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31일 연중 제4주간 화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젊은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의 말이다. 그는 1815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근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 사제가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을 사랑하였던 그는 청소년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오다가 1859년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 생활을 익히게 하려고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도 세웠다.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19세기의 훌륭한 교육자로 꼽히는 그는 1888년에 선종하였고, 1934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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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마르코 . 5,21-43)
He said to her,
“Daughter,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and be cured of your afflict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하혈하는 여자를 고쳐 주시고,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씀으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내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조폭 아줌마가 운영하는 시장’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태국의 공익광고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폭처럼 무서워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임대료를 받기 위해 시장에 갑니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한 장사꾼에게 임대료를 내라고 호통치고, 고기 파는 상인에게 가서는 정육점 저울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칩니다. 이어서 누군가에게 손가락질하며 어떤 노점상의 물건을 전부 가져가라고 명령합니다. 분명 갑질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누군가가 영상에 담아 인터넷에 올렸고, 사흘도 되지 않아 이 영상을 조회한 수가 자그마치 백만 회를 넘겼습니다.
이 영상을 본 네티즌들은 어떤 댓글을 남겼을까요? 분노로 가득 찬 댓글이었고, 아주머니의 심보를 지적하면서 이 사장으로 장을 보러 가지 말자고 호소하는 댓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장 상인들이 나서서 아주머니에 대한 진실을 설명했습니다. 임대료를 내라고 호통친 상인은 이미 열 번이나 임대료를 연체하고 있었던 것을 봐주고 있는 것이고, 정육점의 저울을 집어던진 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무게를 속여 팔았기 때문이며, 노점상의 물건을 가져가라고 한 것은 처지 딱한 상인이 노점을 계속 운영할 수 있게 자신이 직접 물건을 구매한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사건의 표면만 보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따뜻하고 잘 배려하며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실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추측성 기사만 내보내며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못 된 사람으로 만드는, 그래서 제일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또 하나의 죄, 그것도 가장 크고 무거운 죄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는 있지만, 다른 이에게 돌을 던질 권리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회당장이 자기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다고 손을 얹어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데, 도중에 그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달받습니다. 그들의 말에 상관없이 집에 가서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이에 대한 반응은 냉랭합니다. “예수님을 비웃었다.”라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죽음만을 보고서는 섣부르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죽음까지도 지배하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못하고 있기에 그들은 감히 주님을 향해 비웃음을 던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를 향해 “탈리타 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지금도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불신의 늪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온갖 비웃음과 잘못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를 향해 그 모든 것을 뒤집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탈리타 쿰!”(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당신의 운명은 당신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갑니다(랄프 왈도 에머슨).
기도로 청하는 것이 자주 바뀌면 안 좋은 이유
-전삼용신부-
(66) 기도로 청하는 것이 자주 바뀌면 안 좋은 이유/ 연중 제4주간 화요일/ 2023 01 31/ 전삼용 요셉 신부 - YouTube
터미네이터, 에이리언 2, 타이타닉, 아바타 시리즈를 감독한 사람이 놀랍게도 동일 인물입니다. 전세계 역대 흥행 순위에 홀로 가장 많은 영화를 올려놓은 감독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제임스 카메론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서 저러한 세계 최고 흥행 영화들이 줄줄이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화들이 나오기까지는 엄청난 인내와 기다림이 있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카메론 감독은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를 보고는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자신도 역사에 길이 남는 그러한 SF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꿈을 접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를 위대한 감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영화 전공자도 아니면서 공상 과학에 관한 읽을 수 있는 모든 책을 섭렵했고 시중에 파는 공상 과학에 관한 책이 없자 도서관에 가서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그는 생계가 막막한 관계로 트럭 운전사를 하며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기회가 되어 자신이 개발한 스톱 모션 기술로 제노제네시스라는 단편 영화를 만들어 투자유치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책으로만 공부했던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투자를 하려던 사람들까지도 떠나갔습니다.
