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2월 5일 연중 제5주일

Margaret K 2023. 2. 5. 06:46

2023년 2월 5일 연중 제5주일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5,13-16)

 

Your light must shine before others,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glorify your heavenly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참된 단식은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떠돌이를 받아 주고, 헐벗은 이를 덮어 주며 보호하는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는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복음의 찬맛

-케엇 대주교-

소금은 겸손함의 표현입니다.

소금의 실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소금은 단지 고기나 생선, 나물 등 식재료의 간을 마추는 보조 재료일 뿐입니다. 요리를 소개할 때 주재료를 설명하지 녹아 없어진 소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처럼 소금은 자신을 모두 희생하는 겸손입니다.

소금은 자신을 잊는 것입니다.

소금은 존재하지만 아주 작고 겸손하게 자신의 모두를 용해합니다. 녹아 형체가 없어져야만 비로소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녹지 않는다면 고기와 생선의 살에 스며들지 못하여 신선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녹아들었을 때만이 이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소금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버리고 존재할 때만이 비로소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소금은 자신의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존재입니다.

아주 작고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소금은 아주 적극적으로 음식을 상하지 않게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하며 음식의 질을 높입니다. 볼 수 없고 음식에 들어간 소금에 대해 말하는 사람도 없지만 맛으로 소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이와 같은 소금의 특성을 갖고, 세상 속에서 소금처럼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작은 소금 알맹이처럼 음식에 완전히 용해되는 진정한 겸손이 필요합니다. 드러내지 않되 가치와 존재감,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소금의 짠맛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정체성과 소금의 가치인 짠맛은 바로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타인을 보듬는 사랑으로 주님의 여덟가지 참행복의 정신으로 사는 삶입니다.

복음의 짠맛을 지니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나의 가족과 이웃, 사회에 겸손한 사랑을 주고 받는다면 사랑의 사회를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눈 작은 사랑이 빛이 되어 세상을 밝게 비추는 힘이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주님을 간절히 사랑하고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소금을 보면 어떤 생각이듭니까?

2. 소금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3. 세상의 소금이 되고 있습니까?

말씀의 나눔

1. ‘세상의 소금이 되라’ 이 말을 이해하지만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아닌 타인을 올려주기 위해 나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을 때의 기쁨을 가져 보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연구에 의하면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의 행복은 1년을 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고로 다리를 잃은 사람은 어떨까요? 다리를 잃는 순간부터 큰 좌절감 속에서 힘든 시간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한 1년을 넘어가면 불행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1년 뒤의 행복도가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보다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그래서 영원히 행복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우리 몸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즉,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어느 쪽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 몸 안의 유전자가 그 역할을 하는데, 행복감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게을러지고 나태해져서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의지가 약해질 것이고, 반대로 불행에 빠져 우울감이 너무 길어지면 삶을 포기하게 되어 유전자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행복이든 불행이든 어느 한 곳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수백만 년 동안 진화됐고 또 앞으로도 진화될 인간이기에 계속된 변화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삶 자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할 때 불행의 순간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으며, 자기 삶에 더 충실할 수 있습니다.

늘 행복하길 원하는 우리이지만, 이는 욕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신 어떤 삶이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출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세상 안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빛나는 사람, 세상 안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단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14)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춰주신 것도 아닙니다. 분명하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로 태어났고,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또 불행 안에서 헤어나지 못해 좌절과 절망을 반복하는 삶도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 꼭 필요하고 거룩한 삶입니다. 그래서 이 모습에 맞게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우리의 빛이 새벽빛처럼 세상에 터져 나올 것입니다(이사 58,8 참조).

리더란, 사람들에게 하기 싫은 일을 시키면서도 그것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사람이다(해리 트루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면 무엇이 좋을까?

-전삼용신부-

https://youtu.be/z5f-W_o0wjE

 

‘특파원 K’라는 한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된 내용입니다. 최근 한 프랑스 방송사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파리 한복판에서 한 여성이 여자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며 데려가려 할 때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단 두 사람만이 “저 사람 엄마 맞니?”라고 물으며 아이를 보호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도와주려는 마음이 들었느냐 질문하니 보통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모르는 사람은 아이에게 “엄마 어딨니?”라고 묻는데 그 사람은 바로 아이를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자기가 나서야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빛과 소금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은총과 진리를 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은총은 사랑이고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서 어떤 것에 맛을 더하고 부패하지 않게 합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위 이야기에서 두 한국 청년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소금입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본 모든 프랑스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빛입니다.

