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2월 20일 연중 제7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3. 2. 20. 06:18

 

2023년 2월 20일 연중 제7주간 월요일

그 뒤 예수께서 집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왜 저희는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넌지시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

(마르9,14-29)

 

When he entered the house,

his disciples asked him in private,

“Why could we not drive the spirit out?”

He said to them,

“This kind can only come out through pray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이에게서 벙어리 영을 몰아내시고,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작년에 지방으로 강의 갔다가 인상 깊었던 기억이 떠올려집니다. 저녁 8시부터 시작하는 강의이기에, 강의 전 해장국집에 들어가 혼자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식사하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식당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저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계속해서 저를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상당히 거북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지요.

‘내가 지금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나?’, ‘혹시 여기 있는 분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라서 방송에 나오는 나를 알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상하게 생겼나?’ 등의 생각을 하면서, 계속 불편한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연세 지긋한 형제님께서 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저씨, 죄송한데요. 텔레비전 볼륨 조금만 키워주실래요?”

저를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고, 사람들은 이 텔레비전을 보며 식사 중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저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하느님 덕분에 이렇게 강의하는 것이고, 방송도 하고,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잘 나서도 또 능력이 뛰어나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바라보는 삶이 아닌, 저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착각에 빠집니다. 내가 잘 나서, 능력이 뛰어나서 이렇게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을 제외합니다.

성모님을 포함해서 많은 성인 성녀를 떠올려보십시오. 그들 모두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분들 자체도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었겠지만, 이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며 자신을 계속해서 낮추셨습니다. 그 결과 모든 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특별히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영이 들린 아들을 고쳐주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벙어리 영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십니다. 전승에 의하면 벙어리 영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쫓아낼 수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하느님의 힘을 믿고 그 힘으로 쫓아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힘만으로 쫓아내려고 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벙어리 영이 들인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자기 영광을 떠올리면 모든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러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부족한 믿음이 점점 커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일도 없어지게 됩니다.

당신이 인생에 바친 유일한 기도가 ‘감사’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내가 기도를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전삼용신부-

https://youtu.be/bZzdpfD_Dic

 

옛날 한 수사가 올리브 기름이 필요하여 올리브 묘목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여, 이 연약한 뿌리가 마시고 자랄 수 있는 비가 필요하니, 단비를 내려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주께서는 단비를 내려주셨습니다. 그 수도자는 또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의 나무는 태양이 필요합니다. 주께 기도 드리오니 해를 주시옵소서.” 그러자 검은 구름을 몰아버리고 해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오! 주님, 이 나무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서리가 필요합니다”라고 수도사는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작은 나무에는 서리가 앉아 번쩍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저녁에는 죽어버렸습니다.

 

그 수사는 동료 수사의 방을 찾아가, 그의 이상한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도 역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심어 키우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그의 동료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잘 자랍니다. 나는 나무를 하느님께 맡깁니다. 그 나무를 만드신 하느님께요. 그분은 나 같은 사람보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방법으로도 고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여! 이 나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강풍이든, 햇빛이든, 또한 바람이든, 비든, 서리든 주께서 때를 따라 주시옵소서. 주께서는 이것을 만드셨고, 그리고 잘 아시나이다’라고 기도할 뿐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수사의 기도 문제점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런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올리브나무가 죽을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두 번째 수사는 하느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니 분명히 올리브 나무가 잘 자라게 해 주실 거야!’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믿는 대로 해 주십니다.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지 않으면 그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악령이 들린 아이를 치유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역시 무언가가 이루어지려면 ‘기도’가 필요합니다.

 

아이가 치유된 것은 아버지의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의 기도를 완전하게 해주시기 위해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기도입니다. 악령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믿음이 완성됩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치유해 주실 것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를 할수록 내가 청한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게 되어야 그 기도가 들어집니다.

 

가끔은 기도를 할수록 ‘안 될 수도 있겠다. 되든 안 되든 그냥 주님 뜻대로 해 주세요’라고 청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을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들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할수록 내가 청하는 일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란 믿음이 강해질 때 그 기도는 제대로 가는 것입니다.

제가 ‘비르짓다 성녀의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드리며 느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간다던데 내가 어떻게 연옥에 안 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불가능한 것이 가능할 것이란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믿음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아닌데도 이런 믿음으로 세상의 눈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미국에서 초밥 도시락을 팔아 엄청난 부를 이룬 김승호 회장의 경우입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매일 100번 쓰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쓸수록 ‘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쓰는데 이것은 반드시 이뤄질 거야!’라고 믿게 됩니다. 이것이 많은 실패를 무릅쓰고 결국엔 성공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도는 내가 청하는 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게 되는 믿음을 청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믿음을 증가 시키는 일이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줄 알 때 하느님은 내가 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십니다.

​벙어리 영, 귀머거리 영아, 나가라!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JtD4kIuHvYs

 

​-조재형신부-

며칠 전입니다. 새벽에 일어나니 목이 뻐근했습니다. 잠을 잘못 잔 것인지 목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기도하고,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도 목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면 제게 구세주처럼 도움을 주시는 침술원 원장님이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다니면서도 저는 원장님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인 줄 몰랐습니다. 저의 목을 잘 풀어 주셨고, 침도 정확하게 놓았기 때문입니다. 침술원 벽에는 원장님 덕분에 건강을 회복했던 분들이 보내온 편지가 액자로 걸려있었습니다. 약을 먹고, 통증병원에서 침을 맞으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침술원 원장님이 생각나는 새벽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때는 아침 비행기로 치료를 받고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 뉴욕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멀어서 참았습니다.

