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0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
(마르 7,31-37)
He put his finger into the man’s ears
and, spitting, touched his tongue;
then he looked up to heaven and groaned,
and said to him,
“Ephphatha!” (that is, “Be opened!”)
And immediately the man’s ears were opened,
his speech impediment was removed,
and he spoke plainl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뱀의 유혹으로 여자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며 고쳐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살았던 집에서의 기억이 많습니다. 단층 주택이었고 넓은 마당에는 나무와 꽃도 많았습니다. 형제가 많아서 저녁 식사 때면 늘 북적대던 기억, 겨울에는 너무나 추워서 가족 모두가 함께 이불을 덮고 서로의 체온으로 매서운 추위를 이겨냈던 기억, 마당에서 키우던 동물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려집니다.
언젠가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이 집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어딘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파리를 ‘시간이 멈춘 도시’라고 부릅니다. 100년 전 헤밍웨이가 걷건 거리와 현재의 파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53년 이후 이렇다 할 재개발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찾아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무척 반가울 것 같습니다.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행복을 다시금 간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와 비슷한 감사의 인사를 받곤 합니다. 20년 넘게 써 왔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 때문입니다. 제 글을 보다가 어느 순간 보지 않았는데, 아는 지인이 저의 묵상 글을 보내줘서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묵상 글을 보면서 예전의 순수했던 마음이 생각나고,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계속 지켜줘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사랑, 평화, 기쁨, 희망, 믿음 등의 소중한 가치가 담긴 마음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늘 그 자리를 지켜주십니다. 특히 당신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변함없이 계속해서 나눠주십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그냥 손만 얹어 주셔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에파타!”라고 말씀하시지요. 손만 얹어도 충분히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행동을 하셨을까요?
계속된 접촉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단순히 말로 위로 하는 것보다,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 일회적인 사랑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변함없는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에 인내하라. 자신의 결함을 자책하며 용기를 잃지 마라. 하지만 지체하지 말고 그 결함을 고치기 시작하라. 그 노력을 매일 새롭게 시작하라(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백종원의 골목식당 ‘초심 잃은 거제도 도시락 집’의 내용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백 대표는 거제도에서 작은 식당을 하며 거의 망해가는 세 집을 살려 놓습니다. 특별히 가장 믿은 집은 거제도 도시락집 입니다.
손님이 없는 열악한 상권에서 몇 명 안 되는 낚시꾼들을 위해 새벽부터 일하며 고생하는 도움이 절실한 사장님 부부를 위해 백 대표는 자신의 특별 비법이 들어간 톳김밥과 거미새라면을 만드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가게는 대박을 냅니다.
그런데 10개월 만에 재 방문한 상황은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김밥에 톳의 양이 줄었고 맛도 배지 않은 톳을 썼습니다. 거미새 라면에는 통 새우가 아닌 새우를 갈아서 넣었습니다. 그리고 홀에서 음식을 먹으려면 1인 1라면을 반드시 먹어야만 합니다. 또 김밥 하나는 카드 결제가 불가 합니다. 카드 수수료 때문에, 몇 개 안 되는 식탁의 회전율 때문에, 등으로 핑계를 대지만 백 대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처음엔 절실했는데, 지금은 욕심이 들어온 거죠.”
