드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갑곶성지에 있을 때가 생각납니다. 강화도에 있는 갑곶성지의 아침은 상쾌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맑은 공기뿐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새소리는 저의 기분을 최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성지 건물 안으로 새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이 새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나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서 창문에 계속 부딪혔습니다. 그러면서 들리는 소리는 자연 속에서 듣는 청아한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넓은 창공에서 훨훨 날아야 하는 새가 어떻게 보면 좁다고 할 수 있는 건물 안에 있으니, 초조하고 불안한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유원지의 연못을 보면 그 안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크고 아름다운 잉어들을 보곤 합니다. 그 모습이 정말로 멋져 보입니다. 그런데 이 잉어가 여러분의 침대 위에서 펄떡이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때도 잉어가 멋져 보일까요? 아닙니다. 흉하게 보이고,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라면서 불안하고 초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만 아름답고 멋져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자리는 어떤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나를 아름답고 멋지게 보일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 혹시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죄가 가득한 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또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자리 역시 그렇게 아름답고 멋져 보이지 않습니다. 이 역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주님께서 보시니 좋게 만든 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계속해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런 자리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 장면을 말씀해주십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각 사람의 잘잘못에 따라 그들을 갈라놓으실 것이라고 하시지요. 양을 의로운 사람으로, 염소를 죄인으로 표현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양은 아무도 해치지 않고 온유하며 누구에게 해를 입어도 저항하지 않고 견디는 인내를 가지고 있고, 염소는 변덕, 자만심, 호전성 같은 악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최후의 심판에서 당신 오른쪽에 세워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양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양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온유와 인내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불운은 분별력과 집중력을 키우는 스승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고상하게, 혹은 강하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장 암울할 때 창조와 기회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H.엘리스).

​내 주위 카인과 아벨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전삼용신부-

https://youtu.be/GbBahXTZN8E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심판을 이기는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 이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웃 사랑을 하라는 것인데, 여기서 신중하게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그리스도를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가장 큰 착각 중 하나가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십니다. 인간은 본성 상 피조물이기 때문에 먼저 생존에 대해 걱정합니다. 내가 생존하려면 다른 이의 생명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떤 아이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먼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부모에 의해 생존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선이라고 할 것도 없이 결국엔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준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형제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생존을 위해 형제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영화 ‘글레디에이터’는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브리타니아에서 전쟁 중 사망하면서 시작됩니다. 사실 아우렐리우스는 망나니 아들들보다 피 한 방울, 혈통 하나 없는 당시 최고의 장군인 막시무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질투한 아우렐리우스의 막내아들 코모두스는 갈등 합니다.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막시무스와 그의 가족을 죽이려 합니다. 코모두스는 황제가 되고 겨우 살아남은막시무스는 가족을 잃었지만, 결국 유명한 검투사가 되어 코모두스에게 복수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왜 카인은 아벨을 죽였을까요?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생존에 대한 걱정이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지만 그 안에 감사가 섞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사랑이 적어지니 당연히 형제에 대한 사랑도 줄어듭니다. 그렇게 형제를 살해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모두가 생존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나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하느님을 믿고 사랑해야만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도 사실은 그 부모를 주신 하느님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십계명을 지키고 그러면 부모를 공경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카인과 같은 부류가 확실합니다. 카인은 사실 아벨을 살해하기 위해 먼저 하느님을 저버린 인물의 대명사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거룩함과 의로움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1B2_EdWYaz8

 