 

예전에 어른들이 ‘배워서 남 주느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배우는 것이 다 살이 되고 피가 되니 열심히 배우라는 덕담입니다. 하지만 배워서 남을 주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인 것 같습니다. 침술원 원장님은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평생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본인을 위한 말씀은 많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깨달은 모든 것을 남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새로운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셨고,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모두 자신을 위해서 살기 보다는 이웃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가진 것을 가져와서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사도들은 특별히 부제들을 선발하여 음식을 나눠주는 일을 맡겼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결국 나를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평화를 구하는 기도’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절망이 있는 것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주게 하소서.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 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철저하게 나누는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해와 달과 꽃과 새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풀어주는 참된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 바다의 모래와 빗방울과 영원의 날들을 셀 수 있으랴? 누가 하늘의 높이와 땅의 넓이를, 심연과 지혜를 헤아릴 수 있으랴?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참된 인생길을 알려 주신다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냈지만 병자들을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몸은 성전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경우가 많은 우리들처럼, 머리로는 하느님의 뜻을 알지만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신앙인들처럼,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살았지만 다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아는 것을 삶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몸도 마음도 온전하게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온전히 함께 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때 하느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믿으신 것입니다.”

​기도의 중요성

-이영근신부-

 

청소년 교육의 대가였던 돈보스코께서 틈만 나면 교육자들에게 힘주어 강조하던 가르침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있는 곳에 항상 교육자들이 현존해 있어야 합니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려면, 반드시 누군가를 대신 그 자리에 있게 하십시오.”

 

제자들이 다 큰 사람들이었지만, 아직 영적으로는 갈 길이 먼 미성숙한 사람들이었기에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이 필요했던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운 그 사이 큰 난리가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최측근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셨다가 다른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큰 소동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악령 들린 한 사람을 제자들에게 데려왔는데,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와 구마의 은사를 받은 제자들이 다른 때는 잘도 고쳤었는데, 오늘따라 아무리 애를 써도 악령이 물러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치유와 구마가 식은 죽 먹기였는데, 오늘 갑자기 전혀 약발이 먹히지 않으니 제자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군중들이 ‘알고 보니 사이비로군!’ 하면서 제자들을 코너로 몰고 가고 있었고, 율법학자들의 날카로운 공격 앞에 제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상황이 더 확산되기 직전 예수님과 핵심 제자단이 사건 현장에 도달해보니 사태가 그 지경에 도달해있었던 것입니다. 큰 곤경 속에 당혹해하고 있던 남아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등장 앞에 그제야 한숨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를 데려오라 하신 다음, 차근차근 구마 예식의 단계를 거치며 아이에게서 악령을 내쫒으십니다. 먼저 가족들에게 악령이 활개를 칠 때의 증상을 물어보십니다.

 

언제부터 악령에 시달렸는지도 물어보십니다. 악령에게는 이름도 물어보십니다. 그리고 악령에게 호령하시며 아이로부터 분리시킵니다. 마침내 아이를 악령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켜주십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구마며 치유며 잘 되었는데 갑자기 시스템이 작동이 안 되니 꽤나 자존심 상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르코 복음 9장 28절)

 

예수님의 대답을 우리도 귀담아 들어야겠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코 복음 9장 29절)

 

잘 나가던 제자들의 쓰디쓴 실패, 그 배경에는 기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겸손이 부족했습니다. 기도와 겸손이 사라진 자리에 하늘을 찌르는 자만심과 교만함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목활동, 모든 봉사활동이 바람직하게 전개되고 있는지 점검해봐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온데간데없고 ‘나’란 존재가 가장 중심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제나 내가 최고여야 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은 다들 들러리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까?

 

아직도 갈 길이 한참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누군지 알아?’하면서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하느님 보시기에 너무나 가소롭고 웃기는 처량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영이 든 아이를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사실 이 장면은 제자들이 망신당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자들이 스승을 망신시키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벙어리 영을 쫓아내지 못함으로써 스승을 욕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혹시 스승을 망신시키는 일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기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마르 9,22)

여기서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에,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망에 의탁해서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믿음을 북돋우십니다.

곧 믿음을 주십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마르 9,23)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르 9,24)

그는 믿음과 동시에 믿음 없음을 고백하면서, 겸손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이는 마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를 더 더 더 믿으십니다. 그러니 저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그 믿음으로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주님의 믿음에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의탁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주님의 믿음에 대한 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

(마르 9,25)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누구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당신 말씀의 권능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말씀의 권능을 깨우쳐주심과 동시에, 말씀의 권능을 지니신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르 9,28)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아이를 고친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이 없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또한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다른 이들에게도 망신당하고 스승이신 예수님을 욕보이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아이의 아버지처럼,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분의 믿음에 의탁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 9,29)

주님!

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제 기도가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에 달려 있게 하소서.

당신이 제게 응답하기보다 제가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당신 안에서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