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2월 13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3. 2. 13. 06:16

2023년 2월 13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에 보여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

(마르8,11-13)

“Why does this generation seek a sign?

Amen, I say to you,

no sign will be given to this generat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카인은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을 보고 깊이 탄식하시며, 그들은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8세기 성인인 프랑스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님은 매일 성당을 찾아오는 농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는 특별한 기도를 하지 않는 것 같은데, 평화로운 모습을 늘 오랫동안 성당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 농부에게 신부님께서 물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기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도대체 성당에 몇 시간씩 앉아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분을 보고, 그분은 저를 보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행복해하지요.”

신부님께서는 이 대답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사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대화라고 하면서, 늘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냥 ‘나’만 말하기 바빴습니다. 심지어 그분을 보지도 않고 말이지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화를 나눈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껴져서 대화를 그만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대화를 나눠야만 상대와의 사랑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연애 중인 연인은 하루 종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이 있으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과 기쁨을 체험합니다.

참 기도는 나의 일방적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 즉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며 하느님과의 시선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과 사랑의 깊이가 더 생기고 그 안에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앞선 농부처럼 말입니다.

서로 바라봐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시는데, 우리는 과연 어디를 보고 있을까요? 혹시 입으로 하느님을 외치면서 다른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하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빵의 기적도 행하시고…. 표징의 숫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것만 바라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기도를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일방적인 말하기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래서 서로 행복한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인생을 사는 데는 딱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기적인 듯 사는 것’ 또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듯 사는 것’.(알버트 아인슈타인).

​카인의 후예, 셋의 후예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YrQiOAVpKq8

 

​-조재형신부-

후배 신부님들과 텍사스 끝자락에 있는 ‘엘파소’엘 다녀왔습니다. 뉴욕에서 직접 가는 비행기가 없어서 시카고에서 경유하였습니다. 엘파소에는 제가 30일 피정을 지도했던 신부님이 교포사목으로 왔습니다. 환영과 격려의 차원으로 방문했습니다. 이제 미국에 온지 1달이 조금 넘은 신부님은 멀리서 온 신부님들을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방을 정하면 제게 제일 좋은 방을 정해 주었습니다. 선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해 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막 1달이 지났는데 후배 신부님은 마치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것처럼 익숙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같이 간 신부님들은 모두 덕담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건강이 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지내라고 해 주었습니다. 겨울에 온 신부님은 이제 엘파소의 모래폭풍과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온 몸으로 받아 낼 것입니다.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을 지닌 신부님은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건강하고 기쁘게 잘 지낼 수 있으리라 믿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평소에는 일찍 잠자리로 들어가지만 이렇게 후배 신부님들을 만날 때면 좀 더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북미주에서 사목하는 서울대교구 사제들의 모임이 1년에 한 번 있습니다. 그 모임을 주관하는 대표 신부님도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들은 명목상의 대표신부님도 필요하지만 실질적으로 북미주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을 도와주는 대표신부님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막 교포사목으로 미국에 온 신부님을 방문하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격려 해 주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이 휴가를 가면 대신 미사를 봉헌해 줄 수 있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시골의 작은 도시에 있는 신부님들과 규모가 작은 성당의 신부님들의 고충도 들어주고, 함께 해 주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는 지구장 제도처럼 북미주에도 지구장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신문사에 있기에 어차피 신문홍보를 다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과 열정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 동생 아담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하느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와 함께 살던 원주민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와 함께 살았던 생명들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동생을 죽였으면서도 발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하느님께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어쩌면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생명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무고한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카인처럼 적반하장으로 대답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그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까?”

 

오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 기껏 구해 주었더니 마치 보따리 내 놓으라고 하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처럼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이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이 표징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표징입니다. 이미 표징은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주신 ‘표징’에 감사드리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저의는 이러한 표징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그들이 시대의 표징을 분별하지 못함과 함께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를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특히 바로 앞 장면에서는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그들이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이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눈에는 모두 것이 기적이요 신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징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오늘 저희에게 불신으로 왜곡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마음을 뜨게 하소서.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