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2일 연중 제6주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17-37)
I tell you,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으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지혜를 뜻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시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줄리아 카메론은 35세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영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는 다른 학생들보다 자그마치 15살이나 많았지요. 주위에서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이야기했지만, 자신에게는 창조적 열망과 인생 경험이 많고 배움에 대한 욕구가 다른 학생보다 훨씬 강하다고 믿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책에 이런 내용을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잘 칠 때쯤이면 몇 살이나 되는지 아세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알아요. 하지만 그것을 배우지 않아도 그 나이를 먹는 건 마찬가지예요.”
하지 못하는 이유만을 찾는데 너무나 익숙한 ‘우리’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사람은 그만큼 가능성이 훨씬 많은 삶을 살게 됩니다. 따라서 지레짐작으로 할 수 없다며 좌절과 절망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할 수 있는 이유를 바라보며 희망과 의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계명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실천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 역시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습니다.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지금 하는 것이 마음에 와닿지 않아서…. 이런 이유로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할 수 있는 우리와 함께하면서 더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사랑 실천은 자기 기준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주님 기준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당시에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도 더 엄격한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시고,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이 정도는 괜찮다.’라는 안일한 생각이 주님과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들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성장은 흔히 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장이란 조각들을 모으고 그것들이 그리는 그림을 읽음으로써 완전해지는 과정일 때가 많다(리베카 솔닛).
사랑은 모든 분야에 있어 영원불멸하는 주제입니다. 그만큼 파도 파도 새롭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을 알면 다 아는 것이기에 우리는 영원히 사랑을 배우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어떨까요? 내가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과 같이 됩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2022)은 형사 박해일이 한 사건을 맡으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산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인데 실상은 중국인 아내 탕웨이가 그런 일을 벌인 것입니다. 박해일은 사랑하는 아내가 있음에도 탕웨이에게 끌리게 됩니다. 그러다 탕웨이가 자신을 구타하던 남편을 살해한 증거를 잡아냅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눈을 감아주기로 합니다. 그는 사건의 유일한 증거인 휴대전화를 바다 깊숙한 곳에 던져버리라고 합니다. 탕웨이는 이것으로 박해일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또 다른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른 박해일은 그러려고 계속 자신을 이용하는 것이냐고 따집니다. 이에 탕웨이는 자신만 사라지면 박해일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이 바다로 사라져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탕웨이가 자신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었음을 안 박해일은 탕웨이를 찾아 계속 바닷가를 뛰어다닙니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결국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것은 각자의 배우자를 배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말은 비극입니다. 영화 대사처럼 완전히 ‘붕괴’하는 삶입니다. 결혼해도 결국은 배우자 자신이 ‘이게 사랑인가?’를 묻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랑이라는 십계명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러려면 손을 잘라야 하고 눈을 빼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결국 사랑이란 계명을 지키려면 다만 이것만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에만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엔 예 하고 자기의 뜻엔 아니오 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사랑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백종원 대표가 골목 식당 방송 이후에 재 점검하면서 자주 하는 말이 “이건 내가 가르쳐 준 게 아니예요”입니다. 사람은 너무나 쉽게 변합니다. 너무나 친절하고 음식도 잘해서 인기가 좋았던 서산 돼지 찌개 집 사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부족한 게 없어서 백 대표는 그저 잔반만 잘 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손님들이 남기는 것을 보며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이 몰려들자 사장님은 초심을 잃었습니다. 대량으로 팔기 위해 수를 쓴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맛이 변했고 결론은 안 좋게 끝났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곱창에서 샴푸 향이 날 정도를 팔고 있었던 곱창 집 사장님이 있습니다. 사장님은 백 대표가 가르쳐 준 대로 그대로 맛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맛있다는 손님들에게 사장님은 말합니다.
“그분이 해주신 거는 그대로만 변치 않고 하면 진짜 오래가요. 하라는 대로만 그대로 하면 돼요.”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본 백 대표는 광대가 승천합니다. 너무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 집은 계속 대박이 나고 마지막도 훈훈하게 끝납니다.
