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7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마르코 7,1-13)
You disregard God's commandment
but cling to human tradit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시며 그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당신을 헛되이 섬긴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함께하며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세트알데하이드라고 하는 독성 화학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더 오래 있고 싶어도 그렇지 못함을 불만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세트알데하이드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으면, 얼굴도 붉어지지 않고 더 오래 좋은 자리를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시아 인구의 절반이 얼굴 홍조 현상과 같은 유전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유전적 결함이 오히려 더 고마운 것임을 일본의 한 연구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1,300명의 알코올 중독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연구에서는 알코올 중독자 중 홍조 현상이 나타나는 사람의 숫자를 파악했습니다. 몇 %나 홍조 현상을 드러냈을까요? 깜짝 놀랄만한 결과였습니다. 0%였습니다. 단 한 명도 홍조 현상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인구 절반이 홍조 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상인데, 알코올 중독자 중에서는 단 한 명도 홍조 현상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홍조 현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알코올 중독에 빠질 확률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잘 생각해보면 좋은 것이 아닐까요?
불만스러웠던 얼굴 홍조 현상도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왜 이렇게 술 마시기 힘들까?’ 하며 힘들었는데, 이 역시도 하느님의 배려이고 선물일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하느님의 배려와 선물이 아닌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단점이 오히려 장점도 될 수 있으며, 싫어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유익한 것도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조건 거부하고 나쁜 것으로 단정을 지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뿐인 종교를 따르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자체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거룩함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로 향한 내적 지향이 있어야 합니다. 단지 외적인 모습을 가지고 거룩함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어디에서나 계신 하느님의 손길을 찾았다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항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런 모습을 많이 취합니다.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들, 그 모습 안에서 하느님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살아가면서 사람의 행동을 비웃지도, 한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며 오직 이해하려고만 했다(스피노자).
하늘의 법을 세상 법과 타협 시키는 교회라면?
-전삼용신부-
여러분들은 언제부턴가 자녀의 상태가 사이코패스처럼 나중에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범죄자가 될 것임이 거의 확실해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는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책 ‘괴물들의 어머니’(Mother of monsters: 2020)는 이러한 발상으로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심한 장난을 치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폭력을 일삼는 아들을 감시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온 집안에 CCTV를 설치해 놓고 아들이 하는 행동을 감시합니다. 집에서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의 폭력을 행사했던 아들은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드디어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이 아들의 소행이라고 확신한 어머니는 아들을 아버지 집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가지 않고 어머니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CCTV와 녹화본들을 봅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의 책임을 줄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아들이 어머니에게 복수할 차례입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 자신이 사이코패스였음을 녹화하게 시킵니다. 그리고는 결국 아들을 의심한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몰아갑니다. 엄마는 기지를 발휘해서 묶여 있는 곳에서 탈출하여 아들을 칼로 찌릅니다. 드디어 아들의 사이코패스적인 행동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아들의 핸드폰에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보복으로 사이코패스라 취급 당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느껴보게 하고 싶은 것 뿐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습니다. 실제로 어머니를 죽일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법을 철저히 지키면 되는 줄 압니다. 이 세상의 법으로 될 것 같았으면 주님께서 새로운 법을 주러 오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법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사이코패스처럼 보이더라도 자기의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자녀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위 영화에서 어머니는 아들이 사회의 심판을 받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이코패스였던 사람이 자신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의 법은 사실 사이코패스로 살면서도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그러한 법입니다. 이 세상의 법은 각자의 생존을 위한 법입니다. 그 법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자녀를 낳지 않아 인구가 줄고 또 자신의 나라 이익을 위해 하는 전쟁을 합법화하며 자연 파괴의 책임을 누구에게도 지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을 따릅니다. 해적선에서는 해적의 법을, 경찰서에서는 경찰의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을 준수해야 그곳에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 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면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법은 해적선의 법일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그 배 안에서는 질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사랑에 어긋나는 법입니다.
사랑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회 질서가 유지되게 만드는 것이지 온전한 사랑의 법은 아닙니다. 위 영화에서 아이의 어머니가 지닌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면 모두가 적이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법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에게 몸을 맡기는 법입니다. 어머니의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을 깨우쳐주기 위해 희생한 아들이 오히려 하느님 법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예수님은 사람들의 규정을 교리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십일조를 내라는 것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니 교리 차원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규정들을 앞세워 우리는 이 교리를 폐기하였습니다.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에게 법적인 처벌을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미움이 들어옵니다. 위 영화의 엄마처럼.
만약 내가 바다에 빠졌을 때 나는 튜브가 없고 다른 사람은 튜브에 타고 있다면 어떨까요? 튜브는 두 사람이 잡고 있으면 가라앉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튜브를 잡은 사람은 병약한 노인입니다.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이 튜브를 빼앗아야 합니다. 이것이 크게 보면 세상의 법입니다. 세상의 법도 결국엔 생존이 목적입니다.