주인은 욕심 때문이었다는 말에 반박하지 못합니다.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은 변할까요? 하지만 그 초심을 잃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백 대표는 말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했는데…. 초심을 잃은 가게가 맛이 유지될 리가 없습니다. 초심에 드리워진 욕심을 걷어내야만 멀리 볼 수 있고 오래 오래 많은 손님에게 사랑 받을 수 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가세요. 왜 이 좋은 기회를 발로 차요? 갈게요. 10개월 전의 절실함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갈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시던 차라 그도 이방 지역에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을은 세상을 상징하는데 이 세상은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이 지배합니다. 고쳐진 그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를 고쳐주신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하지만 이방 민족과 섞여 살던 그는 자기 마을을 지배하던 어둠의 세력의 강력함을 무시하였습니다. 저절로 자신에게 그것이 스며들어 은총을 받고도 상태가 더 안 좋아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일을 알렸습니다. 마치 백종원 대표가 자신들을 찾아와 비법을 알려주었음을 선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백 대표를 위함이 아닌 그것을 위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도 처음엔 사마리아 지방이나 이방 민족들에게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지역을 지배하는 악의 힘이 너무 강력하여 당신 제자들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께 은총을 받고는 바로 복음을 전하는 데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라비아 지방으로 가서 3년을 수련하고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은총을 받고 3년 정도는 함구 하며 그 은총의 씨앗을 열매 맺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받은 뒤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봅시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갈라 1,15-18)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뵈옵고 바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아랍 땅에 머물렀습니다. 대부분의 성서 학자는 그 시간 동안 수련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어디로 돌아왔을까요? 예루살렘의 교회의 수장을 찾아갔습니다. 수련의 결과는 결국 교회의 수장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만나 다시 교회에서 파견 받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돌아가실 때,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여러 체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교회에 온전한 순명이 가능할 수준이 되었을 때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신앙 체험을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바오로는 신앙 체험 3년 뒤 교회로부터 파견 받습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사도 13,1-3)
성령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파견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잘 들어보면 성령께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셔서 교회가 그들을 파견한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첫 신앙 체험을 사도 행전에만 세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 체험을 전하면서도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에 순종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만해지지 않게 잡아줍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고 교회에 순종 할 줄 안다면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주님께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수도회 사제까지 되었고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에 순종하기까지 그 은총을 키우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 주님의 교회를 둘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종파만 수천, 수만에 이릅니다.
반면 성 프란치스코를 봅시다. 같은 개혁자였지만, 자기가 받은 은총을 전할 수준까지 오른 분은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도회를 어렵게 교회의 인가를 받고 세울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순종할 수 있기 전까지는 함구합시다. 오히려 그리스도께 해가 됩니다. 가장 큰 해를 입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초심을 잃지 않도록 은혜를 교회를 통해 주시고 교회에 순종하게 하심으로써 그 초심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처럼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를 1973년 ‘첫 영성체’ 교리를 받으면서 외웠습니다. 어느덧 50년이 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가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준 곳이 있습니다. 지금 그곳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주님의 기도가 벽에 붙어 있습니다. 물론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유혹의 바람에 흔들리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흔들리는 것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유혹에 흔들리더라도 그 유혹에 깊이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혹에 깊이 빠져들면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유혹에 깊이 빠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교만’입니다. 뱀의 모습으로 온 사탄은 하와에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이 하느님과 같아질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시기와 질투’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합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아벨’을 들판으로 데려가서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시기와 질투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세 번째 유혹은 ‘욕망’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싸워서 이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욕망’이라는 유혹에 빠졌습니다. 다윗은 바세바의 아름다움에 취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도 잊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우리야가 바세바의 남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덫에 걸려서 넘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욕망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네 번째 유혹은 ‘욕심’입니다. 아합왕은 자신의 포도원이 많았지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갈증 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재물을 많이 가졌습니다.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채웠지만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벌어진 일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벌어진 일을 해석하면서 성장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경험이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해석하는 마음에 따라서 내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유혹의 바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유혹이 사라지기를 기도하기 보다는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부정의 문을 열고 긍정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절망의 문을 열고 희망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문을 열고 용서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미움의 문을 열고 사랑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탐욕과 욕망의 문을 활짝 열고 나눔과 봉사의 문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병자들, 굶주린 이들에게 그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권한과 능력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시대의 ‘에파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교만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욕망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욕심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나와 Touch하시는 하느님!