영화에 관한 실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영화계에서 일하다가 감독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피라냐 2’라는 영화인데 감독 이름만 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피라냐 물고기가 날아다닌다는 설정의 영화에 감독으로 이름이 오르게 되어 그는 감독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더는 감독을 맡기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집세를 낼 수가 없어서 결국 쫓겨나 차에서 자야 했습니다. 차에서 웅크리고 자면서 영화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그 심리적 압박이 얼마나 컸던지, 자신이 불 속에 있는데 어떤 사람처럼 생긴 기계가 자신을 죽이러 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그러한 꿈까지도 시나리오로 만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터미네이터(1984)란 영화가 될 시나리오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계에서도 그 시나리오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카메론은 만약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든다면 단 돈 1달러만 받겠다고 했습니다. 대신 감독은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된 영화 제작자 게일 앤 허드라는 여성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터미네이터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어 에일리언 2, 터미네이터 2까지 흥행시키며 일약 흥행의 보증수표가 되었습니다.
이어 세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영화가 타이타닉(1997)입니다. 타이타닉은 10년 넘게 글로벌 흥행 순위 1위를 지켰습니다. 워낙 완벽 주의를 추구하던 그의 성격 덕분에 이미 천문학적 제작비로 떠들썩했었는데, 처음 계획했던 제작비의 두 배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작사는 영화 촬영 중단을 통보합니다. 이때 카메론 감독은 자기 보수와 흥행 개런티까지 다 포기하겠다며 제작사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12년 동안 잠수를 탑니다. 사람들은 그동안의 성공 때문에 부담스러워 더는 영화를 찍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바타(2009)로 그는 그때까지 10년 넘게 흥행순위 1위를 달리던 자신의 영화 타이타닉을 자신이 또 경신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바타를 넘는 영화는 없습니다. 이 흥행에 힘입어 사람들은 아바타 2가 곧 나올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또 13년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결국 2022년에 아바타 2가 개봉했습니다. 개봉하자마자 이미 글로벌 흥행순위 6위에 올랐습니다. 두 편의 영화를 찍는 데 25년이 걸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타이타닉의 흥행에 대한 부담으로 12년 동안 영화를 찍지 못했고, 아바타의 부담으로 13년을 찍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그는 터미네이터도 그랬고 아바타도 그랬으며, 이번에 아바타 2도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자신이 원하는 수준으로 발달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바타 5편까지 계획되어 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이 70이 넘은 나이에도 꾸준히 세계 1위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가 있겠습니다.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정진한 데 있습니다. 어쩌면 기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도는 무언가 청하는 것입니다. 그 청하는 것이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청하며 자신도 그 청하는 것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것 청했다가 저것 청했다가 하면 나의 성장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엄청난 것을 청합시다. 평생 그것만 청할 수 있는 것이면 좋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며 분명 나의 믿음도 성장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9일 기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54일 동안 한 주제로 기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7기도를 25년간 바치고 있습니다. 7기도의 목적은 연옥에 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내 가족 중 다섯 명도 연옥벌을 면하고 나는 순교자의 지위에 오르기 위함입니다. 또 청하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의 발자취를 남기는 것입니다. 분명 죽을 때까지 꾸준히 청할 것이고 그러면 저도 70이 넘어서도 발전하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를 매우 기다리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처음에 예수님께 이렇게 청했습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그런데 도중에 하혈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 치유를 받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야이로보다 낫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야이로는 예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까지 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분이 직접 손을 얹어야 죽어가는 아이가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을 성숙시킬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고쳐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능력과 사랑을 믿는 대로 응답해주십니다. 만약 나의 믿음이 충분하지 않은데도 곧 죽을 병자를 살려달라고 한다거나 오늘은 이 사람, 오늘은 다른 사람의 회개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 사람은 돌아가실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회개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믿음이 커지기를 원하시는데 그러려면 한 주제로 평생을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야이로도 기다리는 사이에 딸이 죽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를 안심시키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죽더라도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결국 예수님은 딸이 죽어도 되살릴 수 있는 분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도의 시련을 주십니다.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의 기도 주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믿음이 증가합니다.
예수님은 기다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작은 달팽이가 사과나무를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무당벌레가 말합니다.
