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5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그는 눈을 뜨면서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 다니는 걸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시자 눈이 밝아지고
완전히 성해져서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가지 마라.”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
(마르8,22-26)
Looking up the man replied,
“I see people looking like trees and walking.”
Then he laid hands on the man’s eyes
a second time and he saw clearly;
his sight was restored
and he could see everything distinctly.
Then he sent him home and said,
“Do not even go into the villag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노아가 번제물을 바치자,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를 고쳐 주시고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물건을 인터넷에서 구매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물론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대부분 가격 비교 사이트를 보고서 단 10원이라도 더 싼 쇼핑몰을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물건에 대한 비교를 많이 해서일까요?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교도 참 많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동차를 새로 장만하려고 하는데, 자동차와 자전거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아니, 그렇게 멍청한 비교가 어디 있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동차와 자전거는 둘 다 이동 수단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지요. 쌍둥이라도 성격이 다르고 특기와 재주가 다릅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각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유한 ‘나’를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본당 신자가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임 신부님보다 여러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강론, 업무 처리, 신자들과의 친교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 비교가 맞을까요?
예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어느 할머니께서 역대 본당 신부님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무엇을 잘하셨고, 저 신부님은 저것을 잘하셨고….”라는 식으로 각 신부님의 고유한 면을 바라보면서 칭찬하셨습니다.
이렇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의 습관적인 잘못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분히 하나씩 고쳐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고유한 면을 발견하면서 인정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간다면, 어느 순간 어떤 사람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냥 단번에 고쳐주시면 될 것 같은데, 여러 단계를 거치십니다.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다시 두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때 비로소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났다고 해서 곧바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속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으며 또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당 한 번 나갔다고 미사 한 번 참석했다고 해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주님의 품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다(제임스 발리).
-조재형신부-
지금은 은퇴하신 전임 마산 교구장 배기현 주교님의 책 “늙은 아버지와 고독한 아들”을 읽었습니다. 마산교구 총대리 시절에 교구 주보에 매주 올린 글을 모은 책입니다. 글 하나하나에 주교님의 진솔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글은 맵시와 내용도 중요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진실한 마음은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글 내용 중에 ‘담배’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담배를 배웠다고 합니다. 35년간 담배를 피우던 중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1주일을 지낼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추기경님은 학도병 시절에 담배를 배웠고, 3번의 결심 끝에 65세가 되어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 신부! 담배는 그냥 끊는 거야.”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뒤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느 날 부친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니 담배 끊었다면서? 내 니가 신부가 된 것만 해도 가슴 아픈데 신부가 담배꺼지 끊고 어찌 살끼라고, 도로 푸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담배를 끊으라고 하였던 추기경님의 마음도, 애잔한 마음에 담배를 다시 피우라고 했던 아버지의 마음도 참 따뜻하게 보였습니다. 주교님은 담배는 끊었지만 하느님 품으로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컴퓨터나 프린터가 작동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안 되면 마지막으로 해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원’을 끄고 다시 켜는 것입니다. 그러면 컴퓨터도 프린터도 다시 정상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안 되면 전문가를 불러서 손을 봐야 합니다. 전원을 끄고 다시 켜는 것은 컴퓨터와 프린터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다시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저의 방법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작동이 잘 되지 않듯이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도 ‘사탄’이라는 바이러스가 들어왔습니다. 그 바이러스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하고, 타락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의 심판’으로 병든 세상을, 타락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하셨고 물의 심판이 끝난 후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새로운 세상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쿨’하게 인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는 방법을 포기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외아들은 하느님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세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폭력, 정복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나눔, 희생,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닌 자비, 인내,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죄와 인간의 잘못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을 뽑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품종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빛이 입자와 파동의 속성을 가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밀과 가라지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라지의 모습일지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밀의 모습일지라도 악의 유혹에 빠지면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10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등잔에 기름을 채워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은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다만 옹기장이의 뜻에 따라서 화병도 되고, 그릇도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병이든, 그릇이든 쓰임새에 맞게 사용되면 됩니다. 주어진 나의 삶에 감사한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소경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욕망과 교만으로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순명과 겸손으로 새롭게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예수님 장탄식의 원인
-양승국신부-
탄식하시는 예수님, 슬퍼하시는 예수님, 서글퍼하시는 예수님,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십니다. ‘탄식(歎息)’한다는 말의 의미는 ‘한탄하여 한숨을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앞에 벌어진 실망스런 일을 두고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며 한탄함을 뜻합니다.
예수님 탄식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대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메시아니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켜줄 그들만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전지전능함을 지닌 세속적 왕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상반된 메시아이셨지요. 평화의 왕, 순종의 왕, 종들의 종으로서의 겸손한 메시아였습니다.
