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2월 2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Margaret K 2023. 2. 24. 06:09

2023년 2월 2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Can the wedding guests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

and then they will fa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는지 묻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네덜란드의 호로닝언 대학교의 폰터스 린더 교수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몹시 어려운 문제를 주고서, A그룹에는 이 문제를 풀기 전에 무관심한 표정을 짓는 사람의 사진을, B그룹에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에 관한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어떤 그룹의 점수가 더 좋았을까요?

무관심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본 그룹은 점수가 낮았고 문제를 푸는 데 들인 시간도 매우 짧았습니다. 무관심한 모습의 사진처럼, 무성의하게 응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열심히 하는 사람의 사진을 본 사람은 열심히 문제를 오랫동안 풀었고 점수도 훨씬 높았습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의지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만약 내 주변에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 모습을 따를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의지를 세워 열정적으로 행동한다면 어떨까요? 주변의 무기력함이 가득했지만, 나를 통해 그 무기력함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녀가 지금보다 더 열정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자주 만납니다. 꿈이 없는 것 같다고, 도대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보기만 하면 답답해서 미치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앞선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구보다도 자기가 먼저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열정적인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상대만 열정적으로 변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의 꿈에 불과합니다.

신앙인은 열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열정은 위선과는 다릅니다. 즉,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열정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열정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단식한다고 거창한 말로 떠들어 대거나 창백한 얼굴로 뽐내며 지나치게 소문내고, 거룩한 분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단식한다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하십니다. 이런 열정은 하느님께서 절대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열정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열정, 자기를 드러내는 열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숨은 것도 보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참된 열정을 보시고 높이 평가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 예언자께서 하셨던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이사 58,8)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뿐이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단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신랑을 차지한다.

-전삼용신부-

영화 ‘노트북’(2020)은 니콜라스 스파크가 자신의 조부모의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멜로드라마 영화입니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대, 미국 남부 지방의 시골 마을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인 노아는 전쟁 참전 중에 있던 형제를 잃고 군인으로 복귀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베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녀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는 로즈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부유한 가문에서 자란 예쁜 소녀이며, 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은 자신의 일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에게 끌리게 되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로즈의 부모님은 노아와 로즈의 결혼을 반대합니다. 로즈는 노아를 사랑하지만 부모님의 의사에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노아에게 이별을 알리고, 도시로 떠나 버립니다. 노아는 로즈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약속했음을 알지만, 그래도 로즈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고 로즈에게 지어주기로 약속한 집을 짓습니다.

 

그렇게 멋진 집을 지어 신문에 광고가 나게 되고 결혼을 준비하던 로즈는 이 사실을 알고 돌아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노아와의 결혼은 망설여집니다. 이때 노아는 로즈에게 매일 편지를 썼고 그것을 어머니가 가로챘음을 알게 됩니다. 로즈는 매일 자신에게 쓴 노아의 편지를 읽으며 결국 노아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또 로즈를 빼앗깁니다. 로즈가 치매가 들어 자신들의 러브스토리를 잊게 된 것입니다. 노아는 지난날의 자신들의 이야기를 노트북에 적어 그녀에게 매일 읽어줍니다. 그리고 잠시 기억이 돌아올 때 매우 행복해합니다.

이렇게 노아는 끊임없이 로즈를 무언가에게 빼앗기려 할 때 그녀를 되찾을 노력들을 하였습니다. 그 노력들의 결과가 마지막 순간 둘이 서로를 기억하며 함께 눈을 감는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은 당신을 빼앗겼을 때 그것을 되찾아오려는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디에 빼앗길까요? 성체를 영한다고 내 안에서 항상 살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못된 소작인의 비유’처럼 우리 안에서 그분을 빼앗고 죽이는 이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방치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탐욕과 육욕과 교만이라는 적에게 빼앗깁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그분을 되찾아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를 ‘단식’이라고 합니다.

 

노아가 로즈를 위해 집을 짓고 수리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단식이고 이미 결혼한 로즈를 위해 매일 편지를 쓰는 일이 단식이며 치매라는 병에 빼앗긴 로즈를 위해 지난 날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일도 단식입니다. 그러나 로즈가 돌아왔을 때는 단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식의 목적은 잃어버린 상대를 되찾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제가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목소리를 들을 때 저는 단식하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을 하려고 했는데 고작 사흘 째 되는 날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신랑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 단식해야 했을까요? 바로 내려가서 밥을 먹었습니다. 잃어버린 신랑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저의 세속-육신-마귀에게 예수님을 빼앗길 때는 단식합니다. 왜냐하면 단식하여 받는 고통이 그분을 잃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좀덜이'​ 신심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_pTl79ZGcpw

 