 

그런데 빛과 소금이 되려면 먼저 자신이 짠맛과 빛을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가진 것만 줄 수 있습니다. 두 한국 청년들은 한국에서 그러한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당신의 가르침을 주었고 십자가의 희생으로 피를 쏟아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은총과 진리로 새로 태어났고 그러니 당연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는 별개의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청년일 때 한 본당 선배도 군대 첫 휴가를 나와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러한 상황에 마주쳤습니다. 친구들은 그 선배를 사창가로 데려갔고 자신들도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선배는 몸부림을 쳤고 그 과정에서 옷도 찢어지고 안경도 깨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어쩔 수 없게 되자 친구들도 술만 한잔 더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 선배도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친구들에게 소외당할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다는 두려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견뎌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로 그러다 죽어도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된다고 무엇이 좋을까요? 바로 ‘창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를 주는 이는 창조자입니다. 창조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창조자가 됨은 생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결혼도 실패하고 말기 암 환자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열심히 살다가 생을 마친 일명 ‘풀빵 엄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녀들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자녀들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아이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점차 알아갈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신들의 빛과 소금이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끓여준 새해 첫날 떡국이 그들에겐 소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준 가르침이 그들에겐 빛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들도 자녀를 낳으면 그렇게 부모가 될 것입니다. 받지 않으면 줄 수 없습니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 진리와 은총을 준다는 것. 이것은 어머니가 되는 길입니다. 창조자가 되는 길입니다. 왜 하느님은 우리가 창조자가 되기를 원하실까요? 피조물은 소멸하지만, 창조자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창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창조자는 능력자이기도 하지만 그 능력은 에너지에서 나옵니다. 생명이 에너지입니다. 에너지의 소유자만이 영원히 자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자만이 영원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오늘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어머니가 되는 것일까요? 자녀에게 인간이란 믿음을 주는 부모를 넘어서서 하느님이란 믿음을 주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각자가 가진 믿음을 줍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 자녀임을 믿어 하느님 자녀처럼 은총과 진리를 흘려주면 나에게서 또 다른 하느님 자녀들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 자녀의 어머니가 됩니다.

 

인간을 낳은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이기에 영원할 수 없지만, 하느님 자녀를 낳는 어머니는 창조자 하느님의 협조자가 되어 영원히 삽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주는 이들이 영원히 삽니다. 그 믿음을 주는 방식이 은총과 진리를 흘려주는 것입니다. 은총은 하느님 생명이고 진리는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진 자녀를 낳는 어머니들이 됩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B7JYr015pio

 

​-조재형신부-

이민자들의 삶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삶은 견딜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타향도 정이 들어 고향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있지만 이민자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의 문제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자식의 신앙 문제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따라서 성당에 가고, 주일학교에도 다니고, 복사도 합니다. 그러나 대학에 가면서부터 많은 자녀들은 성당을 멀리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부모님들은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 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는데 어째서 자녀들은 신앙의 등불이 점점 꺼져갈까요? 대화와 소통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은 잘 찾아주고 도와주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시와 명령은 있었지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화하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아들에게 엄마가 밖에서 놀고, 친구들도 만나라고 했답니다. 아들이 엄마에게 컴퓨터 게임에도 나름 스토리가 있고, 그 안에서도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의 시대에는 밖에서 친구를 만나고 놀았지만 우리들의 시대에는 컴퓨터 온라인에서 친구를 만나고 논답니다. 학업에 지장이 있지 않느냐는 엄마의 말에 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즘 대부분의 직업은 컴퓨터와 관련된 직업입니다. 쇼핑도, 은행업무도, 예약도 대부분 컴퓨터로 하는 세상입니다. 컴퓨터 게임 때문에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과장된 말이라고 합니다. 컴퓨터 게임이 있기 전에도 폭력과 전쟁은 있었고, 폭력과 전쟁을 하는 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들의 말에 엄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도 예전에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하는 컴퓨터 게임에서 우승을 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가끔 나가서 운동을 하겠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화는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나는 견진성사 안 받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아버지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견진성사는 내가 확신이 있어야 받는 것인데,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신앙에 확신이 서면 그때 ‘Confirmation’을 받겠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 교리 시간에 배운 것과 실제 역사에서 드러난 교회의 모습이 다릅니다.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공헌한 것도 많지만 교회가 잘못한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유 있는 답변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지만 안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다시 신앙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네가 나의 집에서 사는 동안은 내가 정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내가 정한 규칙은 주일에는 성당에 가는 것이다. 집안에 기일이 있으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아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대화를 마쳤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수제비’를 해 주셨습니다. 수제비는 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을 만들면서 시작됩니다. 어머니는 찰지게 반죽을 하였습니다. 물이 밀가루에 완전히 스며들어 반죽이 찰져야만 수제비는 끓여도 잘 풀어지지 않고, 맛이 쫀득쫀득 했습니다. 수제비는 어머니의 손맛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구수한 육수와 호박과 감자가 들어간 수제비는 비오는 날 저녁 별미였습니다. 시장에 가서 새로운 부식을 사오지 못한 날에는 ‘비빔밥’을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양푼에 야채와 밥을 넣고 구수한 들기름을 넣고 비벼 주었습니다. 맛을 더하기 위해서 고추장을 넣기도 했습니다. 수제비가 밀가루와 물이 하나 된 작품이라면 비빔밥은 야채와 밥이 기름에 어우러져서 각자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기름도 자신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비빔밥의 고소한 맛을 더해 줍니다. 저는 신앙에는 두 가지의 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물이 스며들어 밀가루를 맛있는 반죽으로 만들어주는 수제비의 영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들기름처럼 밥과 야채의 풍미를 살려주면서 조화를 이루는 비빔밥의 영성입니다.

