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2월 8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3. 2. 8. 06:08

2023년 2월 8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7,14-23)

 

Jesus summoned the crowd again and said to them,

“Hear me, all of you, and understand.

Nothing that enters on e from outside can defile that person;

but the things that come out from within are what defil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시며 그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당신을 헛되이 섬긴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첫눈에 반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눈에 사랑을 느꼈고, 이 사랑에 부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첫눈에 반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그보다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 아닐까요?

실제로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합니다. 시러큐스 대학교의 스테파니 오티그 교수는 대뇌 촬영을 통해 0.2초 만에 그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코카인을 사용한 것과 같은 희열을 느끼고 뇌의 지적 영역에도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서서히 사랑이 물들어 가면서 사랑의 마음이 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첫눈에 반하는 사랑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어느 순간이 되면 이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과 맞지 않는 이유를 찾으면서 처음에 가졌던 사랑을 부정하게 됩니다. “내가 눈이 삐었지.”라고 말하면서 그 사랑이 잘못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처음의 사랑은 분명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착각이라고 하면서, 아름답고 귀한 사랑을 잘못된 마음으로 바꾸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도 이렇지 않을까요? 0.2초 만에 내 뇌에 각인되는 주님의 사랑은 이유를 만드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이익을 따지는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주님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으로 사랑을 보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함께함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늘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라고 하시면서 깨끗한 마음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의 나오는 마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마르 7,22). 이 마음이 나와서 사람을 더럽혀서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0.2초라도 충분히 반할 수 있는 사랑을 계속해서 내 마음에서 뿜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작은 변화가 일어날 때 진정한 삶을 살게 된다(톨스토이).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XUvDn8NbeFg

 

​-조재형신부-

‘설화(舌禍)’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때문에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말을 잘못했으면 즉시 인정하고 사과하면 그래도 마무리가 되는데 그것을 변명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중국 동진(東晉,317~420)의 9대 왕 사마요는 술김에 애첩 장귀인에게 "당신도 이제 늙었군. 진작 내칠 걸"이라고 말했습니다. 놀라고 발끈한 장귀인은 잠든 왕에게 이불을 덮어씌워 질식사시킨 뒤 도망쳤습니다. 일국의 제왕이 농담 한 마디 때문에 어이없는 죽임을 당한 셈입니다. 태조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의 비참한 말로 역시 설화(舌禍)란 주장도 있습니다. 세자 책봉 싸움에서 패한 게 원인으로 돼 있지만 실은 그 전에 술만 마시면 "한고조 유방이 장자방을 쓴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떠든 게 화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무심코 했든, 작정하고 했든 그 말이 상대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면 이후 일어날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가. 동서고금의 말조심에 대한 경고는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렵습니다. 잠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의 문이 되고 입술은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저 역시도 말 때문에 난처했던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직장인들에게 ‘상여금’은 큰 위로가 됩니다. 같이 일하는 분에게 상여금을 드리면서 약간 비아냥거리는 투로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그분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정중하게 사과를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저의 부덕함이 컸습니다. 때로는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는 공감하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보좌 신부 때입니다. 본당 청년들과 일영으로 단합대회를 갔습니다. 젊은 날이고, 한 잔 술에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과 약간의 시비가 있었습니다. 시비를 가려보니 우리 청년의 실수가 명백했습니다. 상대방에게 사과를 하고 마무리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청년들은 제게 심판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같은 편이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툼 끝에 상처를 입었던 청년을 보듬어 주는 것이 더 필요했습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 직책이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책임자라면 말의 무게는 천근보다 더 무거워야 합니다. 벌어진 일을 잘 수습하는 것은 차선입니다. 설화가 생기지 않도록 참모들은 잘 보좌해야 합니다. 최고 책임자라 할지라도 국제무대에서는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들은 내 안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우리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시기, 질투, 탐욕, 인색, 게으름은 모두 내 안에서 나옵니다.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인간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 교만, 인색, 탐욕, 욕망, 미움, 원망’과 같은 것들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무질서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악한 것들이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밖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 내면의 갈등과 우리들 내면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의 뿌리를 자를 때 비로소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간 좋은 것들이 폭력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화되길!