​-조재형신부-

동창 신부님 중에 운동을 좋아하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저와 비슷한데 시간이 지나면 신부님과 저는 실력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스키를 배울 때입니다. 저는 내려오는 법과 넘어지는 법을 배우고 바로 리프트를 탔습니다. 몇 번 넘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곧잘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십년이 지났지만 저는 늘 그 정도의 실력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동창 신부님은 강사에게 레슨을 받았습니다. 매번 스키장에 갈 때마다 레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실력이 비슷했는데 나중에 보니 신부님은 최고급 코스, 최고 난이도 코스에서 쉽게 내려왔습니다. 저는 스노보드는 엄두도 못 내는데 신부님은 그것도 유연하게 타고 있습니다. 역시 레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테니스도 비슷합니다. 신학생 때 동료들의 어깨너머로 배웠습니다. 늘 B그룹에서 테니스를 쳤습니다. 신부님은 테니스도 레슨을 정확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교구 사제 테니스 대회에 출전하였습니다. 독학으로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운동은 레슨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습관을 고칠 수 있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인도 잘 모르면서 남에게 충고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구글 검색이 있어서 웬만한 선무당들은 명함을 내밀기 어렵습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잘못된 상식을 믿고 따라했다가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쉽게 얻는 것은 쉽게 나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그냥 얻어지는 것들은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무당처럼 잘못된 길을 알려주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단식의 의미를 모르면서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율법의 의미를 모르면서 율법을 따를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봉헌의 의미를 모르면서 과부의 헌금을 조롱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모르면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예수님을 단죄하였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안에는 썩고 있으면서 겉만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습니다. 스키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면서 스키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가르치려했던 저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저들의 행동은 배우지 마라.”

 

오늘 독서는 단식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율법과 규정에 따라서 지켜야 하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단식을 권고 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단식하다고 하면서 일꾼들을 다그치거나, 이웃과 다투고 못된 주먹질을 한다면 그것은 참된 단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見月望指”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달 쪽을 향해 손짓을 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신 뒤로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작은 일에 신경을 쓰다가 큰일을 잊는 다거나 본질을 잊고 곁가지에 한 눈을 파는 경우를 이르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성전 건축에 쓰인 금액, 헌금의 액수, 신자 수 등을 먼저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와 활동입니다. 본당의 예산은 찬조와 나눔을 위해서 쓰여야 합니다. 지역의 현안을 함께 고민하고, 지역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연대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교회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하고, 외적인 성장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이라는 그릇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을 채우는가!’입니다. 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 자비, 희생, 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단식,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

-양승국신부-

 

언젠가 깊은 속병이 들어, 본의 아니게 한 일주일 강제로 단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이틀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는데, 사흘이 지나가니 정말이지 돌아버리겠더군요.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식사 시간보다는 야식(夜食) 시간이었습니다.

 

밤 9시 반만 되면, 이 병실 저 병실 분산되어 있던, 약간은 ‘날리리성’ 분위기가 풍기는 환자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비밀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듯, 의료진 몰래 둘러앉은 그들은 미리 준비해온 통닭이며 족발을 꺼내놓고 낄낄대며 뜯어대곤 했는데, 그 냄새 하며, 소리하며, 정말이지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때 당시 제가 느꼈던 철저한 소외감과 고독함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발적 단식이라는 것,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본인 스스로 억제시킨다는 것, 보통 의지로 해내기 힘든 일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 위대한 인물들은 대체로 단식을 했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도 장장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라든지 대 예언자 엘리야도 대단한 단식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단식과 관련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밥먹는 것 이상으로 단식을 자주 실시했습니다. 철저한 신앙인들이었던 바리사이들 역시 일주일에 두번 꼬박꼬박 단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식과 성덕은 늘 함께 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 가까이 서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고 지배함을 뜻합니다. 단식은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단식하는 동안 한 인간은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은총에 민감해집니다. 단식을 통해 한 인간은 악과 유혹을 억누르고 영혼을 드높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축일 전에 신자들을 단식에로 초대했습니다. 영성가들은 단식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단련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토록 단식이 영성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과는 별로 상관없이 살아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오 복음 9장 14절)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답, 너무나 뜻밖인 대답이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럼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9장 15절)

 

예수님께서는 부차적인 측면, 비본질적인 내용들은 생략하시고, 곧바로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서론을 생략하시고 곧바로 결론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지상에 머무시는 기간은 하느님과 인류가 혼인을 맺고 잔치를 벌이는 시간임을 선포하십니다. 혼인 잔치 기간에 어울리는 것은 음주나 가무, 노래와 축제이지, 단식이나 고행, 슬픔이나 곡소리는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신랑이신데, 그 신랑이 지금 신부를 선정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이름은 ‘부름받고 선정된 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끌레시아(Eclesia, 교회)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지상 교회를 신부로 맞이하시고, 이제 신부와 함께 혼인 잔치를 시작하시는데, 제자들과 신자들은 이 장엄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즐겁고 유쾌해야 합니다. 갖은 인상을 다 쓰면서 단식할 것이 아니라,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할 것입니다.

