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4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치릴로 성인과 메토디오 성인은 형제로, 그리스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나 튀르키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두 형제는 전례서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알파벳의 슬라브 말로 번역하였고, 체코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에게 파견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로마로 돌아간 두 형제 가운데 치릴로 성인은 수도 서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69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메토디오 성인은 교황 특사로 모라비아에서 활동하다가 885년 무렵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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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르8,14~21)
Watch out,
guard against the leaven of the Pharisees
and the leaven of Her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노아에게, 사십 일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려당신이 만드신 생물을 땅에서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분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재미있는 실험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래서 늘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 10명을 세워두고 그 앞에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밝은 미소와 함께 윙크하고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10명의 남자에게 앞의 여성이 누구에게 미소를 짓고 윙크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모두 자신을 보고 미소 짓고 윙크했다고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 남의 눈치 보는 것에 더 익숙한 남자 10명을 세웠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하면서 밝은 미소와 함께 윙크하고는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미소를 짓고 윙크했느냐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보고 미소 짓고 윙크했다고 말합니다.
이 실험을 보면서, 주님의 시선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분명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이 많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지요.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신다고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을 합니다. 정말로 그렇게 차별하시는 주님이실까요? 아닙니다. 지금 내 마음이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아서, 또 주님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어서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또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에 어떤 것도 다 할 수 있다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세상의 말과 행동에 흔들린다면, 나를 바라보시고 또 함께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조심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라고 분부하십니다. 누룩은 나중에 어마어마한 효과를 내는 작고 감추어진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라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옳게 보이지만 실상은 많은 악이 감추어져 있어서 사람들을 나쁜 쪽으로 이끌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이들의 위선을 조심하려는 것이 아닌, 빵이 없다고 수군거릴 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물질적인 빵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통렬히 꾸짖습니다. 그래서 전에 행했던 빵의 기적을 다시 기억하게 하면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에만 집중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어떤 것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용기입니다. 그래야 세상의 것에 흔들리지 않고, 힘차게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용감한 사람은 더 강한 자를 향해 분노하며, 비겁한 자는 더 약한 자를 향해 분노한다(루쉰).
만약 달리기 경주에서 출발선이 앞서 있다면 그만한 이점이 있습니다. 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부분 거부는 유산 상속을 통해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흑수저, 금수저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지원을 잘 받은 아이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그만큼 어려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을 볼까요? 세계 대부호들은 대부분 상속이 아닌 자수 성가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참 특이합니다. 그들은 모두 어릴 적 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들은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특별히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와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전 세계 최고 부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둘 모두 우주 산업에 큰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릴 적 경험이 나를 우주로 이끌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SF소설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어려서부터 좋아했고 ‘장차 인류의 미래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인류의 화성 이주 계획을 생각했습니다. 제프 베조스 역시 어려서부터 우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우주에 만드는 것을 꿈꿨다고 합니다. 이들은 가진 것이 하나 없었어도 어릴 적부터 말도 안 되는 꿈을 위해 달려온 이들입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는 지구촌 10억 인구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세상을 연결하겠다”라는 꿈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는 페이스북 지분의 99%를 기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어린 시절 친 부모에게 버림받고 입양아로 자라면서 따돌림 당하고, 대학교를 중퇴했으며, 괴팍한 성격으로 인해 애플사에서 퇴사를 당하고 췌장암 진단을 받는 등 전혀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도 황당한 꿈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물건을 만들고 싶다는 꿈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모든 여자 연예인 중 가장 재산이 많습니다. 재산 27억 달러(3조 5천억원)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무일푼에서 시작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꿈이 있었습니다. 25년간 쇼를 진행한 ‘오프라 윈프리’ 그가 살아가는 삶의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은 “포기하지 마라”입니다. 그녀의 꿈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연예인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가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변화를 이끌려 꿈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정말 기분 나쁘네!’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도 저런 사람들처럼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법칙만 알면 말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하나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꿈을 가지되 세상에 유익이 되는 엄청난 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불가능한 환경에서도 희망과 가능성을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있고 기대를 받는 사람들이라면 그 꿈에 대한 믿음이 작아도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엄청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증거는 그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뤄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7-21)
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빵의 기적을 이야기하셨을까요? 또 왜 더 적은 양의 빵으로 더 많은 군중을 먹였을 때 더 많은 양으로 더 적은 군중을 먹였을 때보다 많이 남았을까요? 우리는 과연 이런 진리를 깨닫고 있나요? 아니면 무엇이 부족할까 봐 제자들처럼 걱정인가요?