-조재형신부-

가톨릭평화 신문 2월 12일 가사에서 3가지 소식을 보았습니다. 1면에는 암 환자들을 위해서 20억 원을 기부한 김성주 씨의 이야기입니다. 김성주 씨는 가족들을 설득해 동생 김계숙 씨의 유산을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마뗄암재단’에 기부하였습니다. 김성주 씨도 매년 2억 원씩 5년간 더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유산 때문에 가족들이 불화를 겪고 재판까지 가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김성주 씨 가족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유산을 봉헌하였습니다. 6면에는 교황님이 ‘민주콩고와 남수단’을 방문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황님은 민주콩고에서는 내전의 상처를 딛고 서로 용서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남수단에서는 난민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령의 교황께서 몸이 불편함에도 기꺼이 아프리카를 방문한 것은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7면은 매주 소개되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입니다. 홀로 가족들을 돌보며 열심히 살았던 어머니의 사연이 소개 되었습니다. 이 어머니의 안타까운 소식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어머니의 건강과 가족을 위해서 정성을 나눌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해 보이고, 성공과 명예가 주어질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이지만 그 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해 보이고, 힘들고 외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며,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셈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산 사람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병들고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 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 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이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고통받는 이들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다시금 활짝 꽃피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근원적 결핍과 근본적 나약함을 지닌 우리이기에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다양한 고통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때로 그 고통의 강도가 너무 세서 울부짖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혹독한 환난 중에 앉아 있는데, 이렇게 참혹한 곤경에 빠져있는데, 주님께서는 대체 어디 계시는 건가요? 대체 계시기나 한건가요?’

 

작게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오늘 우리뿐만 아니라 위대한 성인 성녀들께서도 자주 심각한 주님 부재 체험으로 힘겨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양과 염소’ 관련 비유 말씀은 때때로 주님께서 아니 계신 듯하여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좋은 힌트 하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 인간과 언제나 함께 계시는 분, 우리와 나란히 길을 걸어가시는 분,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지니신 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겪으시고 상처를 입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따지고 보니 그토록 뵙기 힘들었던 주님께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숨어 계셨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도처에 현존해 계셨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서 무료급식소 봉사를 가면, 그곳에서 굶주리고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서 가출청소년 쉼터에 간식이라도 사서 가면, 그곳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떨고 있는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민 가득한 마음을 안고 병실을 찾으면 그곳에서 너무 아파서 신음 중인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꽤나 부담스럽지만 씩씩하게 교도소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답답해하시는 주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상 생활 내내 다양한 결핍과 고통 속에 허덕이며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보다 더 힘겹게 살아가는 동료 인간을 향해 지속적으로 시선을 돌릴 일입니다.

 

‘내코가 석자’인데! 라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런 우리의 작지만 한결같은 이웃사랑의 실천은 그토록 우리를 괴롭히던 고통에서 벗어날 힘을 선물로 줄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겠지만,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큰 고통은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향한 우리들의 사심 없는 봉사를 통해 서서히 치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고통의 자리에 우리가 그토록 뵙고 싶어했던 주님께서 현존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치유하고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치유하고 구원해주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하시며, 우리에게 다시금 시작할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결국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생기를 더해줄 것이며 우리 인생을 다시금 활짝 꽃피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간 월요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레위 19,2)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는 성덕으로의 부르심은 나중에 바오로 사도에 의해 “아버지의 뜻”으로 선포됩니다.

곧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테살 4,3)

그리고 이 부르심은 오늘 복음에서 ‘자비와 사랑을 실행한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기준은 신앙이나 종파가 아닙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인이냐 이방인이냐도 아니요,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도 아닙니다.

 

초월적인 신비 체험이나 관상도 아니요, 기적이나 예배도 아닙니다.

교리나 신심도, 신분이나 성공도, 부나 힘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과 자비의 실천일 뿐입니다.

특별히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마태 25,40)에게 해준 사랑과 자비의 실천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해 준 것이 곧 예수님께 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해준 것이 당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고,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버려진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 4,20)

한편, 이 심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벌을 받은 왼편의 사람들이 어떤 큰 범죄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단지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처벌을 받은 것은 그들이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적극적인 사랑을 하지 않은 사실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음, 곧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짓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려고 애쓰는 일일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야고 4,17)

그런데 이 심판에는 또 하나의 특이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베푼 이든, 베풀지 않는 이든,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둘은 정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지 않은 이가 자신이 행한 것을 모름은 마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서처럼, 자신에게 빠져 타인에게 무관심하여 회개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사랑을 베푼 이가 자신이 행한 것조차 모름은 이기적인 자신을 떠나서 온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베푼 것임을 말해줍니다.

 

전자는 자신에게 푹 빠져 어둠에 갇혀 눈이 멀어져 버린 경우요, 후자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자신이 사라지고 빛이 되어버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잖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말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