-양승국신부-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치유능력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에 원격치유까지 가능하셨던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현재 처해있는 위중한 상황을 예수님께 설명하면서 직접 가주실 것을 청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 직접 가시지 않고도 원격치유를 하셨습니다. 굳이 가시지 않아도, 굳이 손대지 않아도 치유는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꽤나 특별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오자 대뜸 그만을 따로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가십니다. 이어서 그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당신 혀에 대시고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환자는 꽤나 당혹스러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치유해주시지, 남의 귓구멍은 왜 쑤시지? 왜 ‘드럽게’ 자기 침을 내 혀에 묻히냐구?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꽤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시려는 하느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침을 환자의 혀에 바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시려는 하느님’의 모습을 확연히 엿볼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 각자와 일대 일의 관계’ ‘절친 관계’를 맺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행복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따뜻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끊임없이 접촉하길 원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지속적인 스킨십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형편없고 허물 많은 우리 인간들의 구차한 일상사에 기꺼이 끼어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우리와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죄인인 우리와 하나 되기를, 완벽히 우리 안에 사시기를, 우리에게 기쁨과 웃음, 희망과 사랑, 결국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육화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에파타!(열려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지역을 지나 다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마르 7,31)
사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귀먹은 이’란 단지는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곧 귀가 있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입니다.
또한 ‘말 더듬는 이’란 입이 있어도 혀가 굳어져 말씀을 삼키지 않는 이입니다.
그러니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은 소통과 통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단절과 분리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친교를 나누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닫혀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귀와 입이 닫혀있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막혀 있어서 흘러들고 흘러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완고하여 고집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우리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바로 그 순간 저희는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집니다.
곧바로 묶였던 혀가 풀리고 닫혔던 귀의 문이 열립니다.
마치 아담이 말을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창세 1,27-28;2,20), 힘들게 배워야 하는 말을 배우지도 않고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당신 말씀을 듣도록 ‘듣는 귀’를 열어 당신 말씀을 심으십니다.
당신 손가락으로 혀를 도유하여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이로써 “귀머거리는 귀가 얼리리라. ~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의 예언을 저희에게서 이루시고,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도유하십니다.
저희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에파타!(열려라)”
(마르 7,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 손가락을 제 귀에 넣으시어 당신 말씀을 담으소서.
당신 침을 발라 제 혀를 도유하시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소서.
아멘.
「귀를 열어 주시고 입을 풀어주시기를」
-반영억신부-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입이 닫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나를 사랑하시고 먼저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으로 귀를 열어 주시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들을 귀가 없는 그는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말 더듬는 이 입니다. 그런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수필지도를 하시며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시며 말씀도 얼마나 이쁘게 잘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육체적인 귀는 닫혔지만,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으십니다. 내면의 귀가 열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우리도 한적한 곳에서 주님과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특진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들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던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귀를 열어 주시고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어 그로 말미암아 위로와 구원을 얻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하고 놀라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에파타!』
-송영진신부-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7)”
여기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저분은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에서 온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이신 분”이라는
증언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들고 고장 난 이 세상을 고쳐서
천지창조 때의 좋았던 세상으로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ㄷ.ㄹ).”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에파타!”(열려라!) 라는 말씀은,
“빛이 생겨라.”(창세 1,3) 라는 말씀과 같은 ‘새로운 창조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로가 막혀 있는 것을 뚫어서
원래의 ‘열린 통로’로 회복시키신 말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창세 3,24).
그 길이 막힌 것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로가 막힌 것을 상징하기도
하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막힌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길을 복구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고, 구원을 받는 길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된 일에 대해서 혹시라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차단되기 전에 먼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피해서 숨어버렸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 3,8).”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피해서 숨은 일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로를 사람 쪽에서 막은 일입니다.
그것은 죄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된 것은, 사람 쪽에서 먼저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자격을 잃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격을 회복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2월 10일의 복음 말씀에서 ‘듣지 못하는 상태’는 인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또 ‘말을 더듬는 상태’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니까 말씀에 따라 살지도 못하고,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지도 못합니다.
<제대로 알아듣고, 제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만이
그 말씀을 남에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를 고쳐 주신 일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제대로 실천하고,
남에게 제대로 전해 줄 수 있도록 고쳐 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에파타!” 라는 말씀은, 예수님 쪽에서는 “열려라!”인데,
우리 쪽에서는 “열어라!”입니다.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듣게 되고, 들은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말씀대로 살게 되고, 남에게 그것을
말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들은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39-41)”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야 하고,
그다음에는 ‘능동적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없어도 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나라에,
즉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구원과 생명을 받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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