그러다 지나가는 배가 자신을 구해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병약한 이의 튜브를 빼앗아 생존했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 배에 올라서도 그러한 법에 적용받으면 어떨까요? 배를 빼앗기 위한 일을 벌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배에서는 물론이요, 그 배가 향하는 곳에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미리 자신이 탄 배에서 그 도착하게 될 나라의 법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배에 타서 하느님 법을 익히며 삽니다. 하느님 법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이 훈련을 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세상 법에 지배 당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한 하느님 나라의 법이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지 않고서는 이 세상 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인지, 아니면 배에 탄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녀만 들어갑니다. 하느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어야 그 나라에 머물기 위한 사랑의 법이 의미 있게 됩니다. 내가 바다에 빠져있으면서 괜한 사랑의 법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위선 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법은 하늘에 속한 이만 지킬 수 있습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배에 탄 사람처럼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늘에서 온 분과 같은 지위에 올라가 있음을 믿고 그분이 되어 그분 나라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완전하지 않다면 자꾸 지상의 법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지상의 법을 버리고 천상의 존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법이 지켜집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 하느님 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사랑이 증가합니다. 이 세상에 속한 마음으로 아무리 사랑을 증가 시키려고 해봐야 물에 빠진 사람이 억지로 사랑하는 척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법은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만 지킬 자격이 됩니다.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도, 들에 핀 꽃에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에서도 하늘나라의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과달루페 성지에서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보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과달루페 성지의 시작은 1531년 원주민인 후안 디에고 성인이 성모님을 만나면서입니다. 성모님은 디에고에게 주교님을 찾아가서 성당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디에고의 말을 들은 주교님은 믿지 못하였고, 그렇다면 성모님께 징표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디에고의 말을 들은 성모님은 디에고의 틸마(겉옷)에 장미꽃을 담아가라고 하였습니다. 디에고가 주교님께 장미꽃을 드리면서 디에고의 틸마에는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새겨졌습니다. 주교님은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를 보면서 성모님의 말을 믿었고, 과달루페에 성당을 세웠습니다.
과달루페 성당에는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있습니다. 많은 순례객들이 성모님의 성화를 보면서 기도합니다. 저도 매일 아침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면서 순례를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사람들이 성모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성모님의 성화 앞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습니다. 성당의 뒤편에는 ‘휘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성모님의 성화 앞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폭탄이 터졌지만 기적적으로 십자가만 휘어지고 성모님의 성화는 무사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청원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단 옆에는 ‘성체조배실’이 있습니다. 저도 시간이 나면 성체조배실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성체조배실은 순례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받아 주시는 예수님의 품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매시간 정시에 미사가 있습니다. 과달루페 성지가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은 신앙인들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지에서는 순례자들은 많지만 현지인들이 매시간 미사 드리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과달루페 성지는 매시간 현지인들이 사제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과달루페 성지는 순례자들을 위한 성지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사는 현지인들이 함께하는 성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주, 성단, 은하, 은하계, 태양계, 지구’입니다. 역시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전선하십니다. 규모도 크고, 우리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으십니다. 지구에는 특별한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번식하고, 스스로 보존하고, 후손을 남기는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우주를 생각할 수 있는 지성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성과 영원한 추구할 수 있는 오성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그렇게 수가 늘어났고,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사람은 하느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은 아니기 때문에 역사 앞에서 많은 오류와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사람은 자신만의 명예와 능력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했고,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전쟁의 역사이며,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러한 행동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피부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소중한 전통이 파괴당했고, 그들의 전통은 사라져야 했습니다. 우리 민족도 제국주의 역사관에 의해서 희생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듣고, 왜 그렇게 했는지 묻지도 않고 먼저 단죄를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짧은 시간 이 지구라는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날까지,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사는 것은 교만입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옆에 있는 분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비슷한 점은 무엇인지,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존재의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진정한 경배를 주님께 드려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한번은 돈보스코께서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육은 마음의 일입니다.”
여기서 지칭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 마음은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의 미래를 활짝 열어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이 홀로 설수 있도록 도와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픈 마음입니다. 결국 청소년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참 스승은 청소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을 극진히 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자식 같고, 친구 같고, 연인 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마음이 없는 교사들은 어떻습니까? 그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급여를 받으니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대상자일 뿐입니다. 의무감에서 싫어도 대면해야 할 생계의 도구일 뿐입니다. 마음이 없다 보니, 마음이 가지 않다 보니 자주 짜증 납니다. 그의 미래에는 별 관심도 없습니다. 그가 어찌 되든 세월 가고,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마음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은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깊이 빠져 신앙의 핵심이자 본질이신 하느님보다는 세부적인 규칙의 제정과 준수에 혈안이 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가 무척이나 날카롭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행하던 제반 신앙 행위에 마음, 정성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코 복음 7장 6~8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 손이 더럽다고 꾸짖었지만, 사실 그들의 마음이 더 더러웠습니다.
레위기에 제시되고 있는 정결례 예식 규정에 따르면, 누군가가 시장을 다녀오면 큰 대야에 물을 떠서 팔꿈치까지 담궈 씻어야만 했습니다. 실내에만 있다가 식사시간이 되어 식탁에 앉기 전에는,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으면 충분했습니다.
그냥 적당히 씻으면 되지, 그렇게까지 세칙을 정해놓은 것, 생각할수록 웃깁니다. ‘율법 학자들은 할 일도 되게 없었던가 보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마음은 잔뜩 꼬여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물과 죄악으로 가득 차 악취가 풍겼습니다. 자신들 스스로 하느님 가장 가까이 있다고 자만했지만 사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손 씻는 예식보다도 마음 씻는 일이 훨씬 더 필요했던 그들이었습니다.
몸의 정결을 위해 손도 씻지만 마음도 깨끗히 씻어야겠습니다. 참회의 표현으로 옷도 찢지만, 마음을 찢고, 마음으로 울어야겠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진정한 경배를 주님께 드려야겠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방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3,22절에 나옴)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곧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이는 단지 위생이나 청결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구전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전통 관습 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습을 앞세우는 어긋난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의거하여 음식물만 깨끗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잘못 적용하여 손을 씻는 예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마르 7,7-9)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규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규범’이나 ‘자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 정신’과 ‘하느님의 뜻’을 묻고 그분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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