 

가정에 문제와 어려움이 있다면 자녀들의 고유한 인격과 품성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의 방식대로 하나가 되도록 강제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뿌리가 땅 속에서 양분을 끌어 올려 꽃이 피게 하듯이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스며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며 이를 행하여라.” 저는 이것이 스며듦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각자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기름이 제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위해서는 ‘반죽’이 되기보다는 ‘비빔밥’이 되어야 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기름이 되어 아이들의 삶을 더욱 빛나고 풍요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금은 스스로 녹아서 맛을 내는 스며듦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빛은 각자의 품격을 잃지 않지만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비빔밥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음식물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눈에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음식의 맛을 더해주는 소금의 역할!

-양승국신부-

 

건장한 청년들이 줄줄이 들이닥쳤습니다. 먼길 오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한 분위기여서 주특기인 치즈·계란 라면을 열심히 끓여댔습니다.

 

라면 끓이는 데는 제 나름대로 신조가 있습니다. 국물이 한강이거나 퉁퉁 불어터진 라면은 절대로 용서가 안됩니다. 조리 설명서에 따른 적정량의 물에 치즈 한쪽, 파 송송 계란 탁! 불어터지기 전에 신속·정확·공정한 배분!

 

눈이 휘둥그래진 청년들이 후후 불어가며, 맛있다 맛있다 하며 폭풍 흡입하는 모습에 제 마음이 제 마음이 얼마나 흐뭇해졌는지 모릅니다.

 

조리에 있어서 적절한 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소금을 주제로 한 가지 가르침을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도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오 복음 5장 13절)

 

어촌에 살다 보니 새삼 소금의 위력을 확인하게 됩니다. 물고기를 아무리 많이 잡아 와도 시간을 조금만 지체해도 상하게 되고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신속히 손질을 해서 적정량의 소금을 뿌리고 해풍에 말리게 되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합니다.

 

갓 잡아 올린 생선을 구워 먹을 때는 또 어떻습니까? 잘 손질해서 소금을 뿌려준 후, 숯불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익혀 먹으면 그 맛이 일품입니다.

 

따지고 보니 소금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음식물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눈에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음식의 맛을 더해주는 소금의 역할,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역할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말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고민하던 중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성인(聖人)이 될 것이며, 군인은 군대에서 성인이 될 것이며, 환자는 병원에서 성인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생은 자신의 공부를 통해서, 농부는 논과 밭에서, 사제는 사제로서 사목의 현장에서, 공무원은 사무실에서 성인이 될 것입니다. 성인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발걸음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바치는 희생의 발걸음, 바로 그것입니다.”(희망의 길, 가톨릭출판사)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폭탄선언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언합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나오리라.”

