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3일 연중 제 4주 금요일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하고 말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6,14-29)
King Herod heard about Jesus,
for his fame had become widespread,
and people were saying,
“John the Baptist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at is why mighty powers are at work in him.”
Others were saying, “He is Elijah”;
still others, “He is a prophet like any of the prophets.”
But when Herod learned of it, he said,
“It is John whom I beheaded. He has been raised u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받으라며,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보통 건물의 재건축 논의는 지은 지 몇 년을 기준으로 진행될까요? 보통 30년을 기점으로 재건축 논의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준공 30년이 경과된 건물만 재건축할 수 있습니다.
이 ‘30년’이라는 시간을 보면서, 저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건축물도 30년이 지나면 새롭게 다시 짓는데, 제 마음은 옛날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원래 ‘나’는 어쩔 수 없다면서 새롭게 만들려는 논의조차 못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재건축된 곳은 너무 멋집니다. 물론 재건축 들어가기 전까지 많은 논의를 비롯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이 과정을 거쳐서 재건축이 이루어지면 깨끗하고 멋진 공간으로 재창출됩니다. 우리 마음도 새롭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지저분하고 복잡한 내 마음을 새롭게 다시 만들어야 깨끗하고 멋진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 ‘변하는 것은 불가능해’, ‘나는 이런 마음이 편해’ 등등 자기 마음의 재건축을 가로막는 잘못된 마음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나의 멋진 미래를 위해 자기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갑곶순교성지를 처음 시작하며 경당을 지을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건축 설계사는 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해주시더군요.
“신부님! 집 짓는 것의 반은 부수는 것입니다.”
먼저 완전히 부수어야 짓는 것이 수월해집니다. 자기 마음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안에 있는 부수어야 할 것을 찾고, 또 실제로 부수어야 합니다. 미움의 마음, 욕심과 이기심,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섣부름, 함께 보다 혼자의 마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정적 마음, 나만 사랑받으려는 마음…. 이런 마음을 부술 때, 재건축이 멋지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헤로데 임금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다, 엘리야다,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등의 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 임금은 이 소문에 깜짝 놀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며 두려워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뒤에,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주었던 것이지요. 바로 헛된 맹세, 자기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 등으로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내려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분명히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깊은 반성과 함께 이제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변하려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재건축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두려워 떨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냥 포기하고 절망에 빠져서 가만히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새롭게 재건축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두려움 없이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하든 지나친 일은 없다(아르스의 성 비안네 신부).
많은 심리 프로그램에서 어렸을 때의 죄책감을 잊고 새롭게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그러나 죄책감을 자기 힘으로 없앨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보내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죄책감도 인간의 능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것을 없애는 힘도 인간에겐 없습니다.
영화 ‘타임머신’(2002)에서 남자 주인공은 애인에게 청혼할 때 강도에 의해 애인이 총에 맞아 죽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애인을 살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타임머신을 만들어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리고 빨리 장소를 이동해 애인이 강도를 만나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차에 치여 죽습니다. 계속 과거로 돌아가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애인은 죽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인간이 하려는 노력이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운명’입니다. 이 운명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 하느님의 영역인 것입니다.
죄책감은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양심에 의해 발생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문제는 이 죄책감을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이미 발생한 사건을 없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지난 50년간 모은 130톤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24시간을 홀로 지내는 할머니 사연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교통사고를 7번이나 당하고도 여전히 위험천만한 8차선 도로에서 파지를 줍습니다. 파지를 가득 실은 할머니가 향한 곳은, 어마어마한 쓰레기 담벼락 앞입니다. 할머니가 쌓은 쓰레기 담은 자그마치 길이 65미터, 높이 1미터 62센티에 달했습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쌓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심지어 거대 쓰레기 담을 지나 들어간 할머니의 집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작은 체구의 할머니도 겨우 드나들 정도로 비좁습니다. 게다가 집 안은 오래 방치된 폐지와 쓰레기들이 썩어 악취와 오물들로 도저히 생활할 수 없어 보입니다.