“너 그렇게 천천히 가면 언제 저 꼭대기에 올라갈래? 그리고 아직 사과가 열릴 때가 아니야.”
달팽이는 말합니다.
“괜찮아 무당벌레야! 아마 내가 저 꼭대기에 도착할 때쯤 사과가 열릴 거야.”
사과나무는 사실 달팽이가 기다리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동시에 달팽이가 하늘로 오르게 합니다.
믿음을 증가시킬 수 있다면 헛된 기다림은 없습니다. 믿음은 기다림 속에서 성숙합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시기 위해 40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태어난 자녀가 죽어가자 그 자녀가 죽기까지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죄가 어느 정도 사해졌습니다. 나의 믿음이 인내로 성장하는 것만으로 오랜 기도의 기다림은 가치가 있습니다. 죽기까지 청하며 기도할 수 있는 한 가지 청을 정합시다. 그것을 청하며 우리는 하늘로 오르고 성숙한 신앙인이 됩니다.
-조재형신부-
1988년 5월 4일 군에서 제대한 후에 교구 성소국장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복학하기까지는 10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어디에서 봉사하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저는 청소년들이 있는 곳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돈보스코 센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저는 수녀님들은 본당에서 보았지만 수사님들을 직접 본 적은 없었습니다. 돈보스코 센터는 살레시오 수도회 수사님들이 운영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훈련원’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낮에는 기술을 배웠고, 밤에는 방송통신 고등학교 과정을 배웠습니다. 전원 기숙사에서 지냈고, 매일 아침에 미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미사 전례를 도와 드리는 것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 자습 시간에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사님들께서 늘 강조하는 것은 학생들과 함께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사님들은 학생들과 함께 농구를 하였고, 학생들은 수사님들을 가족처럼 따랐습니다. 스페인에서 오신 모 신부님, 이태리에서 오신 공수사님, 임수사님, 폴란드에서 오신 현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요한 보스코 사제가 설립한 수도회입니다. 10개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20년 후인 2008년 저는 본당에서 그때 함께 일하던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두 분은 인연이 닿아 결혼하였고 아들을 3명 낳아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형제님은 청소년 분과장으로 봉사하였고, 자매님은 구역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혈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2년 동안 온갖 방법을 찾았지만 하혈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다는 이야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 중풍병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 듣지 못하는 사람의 귀를 열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자신의 병을 차마 이야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고 싶은 간절함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12년 동안 멈추지 않았던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소경처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중풍병자처럼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나병환자처럼 깨끗하게 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간절한 손짓은 비록 말은 없었지만 여인의 몸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저도 여인과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03위 시성식을 위해서 방한하셨고, 서울 신학교에서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중앙 통로 쪽에 있던 저는 교황님께서 제 옆을 지나가실 때 발을 살짝 내밀었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제가 된지 32년이 지났으니 그때의 간절함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한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살면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욥 성인이 그랬던 것처럼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의지하며 걸어간다면 병이 나았던 여인처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던 소녀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일어나야할까요? 재물, 명예,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욕망, 욕심, 시기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2023년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탈리따꿈”
<“손을 얹으시어 ~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인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었으니,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고생도 하였을 것이고, 가진 재산도 치료비로 모두 탕진하고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마르 5,27)
사실 율법규정에 따르면, 그녀는 피 흘리는 부정한 여인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도 없고, 더군다나 다른 사람을 만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만지게 되면 그 사람마저도 부정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감히 이러한 금기를 깨어버릴 만한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곧 ‘군중에 섞여들’ 만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만큼, 믿음이 굳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설교집).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인의 믿음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신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불결한 것이 닿으면 같이 불결해지게 되는 법인데, 오히려 불결함이 깨끗하게 치유됨으로써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시리아의 에프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열하던 여인의 숨은 상처와 고통을 통하여 당신의 치유능력이 선포되었으니, 숨어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은 영광 받으소서.
눈에 보이는 한 여인을 통하여,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의 치유능력을 통하여 당신 아드님의 신성이 드러났고, 하혈하던 여인의 치유로써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여인은 주님을 선포하였고, 주님과 더불어 여인도 영예로워졌습니다.