-양승국신부-

 

강력한 한파의 후유증을 단단히 앓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보일러며 난방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번 스스로 해결해보겠다고, 몇 날 몇 일을 어두컴컴한 보일러실에 앉아 메뉴얼도 꼼꼼히 탐독하면서, 이런 시도 저런 시도, 백방으로 노력해보았지만, 별 진전이 없더군요.

 

할 수 없이 전문 기사님을 호출했는데,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저기 쓰-윽 한번 훑어보시더니 즉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셨습니다. 초스피드로 분해와 교체, 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울 난방이나 온수 문제로 답답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구세주로 맹활약하고 계시는 전문 기사님의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전문가적 포스가 풀풀 풍기는 보일러 기사님을 바라보면서, 저희 같은 사제 수도자도 마찬가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목자가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제단에서, 말씀의 선포자로서의 전문가, 이웃 사랑 실천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수도자가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복음삼덕의 실천의 전문가, 균형 잡힌 공동생활의 전문가가 되는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공동선 실천의 전문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세상 안에서의 일의 전문가, 부모로서의 전문가, 교사나 기술자, 정치인과 관료로서 충만하고 기쁘게 살아갈 때가 아니겠습니까?

 

피정객들을 위해 한 번씩 왕창왕창 시장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참으로 대단합니다. 평생토록 한 사람이 먹어치우는 양이 대단할 것입니다. 주식에 간식, 후식에 특식까지. 어디 그뿐인가요? 어마어마한 양의 술이나 음료, 안주까지...평생 먹은 것을 쌓아 올리면 대형트럭 몇 대 분량이 되겠지요.

 

우리 뱃속으로 들어가는 음식, 절대로 상한 것이나 부실한 것이 아니겠지요. 고마운 분들의 정성과 손길, 땀과 노고가 깃든 결과물, 정말 좋은 것들, 양질의 육류와 생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우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좋은 것들을 매일 수시로 섭취하는 우리입니다. 섭생의 결실이 좋은 결실을 맺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간 좋은 것들이 폭력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화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불행하게도 너무나 초라하고 부실한 것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코 복음 7장 20~23절)

 

좋은 것을 섭취한 우리에게서 보다 아름답고 고결한 것들,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들이 나와 동료 인간과 세상,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면 좋겠습니다.

 

좋은 생각,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 순결, 자선, 생명 보호, 나눔, 호의, 정숙, 친교, 일치, 겸손, 지혜로움...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시작된 ‘정결예법’에 대한 결론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폐기하고 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마르 7,14-15)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이 마치 밖에 있는 양, 막상 속은 은폐하면서 겉의 정결예법에만 치중하는 위선적인 정결예법을 부정하십니다.

 

이는 베드로가 요빠에서 이방인 코르넬리오를 방문했을 때의 환시체험에서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사도 10,15)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

(로마 14,14-16)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1-15장이 명하는 부정과 정결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더럽히는 것들은 밖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처럼 정결이란 가시적인 겉을 깨끗이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 전체에 걸려 있기에, 우리의 내면의 변혁, 곧 전 인격적인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악이 차 있으면 악취가 되어 터져 나오고, 선이 차 있으면 선의 향기가 되어 뿜어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선하시니, 박해하는 이에게도, 상처 입히는 이에게도, 오로지 선을 베푸십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 안에는 온전한 사랑이 가득 찼기에 항상 사랑이 흘러나오고, 우리들 마음에는 미움이나 화가 있기에 그것들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타인을 탓하거나 처지나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안의 어둠과 악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희 마음이 빛과 선으로 빛나는 예수님 마음으로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마르 7,14)

 

주님!

늘 당신 면전에 머물게 하소서.

먼저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나에게서 나오는 생각이 아니라 당신 뜻에 따라 살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고 갈망하게 하소서.

나의 습관과 판단이 아니라 내 안에 심어진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게 하시고,

실행하더라도 빛 안에서 사랑으로 실행하고, 사랑하더라도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속이 중요하다」

-반영억신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그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시니 좋더라.”,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럽히고, 안 더럽히는 것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실 좋고 나쁨은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게 창조된 것이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쓰려고 하면 더러움을 만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안에 품은 육의 욕망들은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밖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적인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짱’ ‘몸짱’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외면을 중시하는 말입니다. 어떤이는 성형수술을 하고 겉모양을 가꾸는 데 온갖 노력을 다 쏟아붓습니다. 반면, 속을 가꾸는 데에는 소홀히 해서 내면을 황폐하게 버려둡니다. 심지어 ‘감정에 충실하자.’ ‘감정에 솔직한 것이 좋지 않으냐?’ 하면서 자신의 악한 생각을 합리화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16,7). 그러니 내면을 더 깨끗하게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 짱'이 소중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닮아 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내 마음속 욕망을 살펴야 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는 글입니다.