 

다만 혼인 잔치가 끝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셔서 신부의 집을 마련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로 선정된 교회는 아직 결정적으로 신랑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교회는 강생과 종말 사이, 첫 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기쁨과 슬픔, 획득과 미획득, 축제와 단식이 거듭 교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하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곧 단식의 참된 정신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에서는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하고, 화답송에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주소서.” 라고 노래합니다.

사실 단식은 레위기(16,29-3)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단식을 앞세우던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께 따졌고,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마태 9,15)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당신이 ‘신랑’(묵시 19,6-9)임을 계시합니다.

 

사실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계시하고 있고(이사 54,5-6;62,4-5; 호세 2,16-20),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요한 3,29)이라 불렀으며, 예수님 스스로도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시면서 당신을 ‘신랑’(마태 22,2)으로 비유하셨고,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과 교회 혹은 신자들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2고린 11,2; 에페 5,23-32).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단식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밝혀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5)

이는 ‘단식해야 할 이유’와 함께 당신의 수난 예고와 당신이 수난 받는 야훼의 종인 메시아임을 계시합니다.

곧 오늘날의 우리가 단식을 해야 할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수난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단식이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새로운 의미의 단식으로, 결국 단식은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곧 사랑으로 행하는 단식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으십니까?”

(마태 9,14)

 

주님!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 속 부자유의 멍에를 풀고 불의의 결박을 부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생명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육적인 욕망을 끊어라」

-반영억신부-

저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분은 생일잔치에 초대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가 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 갖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알맹이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9,14).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지적합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이사58,3). 한다면 그것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지 단식이 아닙니다. 주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58,6-7).입니다.

 

그러므로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법의 내용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함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욕망을 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따라서 단식을 통하여 모아진 정성은 반드시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이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있을 때 잘해!”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종일 사랑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구엔반 투안).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단식』

-송영진신부-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1) 예수님은 우리를 굶기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먹이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영적인 굶주림’만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육신의 배고픔’도 걱정하셨습니다(마태 15,32).

‘빵의 기적’을 행하셔서 사람들에게 주신 빵은

분명히 육신을 배부르게 해 준 빵이었습니다(마태 14,20).

 

2) 그리스도교는 ‘굶는 종교’가 아니라 ‘먹는 종교’입니다.

<우리 교회의 중심에 있는 미사 전례는,

‘말씀’을 받아먹고, ‘성체’도 받아먹는 예식입니다.>

다른 종교들을 보면, 단식을 중요한 신심 행위로 여기고

실천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교회에서는 단식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먹는 종교’ 라고 해도, ‘함께’ 먹어야 한다는

것과 혼자서만 먹는 것은 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활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8,20).

또 어느 안식일에 사도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다가

바리사이들과 다툰 일도 있었습니다(마태 12,1-2).

예수님과 사도들의 실제 생활은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은,

아주 고달픈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단식을 할 수도 없고,

단식이 무슨 의미 있는 신심 행위가 되지도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지역에 따라, 또는 나라에 따라, 또는 개인 사정에 따라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정해진 날에는 단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고, ‘사랑 없는’ 일입니다.

단식은 평소에 잘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모든 사람들이 일률적으로 지킬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단식은 의무가 아니라 권고로 바꾸는 것이 옳습니다.

 

4) 우리 교회의 모든 신심 행위의 기본 정신은 ‘감사’입니다.

단식의 기본 정신도 ‘감사’입니다.

우리는 그냥 한 끼를 굶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극기와 절제로 남긴 음식을 굶주리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데,

그 ‘나눔’도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하는 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도 없고, 나눔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굶기만 한다면,

그런 단식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5)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실천한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요한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바리사이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구약시대의 단식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메시아께서 이미 오셔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표현은 ‘손님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뜻으로는,

신앙인은 손님들이 아니라 신랑과 함께 있는 신부입니다.

즉 ‘혼인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신랑은 남의 신랑이 아니라 나의 신랑입니다.>

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에는 중요한 문제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신심을 과시하기 위한

단식이었다는 점입니다(마태 6,16).

이야기 속에 있는 질문도 자기들의 신심을 과시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단식을 철저히 실천하는 충실한 신앙인들이다.

그런데 당신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당신들은 사이비다.”>

 

6) 예수님 말씀의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좁은 뜻으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날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신앙인들이

죄를 짓고서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 사도들은 너무 큰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일부러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단식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는,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에 자기들이 비겁하게 행동했던 것을 뉘우치면서,

또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

단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단식의 뜻에 ‘수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지어서 멀어졌든지, 아니면 마음이 풀어져서

멀어졌든지 간에,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가 예수님에게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하는 경우에 단식은 효과적인 신심행위가 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굶주리게 된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지만(루카 15,14-17),

우리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뚜렷이 표시 나게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좀 더 예수님 곁에 충실하게 남아 있으려고 노력할 때

단식은 효과적인 회개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단식만이 유일한 방법인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사실 방법이나 형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마태 22,37)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