대체 할머니는 왜 이토록 쓰레기에 집착하시는 걸까요? 할머니에게는 딸이 있습니다. 매일 전화도 합니다. 그러나 딸을 따라나서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왜 한사코 쓰레기로 묻힌 집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할머니는 본래 부자였다고 합니다. 자신은 편하게 컸는데, 딸을 키울 때는 매우 어려워진 것입니다. 할머니에게 딸을 부유하게 키우지 못한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쓰레기를 주워 모으면 언젠가 가격이 오르면 팔아서 딸에게 못다 한 책임을 다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할머니가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딸을 고생시키며 키운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법 싶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죄책감을 없애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작진은 130톤의 쓰레기를 깨끗이 치워주겠다고 말합니다. 쓰레기는 할머니가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50년간 모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번에 치워줄 수 있다고 말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능력이 있는 이가 죄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능력이 있는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을 향하여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마르 6,14)라고 말합니다. 그는 기적이 있으신 분께 무릎을 꿇을 겸손함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요한을 죽인 죄책감을 스스로의 믿음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하시는 분께 그 죄책감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청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고해성사 때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자신은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해 달라는 식의 예절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자존심이 죽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려는 마음이 죽는 것입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축구공으로 커다란 학교 현관문을 깨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반 선생님은 저희 가정의 처지를 알고는 아이들에게 돈 50원씩 가져오라고 하고 당신이 얼마를 보태서 그 문의 수리비를 보상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문을 깨 먹은 죄책감을 더는 갖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모든 죄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은 몰라도 인간은 자신이 준 그 피해를 온전히 보상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드님까지도 죗값으로 지불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죄가 없다고 하시고 하느님의 능력을 믿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우리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죄책감도 믿음입니다. 믿음의 영역은 믿음으로만 상쇄됩니다. 하느님만이 인간의 모든 죄를 없이 하실 수 있는 믿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많이 힘들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인 밑에 순교자가 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똑똑하지만 게으른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큰 문제가 없이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현상유지를 하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태평성대에는 이런 지도자도 좋습니다.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그윽하고, 마을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습니다. 멍청하지만 부지런한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엉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늘 긴장하면서 지내야 합니다. 내일 일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장작을 쌓아 놓으라고 하고, 겨울에 얼음을 쌓아 놓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멍청하고 게으른 지도자가 있으면 조직은 부정과 부패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말 그대로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는 유능한 사람들이 떠나기 마련입니다.
본당 사목자들도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주도적인 사목자입니다. 모르는 것도 없고, 막히는 것도 없습니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그런 본당 신부와 함께 지내는 교우들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본당 신부가 완벽하게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본당 신부님 밑에서 보좌신부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5개 국어를 능통하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두꺼운 책을 읽어보라고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말 그대로 ‘예’라고 따르면 되었습니다. 협조적인 사목자입니다. 모든 결정을 사목위원들과 상의를 해서 내립니다. 사목위원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신부님께 상의를 하고, 본당 신부님은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 줍니다. 저도 그런 본당 신부님 밑에서 보좌신부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를 믿어 주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식사 후에는 함께 묵주기도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수도자나 사목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목자입니다. 이상적인 것 같지만 때로는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본당 신부님 밑에서 보좌신부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질서가 없는 자유는 무거운 책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방관자와 같은 사목자입니다. 본당의 친교와 전례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교우들은 차라리 수도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제사보다 제사 밥에 더 관심이 많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건강하였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 내 마음 두렵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나도, 그래도 나는 안심하리라. 환난의 날, 그분은 나를 당신 초막에 숨기시고, 당신 천막 은밀한 곳에 감추시며,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세우시리라.” 오늘은 서울대교구의 사제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24명의 새 사제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엊그제 같은데 저도 벌써 사제가 된지 32년이 지났습니다. 지나온 발걸음을 보면 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저를 아직까지 사제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오직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사제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제는 이슬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는 험한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와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굳센 믿음이 있다면, 다윗처럼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친다면, 베드로 사도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제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힘을 주실 것입니다.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새 사제들이 주님을 따르는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합니다.
주님!
새 사제들이 겸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맡겨진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성실함을 주소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제가 되게 해 주소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레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가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고결함이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인정 없는 이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무능력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다른 한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되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월계관이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해 줍니다.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주님의 종”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고,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르 6,18)
주님!
뼈 속에 새겨져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진실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힘으로 짓눌러 가라앉힐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목이 베여도 결코 베어지지 않는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소서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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