만약 백 대표가 가르쳐 준 대로 하지 않았다면 이는 백 대표를 요식 업계에서 최고 수준인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내 생각이 끼어들수록 내가 더 높아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더 안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완전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있으면 하느님을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데 거기에 내 의지가 들어가면 그 완전함은 불완전함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려면 무조건 완전 자체이신 분께만 예를 드려야 합니다. 사랑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명령에 무조건적인 순종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외국어를 잘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듣기와 말하기입니다. 중학교에서 3년, 고등학교에서 3년을 배웠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학원’도 다녔습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어느 정도 되지만 듣기와 말하기는 미국에서 지낸지 4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말하고 듣고자하는 열의와 갈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영어를 배웠던 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평가하는 것은 듣기와 말하기가 아니었습니다. 쓰기와 읽기 그리고 문법이 평가의 기준이었습니다. 교포사목을 하고, 한국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아무리 미국에서 살아도 영어로 말하고, 듣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미국 성당에서 지내고, 미국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을 봅니다. 수영을 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영어를 하려면 영어의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기준도 있습니다. ‘기도, 성경 읽기, 봉사, 친교’입니다. 봉사와 친교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이라면 기도와 성경 읽기는 영적으로 다져지는 신앙생활입니다. 봉사와 친교는 신앙생활의 꽃입니다. 본당에는 봉사와 친교를 위한 조직과 단체들이 있습니다. 전례를 위해서 ‘해설단, 독서단, 복사단, 성가대, 제대 봉사회, 헌화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에 신앙생활의 핵심인 미사가 거룩하게 봉헌될 수 있습니다. 친교를 위해서는 구역과 반 모임이 있습니다. 성모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에 본당 야유회도 갈 수 있고, 매주 미사 후에 음식 나눔도 할 수 있습니다. 장례가 나면 연도를 하고, 장지에도 함께 갑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를 위한 조직과 단체도 있습니다. 성령 기도회, 레지오, 성서 공부반이 있습니다. 봉사와 친교라는 꽃은 기도와 성경 읽기라는 거름이 있어야 시들지 않습니다. 지금 나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채우는 신앙생활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간 코로나 쓰나미와 함께 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의 일상도 힘들게 했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백신과 치료제로 이제 우리와 이별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백신과 치료제가 있습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강력한 예방 주사입니다. 성체성사는 나약해진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는 주님의 보약입니다. 고백성사는 조금씩 약해진 나의 몸과 마음을 비우고 새롭게 정비하는 보수공사입니다. 견진성사는 하느님의 군사가 되는 특수 훈련입니다. 병자성사는 심신이 약해진 이들을 위한 특진입니다. 혼인성사는 주님의 축복으로 보호받는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신품성사는 주님을 위한 봉사자를 선별하는 의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신앙인들이 충실히 살아가도록 많은 예방 접종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강력한 ‘백신’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부귀함 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와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런 삶을 택하였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던 부자 청년은 울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욕심이 많았던 부자는 재물을 창고에 쌓았지만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은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주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무리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신다는 느낌입니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오 복음 5장 22절)
예수님의 말씀 앞에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까운 이웃들에게 알게 모르게 바보! 멍청이라고 외친 적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렇다면 내 미래는 불붙는 지옥?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 어떤 때는 글자 그대로 수용하고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시킬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은 그 말씀의 진의(眞意), 다시 말해서 참된 뜻, 더 보편적인 의미를 찾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말아야 할 말씀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붙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씀은 가까운 이웃을 쉽게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우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 정도로 받아들이면 무난할 것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평소에는 성인군자 같은데, 한번 ‘욱’하는 마음의 불길이 솟구치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심호흡과 더불어 단 1분만 마음을 가다듬었어도 될 일인데, 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평소에 따놓은 점수, 그 한 번에 다 까먹습니다. 내가 많이 오버했구나, 하는 생각에 평상심에로 돌아가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따라서 하루에도 몇 번씩 자주 마음을 다스릴 일입니다. 특히 화가 솟구치는 순간, 그 감정을 긍정적으로 표출할 줄 아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쉼 없이 흔들려 안정이 되지 않을 때, 폭파 직전에 한 영성가의 말을 귀 담아 들을 일입니다.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성덕에 도달하는 지름길임이 분명합니다. 다음의 일화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두 승려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바라보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우겼고, 다른 사람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선사가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오. 다만 당신들의 마음일 뿐이오’”
분노의 원인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 내면의 불안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내면이 평화롭고, 고요하며, 안정되어 있다면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무시, 소외 앞에서도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화가 나고, 또 자주 우울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욕심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욕심을 버리고, 기대로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비웠다는 마음조차 한번 비워보십시오. 뜻밖의 평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올 것입니다.