예수님은 오늘 어떻게 재물이 풍족하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지 그 진리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더 가진 것이 없을 때 더 하느님께 감사하고 더 나누어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꿈을 꾸면 가지고 있는 것의 수백 배가 넘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주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꿈을 품는 이들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가졌다고 믿는 것을 없애버리시기도 하십니다. 구약의 기드온 같은 경우입니다. 주님은 싸움에 나가기 직전 기드온의 군사를 아주 적게만 남겨서 기드온의 믿음을 극대화합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 힘이 아닌 당신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기 좋아하십니다. 당신이 인간의 도움이 필요 없으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믿는 이들에게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랑이시기에 사랑으로 믿는 이들, 곧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세상에 이로운 업적을 이루겠다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들은 엄청난 재물까지 손에 넣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는 이들은 먹고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일곱 번의 실패를 딛고 도시락을 팔아 엄청난 부를 얻은 김승호 회장도 같은 말을 합니다. 돈은 마치 흘러가는 물과 같아서 잡아 놓으려 하면 터지거나 썩습니다. 흘려보내야 하는데 그 흘려보내기 위해 잠시 머무는 자리가 우리가 소유한 돈의 액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상한 말 같기도 하겠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돈 걱정하며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려면 세상에 유익이 되기 위해, 세상을 행복하게 하도록 그것들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몇 배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빵이 남게 되는지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조재형신부-
여행을 가거나, 신문 홍보를 다니면서 자주 ‘짐’을 싸게 됩니다. 꼭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세면도구, 속옷, 책, 노트북, 필기구, 바람막이, 사제복을 주로 가지고 다닙니다. 지난번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때입니다. 저는 깜빡했는데 신부님 한분은 본인의 제의를 가져왔습니다. 성지에서 제의를 빌려 입었지만 본인만의 제의를 가지고 온 신부님이 부러웠습니다. 저는 키가 작은 편이라서 공동 제의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 뒤로는 저도 여행을 갈 때나, 성지순례를 가면 저의 제의를 꼭 가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번에 엘파소에 갔을 때도 저의 제의를 가져갔기에 저에게 맞는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 할 수 있었습니다. 강론 중에 신자들에게 “서울대교구에서 좋은 사제를 보냈으니 신부님을 잘 도와주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제에게는 사제복과 제의가 구원의 방주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노아’에게 구원의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방주는 물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곳은 말이나 소가 여물을 먹던 ‘구유’였습니다. 부유한 집의 안방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살던 화려한 궁궐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렇게 누추하고, 겸손한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모자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구유와 방주는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주는 항공모함처럼 큰 배가 아닙니다. 방주는 수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여객선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니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간다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연민의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한다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다른 방주를 구원의 방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입니다. 비록 화려해 보이지만, 비록 부러워 보이지만 그것들은 결코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해서 많은 신앙인들이 쉽게 가라앉는 방주를 어렵게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구원의 방주를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주님 보십시오. 저는 이토록 가련하고 가난한 자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주님 말씀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오늘 저를 향한 일침이요 외침같이 느껴집니다. 피부에 확 와닿으면서도 마치 폐부를 꽉 찌르는 듯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코 복음 8장 17~18절)
그토록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거듭해왔건만 저는 아직도 지상 것들에 촉각이 곤두서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보다 곧 썩어 없어질 세상의 빵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제 수도 생활의 연륜도 만만치 않건만, 아직도 마음이 열리지 못해 신앙의 진리, 주님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토록 많은 시간 동안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건만, 가장 본질적인 깨달음, 결정적 회심에 도달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맴돌고 있습니다.
저는 정녕 영적 시각 장애, 영적 청각 장애를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합니다. 부르시고 외치시는 간절한 주님 외침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저는 이토록 가련하고 가난한 자입니다. 당신 자비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부디 제 눈을 열어주십시오. 제 귀를 열어 주십시오. 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오.
그리하여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보게 하시고, 진정한 인생의 결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참된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달마누카지방에서 바리사이들과 표징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에, 배를 타고 벳사이다로 건너가던 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마르 8,14-16)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마르 8,14)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개의 빵은 대체 어떤 빵인가?
사실 이 빵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필요한 하나인 빵’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전부인 하나인 빵’ 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하더라도 이 ‘하나’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고 마는, 그러나 이 “한 개”만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되는 그런 ‘빵’입니다.
‘배’가 교회의 표상이라면, ‘빵’은 바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르 8,15)
대체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누룩”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일컫는다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동하며,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소유와 권력과 화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바로 그들의 그러한 삶의 방식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녀야 할 누룩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요?
비록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그 ‘말씀의 누룩’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을 부풀리게 할 것입니다.
바로 이 ‘누룩인 말씀의 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마르 8,17)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 8,2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닫다”(σινιετε)라는 단어는 ‘나란히 서다’, ‘함께(같이) 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개의 빵”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이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 ‘곁에’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오직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진정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일 뿐,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
-반영억신부-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13,33). 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질 것이고, 반대로 나쁜 것에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누룩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 속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사고방식, 삶의 양식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셨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참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가 부럽습니다. 오늘 우리도 과한 욕심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 그리고 나의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나의 누룩이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나의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등이 내가 지닌 누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 사랑의 누룩을 부풀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갇혀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오늘 우리와 주님 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8,15-19).”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이 말씀은, “배고파도 그냥 참아라.” 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너희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하느님께서 먹여 주신다.” 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하고,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까지 쓸데없이
걱정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과 “세속의 물질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려라.” 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만 보고서 “먹고사는 일이 너무 힘들고
늘 걱정스러운 상황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나?” 라고
반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의 경제활동을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하고 저축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더 부유하게 살고 싶어서
탐욕을 부리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남들보다 더’ 라는 생각 자체가 악입니다.)
또 영혼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몸의 쾌락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것도 ‘악한 일’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뜻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들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공부하고, 취직하고, 노동하고, 저축하고...... 인간 세상의 일상적인
일들은 신앙인들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막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공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7ㄴ-12).”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2월 14일의 복음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은,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리킵니다.
루카복음 16장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루카 16,14).”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라는 말씀의 바로 뒤에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비웃은 바리사이들은 아마도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면서
‘하느님의 복’을 ‘물질적인 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들도 처음에는 그런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 라고 말씀하시자,
사도들은 놀라면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 10,26)”
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도들의 말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면 어떤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인가?” 라는 뜻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루카 16장).
만일에 부자가 살아서 복을 많이 누렸다는 이유만으로 저쪽 세상
어딘가에 들어가고, 라자로는 복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곳에 못 들어간다면, 그곳은 절대로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말씀하신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데도
너희는 왜 빵이 없다고 걱정하느냐?” 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하신 분입니다(마르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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