“당신의 행동에 있어서는 활달하며 당신의 대화에 있어서는 조리를 지키며 당신의 사상에 있어서는 방황하지 말고 당신의 영혼에 있어서는 내적인 분란과 외적인 혼란을 없애고 실생활에 있어서는 여가가 없을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하지 말라.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갈기갈기 찢고 당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순결하고 현명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영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투명하고 맑은 샘물가에서 샘물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샘물은 결코 식수를 제공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진흙이나 오물을 집어넣었다 하더라도 샘물은 이것들을 흘려보내고 씻어내어 전혀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평범한 우물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은 만족과 단순과 겸손으로 결합된 자유를 스스로 끊임없이 누리면 된다”(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진정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숨, 영, 얼을 불어 넣어주셨으니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가꾸며 하느님의 좋은 작품인 만물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마르 7,14-19).”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세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1) “죄는 너 자신이 짓는 것이다. 죄를 짓고 나서 남 탓을 하지 마라.”

2) “물질 자체는 선한 것이다.”

2) “몸만 씻지 말고 마음을 씻어라.”

 

1) ‘악’은 분명히 ‘사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내가 짓는 것’입니다.

잘 아는 ‘친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든지 잘 모르는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오든지 간에, 박해로 오든지 유혹으로 오든지 간에,

밖에서 오는 그 ‘악’이 나를 죄짓게 하지만,

그래도 어떻든 ‘죄’는 내가 짓는 나의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ㄱ).”

믿음을 굳건히 하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면서 악을 물리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데, 자만심에 빠져 있거나 방심한 상태로

있는 사람은 악에 굴복하거나 물들어서 죄를 짓게 됩니다.

‘악’이 죄를 짓도록 유혹했고 압박했다고 핑계를 대겠지만,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은 죄를 지은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죄를 짓고 나서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 탓’을 한다고 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죄가 더 커질 뿐입니다.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것은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고, 회개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들은 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말만 합니다.

반대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말이 많습니다.

죄를 짓게 된 원인이나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설명은 사실상 변명입니다.

 

2) 음식이든지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물질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 가운데 악한 것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으면 안 되는 짐승’에 관한 율법이 나옵니다.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는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 율법을 폐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음식을 언급하신 것은, 아마도 그 당시에

음식 문제가 사람들을 가장 많이 압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카베오기 하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매우 뛰어난 율법학자들 가운데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가며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목숨이 아까워도 법에 어긋나는 음식은 맛보는 일조차 거부하는

용기를 지닌 모든 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2마카 6,18-20).”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음식 문제는 대단히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법에 어긋나는 이교 제사의 책임자들이 전부터 엘아자르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로 데리고 가, 그가 먹어도 괜찮은 고기를

직접 준비하여 가지고 와서 임금의 명령대로 이교 제사 음식을

먹는 체하라고 권하였다. 그렇게 하여 엘아자르가 죽음을 면하고,

그들과 맺어 온 오랜 우정을 생각하여 관대한 처분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6,21-22).”

박해자들이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한 것은,

사실은 ‘배교’하라고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특정 음식을 먹기를 거부해서 죽은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을 지키려고 순교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음식 규정을 폐지하셨다고 해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순교자들의 신앙까지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회개는 하지 않고 외부 탓만 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3) 회개는 몸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을 씻는 일입니다.

몸을 잘 씻는다고 회개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을 씻어야 회개하는 것이 됩니다.

이 말은 바로 앞의 ‘식사 전의 정결예식 논쟁’에(마르 7,5) 연결됩니다.

정결 예식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실행하는 사람이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과 삶이 정결한 사람이 진짜로 깨끗한 사람입니다.

음식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거룩한 음식을(성체를) 먹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먹든지 간에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굶주리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남의 것을 훔쳐 먹거나 빼앗아 먹는 것도 죄입니다.

절제하지 않고 ‘탐식’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 죄들은 모두 그 사람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로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