올라서려고만 발버둥 치지 말고 가장 밑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가장 미천한 일은 언제나 내 몫이려니 마음먹어보십시오.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만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큰 욕심을 버리고, 지나친 기대도 버리고 아주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하면, 의외로 삶이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화는 상대방에게 발산하지만 머지않아 그 화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또 다른 상처를 입힙니다. 화를 내는 자신을 괴롭힙니다. 고통이 지속됩니다.
결국 ‘마음 바꾸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왜 하루 종일 내 안에 ‘참 나’가 살지 못하고 그 몹쓸 ‘인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까? 자기 내면의 주인공, 내 감정의 주체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언제나 지지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표출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끝도 없는 고통과 상처만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인간관계가 제대로 형성되겠습니까? 건강이나 제대로 챙기겠습니까? 그 상태에 머무는 순간은 결국 불붙는 지옥에서 고생하는 순간입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지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
(집회 15,18)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지혜’를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1코린 2,7)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 2,9)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지혜’는 복음에서 ‘율법의 완성’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17)
사실 히브리인들은 시나이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의로운)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과 맺었던 십계명은 차차 613항으로 늘어났고, 그들의 삶을 율법으로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부터 안식일법, 정결법, 단식법 등을 통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며 대립되었고, 마치 율법의 거부자 혹은 파괴자로 여겨졌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갈라 3,34-35)
그렇다면 대체 ‘율법의 완성’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집회 15,15)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마태 5,19)
이는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에게서 ‘율법이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고 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1요한 2,5)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곧 ‘사랑’이야말로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이 ‘새로운 의로움’을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여섯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 첫 번째에서 네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살인, 간음, 이혼, 맹세에 대한 옛 율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 의로움에서 ‘살인’에 대한 것으로 외적 행동의 의로움을 넘어서, 죄의 뿌리인 내적 지향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율법의 본질이 ‘화해’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3-24)
둘째와 셋째 의로움에서도 ‘간음’의 내적 뿌리가 마음에 있음과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라고 말하면서,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곧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
(마태 6,22)
넷째 의로움은 ‘맹세’에 대한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리인 것이 아니라 단지 진리에 응답하는 사람들이기에 “예”할 것은 “예”(ναι ναι)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οû οû)라고 응답하라고 하십니다.
곧 응답하되 맹세가 아니라 행동으로 응답하고, 행동하되 진리 안에서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십시다.”
(1요한 3,18)
그러니 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우리의 응답 곧 원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1독서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집회 15,15)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시고,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마음의 생각이 밖으로 나옵니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10).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페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율법의 형식주의가 아니라 근본정신인 사랑의 중요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마음에 쌓아 놓은 것을 밖으로 드러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드러난 행동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하였다면, 그는 선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한 일을 하였다면, 선하지 못한 생각을 품은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가득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12,35).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입고,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을 가슴에 모신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구원받을 사람에게나 멸망할 사람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멸망할 사람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2코린 2,14-15).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하였다면 이미 미워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이 악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창세4,1-8)를 보면,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바치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지만,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습니다. 분노와 상처 입은 자존심, 질투,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형제 살해’까지도 서슴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미워하고 성내는 마음이 뿌리라면, 살인 행위는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다스리고자 한다면 뿌리를, 다시 말하면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미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손발 이전에 마음을 단속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단속하되 단호하게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 참으로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우리의 삶은 내면과 외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래서 “행동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이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 습관의 사슬은 매우 작아 잘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새 끊을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 되고 맙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그런 의미입니다. 어떤 죄를 두 번 지으면 더는 죄처럼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행동의 뿌리인 마음을 단속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마음은 하느님의 숨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오늘 1독서 집회서를 보면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15,17.1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보나 안 보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잠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서 생명의 샘이 흘러너온다”(4,23).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14,30).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 하십시오”(필리2,5).
