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8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고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서
예수와 이야기 하고 있었다.
(마르 9,2-13)
And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and his clothes became dazzling white,
such as no fuller on earth could bleach them.
Then Elijah appeared to them along with Moses,
and they were conversing with Jesu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고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다며, 아벨과 에녹과 노아를 보기로 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시어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제가 있는 송도에는 공원이 많아서 산책하기가 좋습니다. 그래서 식사 후에는 공원을 산책하며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손을 꼭 잡고 이야기하며 산책하는 부부의 모습, 상대의 허리에 손을 두르면서 함께 걸어가는 모습, 또 한 번은 서로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산책하는 부부의 모습도 봅니다. 모두 보기 좋습니다. 아름답다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이제까지 직접 결혼한 적은 없지만, 결혼식 주례는 누구보다도 많이 섰습니다. 그래서 이제 막 결혼을 시작하는 신랑 신부의 모습을 많이 봤는데, 그때 신랑 신부의 모습 역시 환하게 빛납니다. 화장발, 조명발이 아니라,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기를 바라보는 어른의 모습은 어떨까요?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얼굴 역시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빛날 때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사랑할 때입니다. 앞서 산책하는 부부의 얼굴도 또 이제 결혼하는 신랑 신부도 모두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환하게 변모될 수 있습니다. 즉,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얼굴이 환하게 변모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환하게 빛나는 모습이 사라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소리를 높이며 싸우고 있는 장면에서 환하게 빛나는 모습이 보일까요? 또 그 싸우는 장면을 보는 사람의 얼굴은 어떨까요? 그들에게서도 환하게 빛나는 모습은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기 얼굴이 변모되지 않는 것뿐 아니라, 내 주변 사람 역시 변모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을 떠올려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서 타볼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왜 제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단순히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함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 너희 역시 이렇게 환하게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을 테니 여기에 눌러살자고 말합니다.
초막이 예수님께 과연 필요할까요? 베드로는 무엇보다 주님의 거룩하게 빛나는 모습에 행복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힘들었던 전교 여행을 끊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그저 주님의 신성 안에 머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가지고서는 자기를 환하게 빛내게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변모 장면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변모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변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거룩하게 빛나는 사랑의 모습에 다른 이들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환하게 빛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힘들 때일수록 아름다운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좋은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이 힘든 순간을 이겨내게 해 준 것처럼, 우리 안에 모든 삶이 있다(매트 헤이그).
-조재형신부-
언어를 배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야 언어를 쉽게 터득하지만 저는 그런 재능이 없어서인지, 노력을 하지 않아서인지 미국생활 4년이 되어도 도통 말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들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언어가 들려야 말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외국어만 그런 것이 아닌 것이 미사 중에 독서와 복음도 비슷합니다. 신심이 깊은 형제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독서와 복음이 살아있는 것처럼 귀에 들립니다.” 저는 아직 신심이 깊지 못해서인지 같은 한국말로 하는 독서도 살아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몇 번씩 읽기는 하지만 독서를 봉독하는 소리는 들리는데 내용이 제 마음에 자리 잡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몸은 성당에 있지만 마음은 분심 중에 있기에 독서와 복음이 살아서 가슴에 들어오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독서와 복음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형제님을 존경합니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말씀에 집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살았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한명은 오른편에 다른 한명은 왼편에 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권력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들었지만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유다가 생각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천국의 열쇠를 받을 정도로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라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기도 했습니다. 32년을 사제로 살지만 저 역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삶으로는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직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것임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예언자의 대표인 엘리야와 대화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을 뛰어넘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에 천막을 3개 만들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이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자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애벌레가 누에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비가 되듯이 십자가와 수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부활의 표상입니다. 저 역시도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십자가와 수난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믿음을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에녹은 믿음으로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물의 심판을 대비하여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믿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독서와 복음이 살아서 가슴으로 들어온다는 형제님의 믿음이 새삼 부럽습니다. 그런 믿음만 있으면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다가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믿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거룩한 변모!
-양승국신부-
타볼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묵상하면서, 제 지난 삶을 돌아봅니다. 부족하지만 거룩하게 변모되어보겠다며 무한 반복 발버둥을 쳐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합니다. 마치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수십 년 전의 그 모습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를 봐도 그렇고 동료들을 봐도 비슷해보이기에, 변화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실감합니다.
그러나 자식 입장에서 부모를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이가 30, 40인데도 철없던 시절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부모에게 칭얼대고, 의존하고, 마냥 미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지요? 나이에 맞게 성숙하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모습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어여삐 받으실 우리의 봉헌입니다.