또 다른 예수님 장탄식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 숱한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또 다른 그 무엇을 기대했습니다. 보다 더 자극적인 것, 보다 더 큰 것, 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그 무엇을 끝도 없이 요구해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사적인 욕구를 상시적으로 채워주는 개인 비서, 해결사,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 마술사로 격하시키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맺음 방식 안에서 제대로 된 신앙인들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시험해서 안됩니다. 내게 이득되는 것만 청해서도 안 됩니다. 좋은 것, 달콤한 것만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매일의 우리 삶 안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모든 상황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 우리가 희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것들도 다 하느님께서 내게 필요하니 주시겠지, 하는 넓은 사고방식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당신을 향한 여정에서 무수히 많은 표징들, 기적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과 하직했지만, 우리 모두는 아직도 하느님 자비의 품 안에서 기쁜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이 좋은 세상, 이 좋은 형제들, 이 좋은 피조물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미사성제를 통해 그 크신 하느님께서 이 작고 비천한 인간 존재 안으로 다시금 들어오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표징, 더 큰 기적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무엇이 보이느냐?”>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는 ‘눈먼 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눈먼 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냥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기보다는, 보되 눈이 가려져 있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 곧 어둠에 덮여 빛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그는 마치 장미꽃을 그 가시로 찔러 상처를 주는 것으로 알 뿐, 그 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불이 자신을 뜨겁게 태워 상처 입히는 것으로 알 뿐, 주변을 환히 밝혀준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볼 뿐, 상처에서 흘러나온 구원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이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요한 1,5),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곧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대체 무엇이 가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육안’,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심안’(마음의 눈),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보는 신앙의 눈인 ‘영안’(영의 눈)입니다.
이 신앙이 깊어가면서 ‘영의 눈’이 밝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편에서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 35,10)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당신의 ‘침’을 바르십니다.
이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마르 7,31-37)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혀에 대신 것처럼(마르 7,34), 성령의 도유를 말합니다.
곧 영으로 도유되어 치유된 눈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마르 8,23).
혹 사람들만 보이나요?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두 눈에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겉 형상의 사람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볼 줄 알고, 나아가서 그 사람 안에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풀 한 포기에서도 하느님의 능력을 보며, 그분의 말씀에서 하느님 나라와 사랑을 보는 눈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무엇이 보이느냐?”
(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 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 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하여,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영의 눈을 뜨십시오」
-반영억신부-
눈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하느님의 능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혜안(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그러나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어떤이는 장미꽃을 보면서도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 채 가시만은 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11,34-35).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만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눈먼 사람입니다. 지식이나 재물도 꼭 필요한 때 쓰지 못한다면 눈먼 이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먼 이는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눈먼 이가 다니면서 제일 많이 부딪친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똑똑히 보기 위해서는 한두 번으로 안 됩니다. 반복과 훈련이 필요하고 서서히 알아보게 되고 깨치게 됩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 것에 눈이 멀면, 결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게 되었으면 어두운 과거의 마을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송영진신부-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22-26).”
우리는 ‘못 보는 것’과 ‘안 보는 것’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2월 15일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눈먼 이’는
보고 싶어도(보려고 노력해도) 볼 수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못 본 것’은 그 자신의 탓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예수님 말씀은, “그런 일을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런 불행 속에서도 하느님의 일은(하느님의 은총은)
드러난다.” 라는 뜻입니다.
<‘섭리’는 지금 당장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먼 것은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안 보는 것’입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회개합니다.
또 자기는 구원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앞의 ‘에파타’ 이야기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신 것과(마르 7,33) 같은 일입니다.
그 일은 당신이 ‘몸의 병과 장애를 잘 고치는 의사’로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신 다음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앞의 ‘에파타’ 이야기에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고
분부하셨습니다(마르 7,36).
예수님께서 병자와 장애자를 고쳐 주신 다음에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일이 많은데, 그것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고 고백하지는 않고,
그저 ‘몸의 병을 잘 고치는 의사’ 라는
소문만 퍼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을,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마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눈먼 이의 눈을 고쳐 주신 일은 그에게 ‘새 인생’을 주신 일입니다.
그래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을,
“이제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서 새 인생을 살아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신앙인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출발점일 뿐입니다.
우리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날마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에 가다가 멈추거나 돌아서면,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1-4).”
신앙생활은 ‘참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여러분도 전에 이러한 것들에
빠져 지낼 때에는 그렇게 살아갔습니다(콜로 3,5ㄱ.7).”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 뜻과는 상관없이
악한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나쁜 힘’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가려고 하는데, 과거의 삶이 더 좋았다면서
그 ‘나쁜 힘’이 자꾸만 나를 뒤로 끌어당깁니다.
나는 예수님 뒤만 따라가려고 하는데, ‘어떤 나쁜 힘’이
‘내 안에서’ 나와서, 그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다면서 나를 자꾸만
‘다른 길’로(세속으로, 또 욕망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렇게 나를 끌어당기는 그 힘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다가와서
끊임없이 나의 신앙생활을 흔들어대고 방해합니다.
바로 그럴 때에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나는 원래 의지가 약하다.” 같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말은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과 핑계일 뿐입니다.
사실 신앙인의 의지는 믿음과 기도의 힘에서 나옵니다.
‘나쁜 힘들’이 과거로, 또는 속세로 끌어당길 때,
우리는 더욱더 기도하면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사도였던 유다가 그 ‘나쁜 힘’에 굴복하고 배반자가 된 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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