하늘에는 하늘의 질서가 있고, 땅에는 땅의 질서가 있습니다. 바다에는 바다의 질서가, 산에는 산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구 파헤치고, 규정을 지키지 않고 항해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과 행동에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질서를 지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 질서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말씀의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한 21장3절에 보면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한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참된 신앙은 주님의 지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의 의미와 성공 여부는 주님께 얼마만큼 의존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풍요로운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신부생활 하면서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의 속을 본다는 것’입니다.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인 사제가 이렇게 안타까워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큰 안쓰러움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바로 서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항상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면서 지킬 것을 지켜야 합니다. 매 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활을 가지고 과녁을 겨냥할 때 조준을 잘해야 합니다. 과녁에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 것은 잘 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준을 잘못한 탓입니다. 조준을 잘못하면 설사 화살이 시위를 떠나지 않았어도 이미 과녁을 벗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미 죄를 범한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죄의 결과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부터 이미 탐스러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먹기로 결심을 했으니 그것이 죄입니다. 지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진리를 향해 조준되었을 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이 넉넉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언제나 그것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선인장 꽃이 예뼈 선인장 화분을 하나 샀어요. 순이야! 내 마음을 받아줘!
내가 내미는 화분을 보고 순이가 말했어요. 나는 가시난 마음은 싫어!
『위선』
-송영진신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라는 말은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의 ‘모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위선자였던 것은 아닌데,
그래도 그들 대부분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위선자들의 의로움은 ‘거짓 의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의 23장에서 위선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이 말씀에서 ‘무덤’을 ‘생명력 없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무덤이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은 상태다.”
라는 뜻이 됩니다.
위선자들은 그 자신들의 위선 때문에 하느님의 생명력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위선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려고’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신심 행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마태 6,2.5.16).
그래서 그들의 신심 행위는 ‘거짓 신심 행위’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기도도 잘하고 단식도 잘하고 자선도 잘 베푸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일들은 모두 가짜라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마태 23,3).
<세속에서 정말로 강의나 강연이나 토론을 잘하는 사람에게
처음에는 열광하다가 그 사람의 실제 삶이 말과 다르다는 것이
알려지면 금방 비난을 퍼붓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렇게 세속에서도 위선을 싫어합니다.
교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복음서의 내용 전체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위선’을 몹시 싫어하셨습니다.>
위선자들은 눈에 보이는 일은 잘하는데,
정말로 중요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합니다(마태 23,23).
<보이지 않는 일이니, 열심히 해도 표시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들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입니다(마태 23,25-26).
겉으로는 깨끗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위선자의 마음속이 보이지 않으니
겉모습만 보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위선자의 마음속을 보십니다(마태 6,4.6.18).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나 자신’의 마음속을 나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자기는 겉과 속이 같다고,
즉 겉으로도 속으로도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선자들은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죄의식, 죄책감, 또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자기 혼자만의 ‘마음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너는 위선자다.” 라고 지적하고 비난하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하면서 화를 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7,1).>
정말로 중요한 일은 ‘나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 내가 하는 일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신앙생활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또 마음이 깨끗하면 된다는 말도 흔히 하는데,
나 자신의 마음을 나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말은
별로 의미 없는 ‘상투적인’ 말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양심 성찰’을 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양심 성찰만 잘하면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사실 ‘양심 성찰’도 ‘내가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양심의 가책 없이 살면서, 혼자만의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위선자가 양심 성찰을 한다고 해서 무슨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판단 기준으로 ‘사랑’을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2-3).”
이 말은,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일이 다 위선이다.” 라는 뜻입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과 ‘모든 재산과 몸까지
다 넘겨주는 일’이 위선이라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하는 말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기준으로는 사랑 없이 하는 일은 다 위선입니다.
위선이라면, 그 믿음은 가짜 믿음이고, 그 희생은 가짜 희생입니다.
실제로 기적을 일으키고, 실제로 희생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그렇다면 양심 성찰을 할 때,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내 마음속은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가?”입니다.
물론 “내 마음속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라고 자기 혼자 착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큰소리치는 위선에 빠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도 위선자일 수 있다.” 라고 겸손하게 인정해야 하고,
위선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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