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6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르8,27-33)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Peter said to him in reply,
“You are the Chri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고 수난을 예고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담긴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그 사랑하는 연인은 병으로 하늘나라에 가신 분으로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애틋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이 구절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군요.
“너는 마흔네 살에 죽었다. 너무나 젊은 나이다. 그러나 네가 천 살을 살았다 해도 나는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통계청 2022년 5월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평균 83.4세입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많은 나이에 사망해야 늙은 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사랑하는 사람을 행해서는 나이가 의미 없습니다. 제 부모님 모두 아흔을 넘어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너무 일찍 하늘나라에 가신 것만 같습니다. 이 세상의 이별 앞에서 나이의 의미는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많은 아쉬움과 후회 속에서 그 미안함을 지금 당장 풀어낼 수 없음이 커다란 상실감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존재가 너무나 고마울 수밖에 없습니다.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의 해방을 ‘죽음’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당신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새로운 나라로 나아간다는 것을 당신의 부활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쉬움과 후회. 그러나 그보다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만남, 그리고 무엇보다 죄가 없는 하느님 나라에서 기쁨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더 열심히 지금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라고 물으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한다고 대답하지요. 이렇게 대답할 때, 제자들은 상당히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에 대한 정확한 신원을 이야기한 것을 듣고는 숨겨져 있었던 하늘나라의 비밀을 말씀해주십니다. 당신이 수난과 죽음을 겪게 된다는 것, 그리고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답을 이야기했던 베드로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반박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꾸짖으십니다. 아쉬움과 후회의 순간을 받아들이지 않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보다 바라봐야 하는 것은 부활로 이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살면서 많은 아쉬움과 후회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일을 봐야 했습니다. 그 하느님의 일 안에서 우리는 커다란 희망을 얻게 됩니다.
한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를 믿고 사랑해 준 사람들의 열매다(김나미).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 누군가는 그 사람 때문에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 누군가가 그 이름을 불러주며 그 이름에 자기 피를 섞었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시가 이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누구를 알아준다고 해서 다 그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까요? 오늘 예수님은 당신을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러주며 자기 피를 흘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피를 흘릴 마음이 없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사탄입니다. 그 사람에게 정체성이나 자존감을 심어주기 위함이 아닌 그 사람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러주는 이름에 합당한 피를 흘립니다.
백종원 씨는 자신이 가르쳐 준 대로 하지도 않고 백종원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칩니다.
“거짓으로 내 이름 팔지 마!”
우리도 그리스도 때문에 변할 마음이 없으며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면 거짓으로 그분의 이름을 파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술집 여자가 “사장님!” 하며 술을 팔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사장님은 그 여인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아닌 돈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아닌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을 바라며 당신 이름을 부르며 오는 이들을 거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나의 무엇을 내어주는지 묵상해 봅시다. 관계 자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그 이름을 부른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보니 어떤 아들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장가도 포기하고 막일을 하며 4년이나 어머니를 업고 다닙니다. 공사장에서 일하랴 어머니 챙기랴 바쁩니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어떤 유튜브는 자신이 좋아하게 된 여자가 헬스로 몸을 만드는 여인이기에 자신도 그 여자처럼 몸을 변화시키기로 합니다. 1년 동안 고생한 끝에 엄청난 몸짱이 되어 자신이 여신처럼 바라보던 그 여인을 만나 꽃다발을 안겨줍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누군가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나의 피 흘림이 절대적입니다. 내가 지는 십자가 없이 부르는 하느님의 이름이 하느님을 헛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부르는 대상의 이름을 항상 나의 피를 섞어 그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아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고사에서는 ‘전화위복, 새옹지마’라고 합니다. 엘파소에서 뉴욕 오는 길에 시카고에서 경유했습니다.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가 취소되어서 다시 비행 일정을 예약하니 1시간 늦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엘파소에서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가 기상악화로 40분 늦게 도착했습니다.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가 예정대로 출발했으면 비행기를 놓칠 뻔했습니다. 오히려 비행기가 취소되고 다른 비행기를 예약한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비옥한 땅에서 자란 나무는 키가 크지만 뿌리가 깊지 못합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아도 충분히 양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우람한 나무인데 바람이 심하게 불면 이내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시련과 고통을 디딤돌로 여기는 사람은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꽃을 피우는 것을 봅니다.