우리가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 이기적인 신앙을 떨치고 보다 이타적인 신앙에로 나아가는 것,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성숙된 신앙에로 성장하는 것,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 죄에서 해방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역시 부단한 변모, 변화와 성장의 삶이었습니다. 나자렛의 청년 예수에서 구원자 그리스도로의 변화를 추구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부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럭비공 같은 성향, 다혈질적인 성격, 마음만 앞서는 나약함으로 인해 제자로서의 삶에 합당하지 못했고 굴곡이 심했습니다. 마침내 스승님을 3번이나 배신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절하게 가슴을 치며 배신의 죄를 뉘우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다시금 회심을 하고 또 한 걸음 크게 나아갑니다.
그리도 드디어 진정한 수제자로 거듭납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영원한 수제자로 예수님과 함께 천국의 관리인이 되십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드라마틱한 성장이요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변화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는 원래 열렬한 바리사이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대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낙마하게 됩니다. 사흘간의 바닥 체험 끝에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그 뒤로 바오로 사도의 삶을 180도 바뀌어 그리스도의 박해자에서 그리스도의 전파의 1등 공신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셀 수도 없이 많은 여행길에 오릅니다.
우리에게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참으로 어려워 보이고, 때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변화인 것이 사실이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 보면, 죽기 살기로 덤벼들다 보면 언젠가 우리 안에서도 점진적 성숙, 작은 변화의 길이 분명히 열릴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새하얗게 빛났다.'
(마르 9,3)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숨기고 계시는 하느님의 속성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신성이 드러났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골로 2,9)
이처럼 장차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름답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곧 언젠가 우리 안에 숨겨진 신성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비천한 몸은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필립 3,21)
이 얼마나 우리는 놀라운 존귀한 존재인가?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모실 ‘초막’을 지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가 산 위에다 짓고자 했던 그 ‘초막’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현장 안에서 지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초막은 무엇으로 지어지는가?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곧 말씀으로 초막은 지어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분께서는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오늘도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이는 예수님의 신원을 알려주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요, 말씀의 순종으로 우리의 몸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모되는 일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콜로 2,10)
그리하여 우리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이 우리에게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되는 영광의 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오늘도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더 건강하고 더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모습은 1년 혹은 2년 전의 나의 모습과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아름답고 거룩하게 변모되어 있는가요?
아니면 추하고 속되게 변모되어 있는가요?
오늘 하늘에서 한 말씀이 들려옵니다.
"거룩해지려거든 그의 말을 들어라!"
그렇습니다.
오늘 진정 거룩하게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순명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으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미래를 희망하며 오늘을 삽니다」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과거에 집착하여 미련을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이미 지난 일입니다.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교훈 삼아 오늘을 살아야지 거기에 매여 있으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물로 주어진 오늘을 살아갑니다. 물론 오늘의 어려움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의 기쁨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이 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묻히고 맙니다. 그러므로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견디며 즐기되 앞을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를 살아갑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신비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삽니다. 그런 사람은 지금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기 때문에 수고와 땀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허황된 꿈으로 말미암아 희망이 절벽인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계성을 올바로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오상의 비오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9,5).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왜 초막을 만들고 싶어 하였을까요? 지금 순간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체험하지 못하였던 황홀함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여 준 것은,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잘 견디라는 위로요 희망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이요, 약속된 미래가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거기에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좋은 순간이라고 거기에 안주해서도 안 되겠지만 성경이나 신심 서적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 성체조배를 하거나 성체를 모시면서 지녔던 귀한 마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는 데 힘이 되어야 합니다. 등산하면서 산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정상에 오른 사람과 오르지 않은 사람이 분명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체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면서 얻은 좋은 기억과 체험이 신앙생활에 활력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헛된 환상을 추구하지는 마십시오. 기도하는데 촛불이 변하였다든지 성모님 얼굴이 나타났다든지…그래서 다음에 기도할 때는 그 이상한 현상이 또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분심에 빠져 기도 아닌 기도를 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도 부활의 영광을 희망하는 만큼, 이 지상에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활은 미래의 일이지만 오늘 여기서 미래를 살지 않으면 영광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미래를 희망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1,29). 이제 영광의 특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년 2월 20일 연중 제7주간 월요일 (0) | 2023.02.20 |
---|---|
2023년 2월 19일 연중 제7주일 (0) | 2023.02.19 |
2023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0) | 2023.02.17 |
2023년 2월 16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0) | 2023.02.16 |
2023년 2월 15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0) | 2023.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