(이사 58,8)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이사 58,10)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 5,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럽게도 ‘우리의 빛’, 더 나아가서 ‘우리가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우리 안’에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곧 ‘빛’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단지 빛을 들고서 비추는 것도 아니고 빛을 반조해서 비추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존재입니까?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빛의 자녀”(요한 12,36; 에페 5,8)이니 ‘빛의 존재’임에는 틀림없고, 그리고 “세상의 빛”임에도 분명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 타오르는 않고 있는 불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빛은 타올라야 빛이 되는데, 그리고 타오르려면 자신을 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직 밝게 환히 타오르지 못하고 있는 불이고 맙니다.

소금이 타인 안으로 들어가 녹아야 부패를 막고 맛을 돋우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 세상을 품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다.

곧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 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 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저 ‘피안의 세상’이 아닌, 바로 이곳의 이 세상에 당신을 내어주시어 빛의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이러한 ‘세상의 빛’에 대해서 제1독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이사 58,10)

이러한 착한 행실에 우리의 사명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이 단지 어둠을 피하거나 막거나 몰아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선을 보호하고 행하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불꽃으로 삼으십니다.’(히브 1,7 참조)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여전히 세상에서 타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이 불은 바로 말씀이요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불이요, 빛입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서도 말씀의 불꽃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마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성령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코린 2,4)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마태 5,16)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세상의 소금과 빛」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 본성을 취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라고 말씀하셨고, 동시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테살 5,4-5).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5,8).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13,12).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소금이며 빛입니다.

 

이미 소금이요, 빛이거늘 짠맛을 내지 못하고 밝게 비추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이미 존재 이유를 잃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어 결국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이 되고, 빛을 비추어 주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비추어진 모습은 “착한 행실”입니다. 의도적인 착한 행실이 아니라 삶에 젖어있는 나의 모습이 다른 이의 모범과 표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체적 실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명함은 사랑입니다.

 

착한 행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첫째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58,8).입니다.

 

각자의 삶 안에서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본당에서 준비한 자선함은 1년 내내 운영됩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구체적 행동이 바로 빛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들이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큰 힘과 위로와 희망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위로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이사60,19).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비추임을 받아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과한 욕심을 내려놓은 맑은 영혼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십니다.

 

둘째는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58,10). 입니다.

 

“네 가운데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시기, 질투, 미움으로 흉보고, 비난하고 험담하며 모함하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직도 뒷담화를 하나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콜로4,6). 하느님께서는 말 많은 것을 싫어하고, 말꼬리 잡는 것도 싫어하며 말을 뒤집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헛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품격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주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을 채우고 영감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나눔과 말조심에 마음을 써야 하겠습니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희생의 봉헌을 하고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한다면 그 자체가 소금이요, 빛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뭡니까? 자신을 녹여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부패하지도 않고 세상의 부패를 막습니다. 또한 소금은 절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향력을 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불평, 불만이 많고 교만한 사람을 감사의 사람,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소금의 절정은 맛을 내는 데 있습니다. 소금은 일단 사용이 되면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기능은 여전합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맛은, 드러나지 않게 이웃 안에서 사랑으로 녹아나야 합니다. 희생과 봉사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생명의 가치를 알게 해 주며 가치 있는 삶, 안락함이 아니라 충만함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의 삶입니다. 인생의 맛을 잃었던 이들이 우리들의 기도와 헌신적인 사랑으로 삶의 맛을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여기 촛불을 보십시오. 자신을 녹이지 않고서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없이는 세상을 비출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가 밝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둡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이렇게 어둡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빛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세상을 어둡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풍족해졌는데 말입니다. 과거에 비해 소비는 늘어났지만, 더 가난해졌고, 기쁨도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정은 무너졌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는지 모르지만 소중한 가치는 줄어들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도 줄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천주교나 개신교, 불교등 제도 종교의 의례와 가르침 그리고 계율은 따르지 않으면서 개인적 취향에 따라 종교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까닭에 밝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니라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음을 각성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두운 것은 의롭고 밝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알면서도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됨이 적어서입니다. 진리가 부족해서입니다.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고 사랑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이 더 필요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간절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2,15).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구체적 사랑의 실천으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도록 합시다. 하늘의 별은 어두운 밤에 더 빛나게 보입니다. 사회가 어둡다고 생각될수록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져야 합니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생각될수록 소금의 역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워야 합니다. 까만 밤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더욱 빛나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눈길이, 예수님의 눈길을 닮고, 나의 손과 발이 그분의 손과 발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