여인은 신성의 증인이었고, 주님은 여인이 지닌 믿음의 증인이셨습니다.”
이제 우리 또한 단지 예수님을 쫓아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예수님의 ‘옷’에 믿음의 손을 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품위와 권능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말씀이신 분’이 ‘말씀이란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말씀’에 손을 대어 말씀의 권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만질 때, 우리 안에 그분의 힘이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옷을 통하여 흘러나왔듯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 예수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곧 말씀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갈라 3,27 참조)들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말씀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우리의 옷에 손을 대는 이들이게 말씀의 권능을 전달해야 할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 말씀의 전류가 흘러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사랑의 전등을 밝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마르 5,23)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믿음의 손」
-반영억신부-
어려서의 기억입니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께서는 놋쇠 밥그릇뚜껑을 따듯하게 하여 배에 올려놓고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때때로 “내 손이 약손이다”하시며 배를 만져주시면 곧 통증이 멈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배를 차게 하면 탈이 나니까 밥그릇 뚜껑을 이용해 따뜻하게 해 줌으로써 그 원인을 치료해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담긴 약손이었으니 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큰 고통이 그를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시련과 역경, 고통, 눈물을 거두어 주리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믿음으로 승리하여라!
일반적으로 회당장처럼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근심 걱정거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내면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그 고통을 통하여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5,23).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만약에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슬픔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이를 살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위도 있고 부러워할 것 없는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남모르는 근심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못할 고민이나 근심 앞에서 회당장처럼 무릎을 꿇는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9) 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인 제자들의 모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어둠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4). 오늘은 믿음의 손이 그리운 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은총을 받은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송영진신부-
1월 31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은 불치병을 고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증언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마르 5,25-29).”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며 밀쳐 댔다는 말은, 6장 56절에 연결됩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앞의 3장 9절-10절에도, 군중이 예수님을 밀쳐 대고,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따르면서 손을 댄 사람들도 대부분
‘병의 치유’를 원한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그들 모두가 ‘치유의 은총’을 받았을 것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는
‘치유의 은총’을 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여자 혼자서만 특별히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닌데,
왜 특별히 여자의 이야기만 기록되었을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왜 특별히 그 여자에게만 관심을 보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0-34)”
예수님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일은, 그 여자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진 사람들 모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찾으신 것은 ‘몰라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그 여자 스스로 나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만
특별히 관심을 가지시고, 그 여자만 특별히 고쳐 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여자 자신의 증언을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절망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체험했다.” 라는 증언......
다른 병자들은 병을 고친 뒤에 그것으로 만족하고 떠나버렸지만,
그 여자는 자신이 얼마나 큰 은총을 받았는지를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증언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은총과 사랑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받는 태도’와 ‘받은 후의 삶’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몸의 병’을 고친 것으로 만족하고 그냥 예수님을 떠나버린 사람들 경우,
예수님께서 치유의 은총을 취소하시는 것은 아닌데, 그들 자신들이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하고 끝나게 됩니다.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몸의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따라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이제부터는
더욱 굳은 믿음으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로 해석됩니다.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가 아닙니다.)
여자 자신의 말로 바꾸면, “나는 예수님 덕분에 ‘몸의 병’을 고쳤고,
치유를 통해서 구원을 체험했고, 이제는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다.”입니다.
몸의 치유는 ‘구원의 시작’이고, 영혼의 구원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믿음’을 강조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은총을 받은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수건으로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라고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마르 5,36.41-43).”
“믿기만 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회당장이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당사자인 소녀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을까? 또 예수님을 믿고 있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도 ‘믿음’을 강조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은총을 받은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이 이야기를 ‘믿음’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오해한다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는
더 큰 오해로 이어질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예방하려고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거듭’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며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회당장의 딸이 살아난 이야기는 회당장 자신의 증언이 아니라,
그 일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으로 생각됩니다.
회당장과 그의 딸이 그 뒤에 예수님을 얼마나 잘 믿었는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 뒤의 일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주는 숙제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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