어느덧 미국에 온지 4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신부님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는 미국에 새로 오는 신부님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본당의 재정이 여유가 있고, 신자수도 많은 성당으로 오는 신부님은 이내 적응하기 마련입니다. 저도 반갑게 인사를 하면 충분합니다. 규모가 작고, 재정 상태가 어려운 본당으로 오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그런 신부님을 만나면 찾아가서 며칠 지내면서 경험담을 이야기 해 주곤 합니다. 텃밭을 가꾼 이야기도 하고, 화초를 키워보라고도 하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사제가 없던 공동체로 오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며칠 동안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신부님께는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명동의 교구청에서도 8년을 살았습니다.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도 3년을 살았습니다. 토론토에서 학생으로 3년을 살았고, 뉴욕에서 신문을 만들며 4년을 살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제게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면, 기도하면서 살면 그 자리가 꽃자리였습니다.
노아는 신대륙으로 처음 발을 디딘 사람처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가족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아무런 조직도 없는 곳에 새로이 공동체를 시작하는 사제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징표를 주셨습니다. ‘무지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이제 막 하늘을 날아가는 어린 새처럼 낯선 곳에서 둥지를 만드는 젊은 사제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징표를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낯선 곳에서 만나게 되는 시련과 고난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징표가 될 것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듯이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맡긴다고 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고난의 잔, 십자가, 나눔, 희생을 통한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너의 신앙고백을 너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의 신앙고백은 참된 신앙고백이 아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늘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내 안에 들어있는 사탄의 모습!
-양승국신부-
여러분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군가로부터 ‘사탄’이란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너무나 쎈 말이어서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간해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팔자 사나운 저 같은 경우, 누군가로부터 그런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충격이 엄청나더군요. 사나흘 동안 정말이지 기분이 꿀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도 아니고 수제자인 베드로 사도를 향해 사탄이라고 외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코 복음 8장 33절)
수제자를 향해 사탄이라고 한 배경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다음 문장에서 사탄이라고 하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저 역시 가끔 제 안에 들어있는 사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때로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머릿속은 오직 인간적인 것들뿐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기보다 인간들로부터의 인정을 더 추구합니다. 진지하고 영적인 사고방식보다는 오로지 세상적인 잣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마음속엔 오직 현세적 성공, 사람들의 박수갈채, 축척, 상승의 욕구로 가득 차 있어, 보다 본질적인 것들, 영원을 향한 갈망, 하느님을 향한 발돋움, 희생, 배려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풀잎 위에 맺혀있는 아침 이슬같이 해가 뜨면 즉시 사라지고 마는 허상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이었기에, 그토록 강경한 발언까지 사용하며 회심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것들, 정말 중요하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이 머지않아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집, 지위, 명예, 재물, 학력...사실 그 모든 것들은 잠시 후 우리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다 빠져나갑니다. 본질적인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멉니다.
별것도 아니니,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전혀 신경 쓰지 마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보다 영원한 대상, 보다 오래 지속되는 대상, 결국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대상이신 하느님, 그분을 향한 마음의 갈망, 그분과의 끈을 놓치지 마라는 의미의 말씀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인 것입니다.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여기며 충만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100명이 공통적으로 지닌 한 가지 특징은 ‘빛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 세상의 아름다움이 주는 위안도 정말 큰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끼리 주고받는 사랑도 얼마나 감미롭고 풍요로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큰 가치, 더 큰 빛, 더 큰 사랑에로의 성장을 오늘 우리에게 바라고 계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마르 8,29)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은 알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직접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마르 8,31-3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Dei)란 말과 ‘명백히’(행전; 담대히, parresia)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명백히’(parresia)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 입니다.
곧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그것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서 겪는 일입니다.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입니다.
곧 배척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여, 그것이 진정 사랑임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비록 타인으로부터 당하는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이지만,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셋째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 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되는,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의탁과 믿음의 길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일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이요, 또한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이 길을 실행하고자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가로막았을까요?
그를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33)
그렇습니다.
그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앞세워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자 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곧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신변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지는 말아야 할 일니다.
비록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당혹스럽고 황당하더라도,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마르 8,31)
주님!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기꺼이 걷게 하소서.
비록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때까지 겪는 길일지라도 기꺼이 걷게 하소서.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가게 하소서.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는 그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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