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1월 30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3. 1. 30. 06:08

 

2023년 1월 30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르5,1-20)

 

"What do you want with me, Jesus,

son of the Most High God?

For God's sake I beg you, do not torment me."

He said this because Jesus had commanded,

"Come out of the man, evil spir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언자들은 약속된 것을 얻지 못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군대라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자 사람들은 겁이 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사람이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직장의 한 동료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이런 스트레스가 벌써 1년이나 지속되었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신부님을 찾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1년 동안 그분과 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군요. 그런데 참지 않고 복수해도 그 지긋지긋한 관계는 멈출 수 없을 텐데요.”

복수한다고 상대방이 무서워서 피할까요? 아마 또 다른 방향으로 복수할 것입니다.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됩니다. 따라서 이런 악순환은 누가 되든 상관없이 빨리 끊는 것이 제일 유익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 좁은 생각은 속 좁은 반응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넓은 생각, 긍정적인 마음은 마찬가지로 넓고 긍정적인 좋은 반응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이 악연의 고리를 끊는 것이 유익하겠습니까? ‘나는 안 해!’라고 말하지만, 내가 안 될 것은 또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뻔한 것이라고 하셨지요. 사회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더 인정받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사는 남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특별한 사람이 더 인정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떠실 것 같습니까? 주님 역시 남들처럼 사는 삶이 아닌, 당신이 말씀하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을 더 좋아하시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만나서,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지요. 그래서 나가긴 하겠지만, 산 쪽에 놓아 기르는 돼지 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청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돼지 떼는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맙니다.

한 명의 사람이 더러운 영으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모두 함께 기뻐할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자기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은 속 좁은 생각에 잡혀 있습니다. 한 명의 구원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이 아닌, 자기들의 물질적인 손해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사랑보다 작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속 좁은 마음으로는 주님과 절대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인내해야 하며, 우리 주 하느님께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부활을 희망한 사람들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V2tZUohuYbU

 

-조재형신부-

2시간 정도의 거리는 쉬지 않고 운전하지만 5시간을 넘으면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 쉬지 않고 계속 운전하면 차에도 무리가 오고, 운전하는 사람도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2023년 1월의 끝자락입니다. 이스라엘과 과달루페를 방문하는 성지순례도 2번 있었고, 한국에서 온 신부님과 모임도 있었고, 앨파소에 있는 후배 신부님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정이었습니다. 일정의 중간에 몸살이 왔습니다. 며칠 쉬면서 지내니 몸살은 떠나갔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무 무리한 일정을 만들지 말라는 뜻으로 제게 몸살을 주신 것 같았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주시지 않으시면 그 집을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리라.’는 성경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의욕과 과욕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셨습니다. 모든 악보는 쉼표가 있습니다. 2023년 1월 한 달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께 의탁하면서 마무리 하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중에 아인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는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성모님과 관련된 성화가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구원의 중재자임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모님과 요한 사도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학자들과 성모님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서 화관을 쓰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배와 성모님과 군인이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하였던 군인들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묵주기도의 성모님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호칭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게 더 큰 감동을 준 건 성당 마당에 있던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나는 조각상입니다. 그 만남에서 엘리사벳은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시 마리아여!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마리아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룰 구하신 하느님께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시작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삼라만상 온 우주가 하느님 나라에 담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학과 교리의 예수님을 신앙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가식을 보고 화를 내셨습니다. 백인대장, 소경, 나병환자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나자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슬퍼하셨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듣고 칭찬하셨습니다. 성지순례는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겁니다. 연민과 사랑으로 모든 이를 품어주셨던 예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께서 지고가시는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겁니다.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던 주님께서는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셨듯이, 세상이라는 우물에 머물고 있는 우리에게 구원의 샘물을 주시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는 겁니다.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독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신념과 세상의 것들을 전하려고 한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내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나눔과 비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따뜻해지고, 행복해 질 것입니다.

​악령은 다양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악령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오는데, 마르코 복음 사가는 악령 들린 사람의 참혹한 실상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전개되는 스토리 역시 기괴하고 특별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인간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거처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무덤은 산 사람이 거처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곳입니다. 그는 아마도 빈 무덤이나 무덤 사이에 굴을 파서 그 안에서 잠을 잤을 것입니다.

 

악령 들린 이 사람은 얼마나 힘이 세고 난폭하던지 사람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큼만 나면 손에 잡히는 데로 부숴버리기 일쑤였고 여러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힘센 장정들이 여럿 달려들어 그의 몸을 쇠사슬로 칭칭 감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힘이 장사였던지 쇠사슬과 족쇄도 끊어버렸습니다. 그는 괴물 같은 존재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멀찍이 피해 다녔습니다. 악령 들린 그 사람은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 역시 가급적 사람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민가와는 멀리 떨어진 산이나 광야, 무덤가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악령 들린 사람들이 가끔 현실로 돌아올 때도 있다지요. 그럴 때마다 참혹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억울함과 비참함을 달래기 위해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울며불며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에 비친 기괴한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며 이게 과연 사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은 게 더 낫다며 자해행위도 했을 것입니다. 머리를 바위에 부딪치기도 했고 큰 돌로 자신의 몸을 치기도 했습니다. 악령으로 인해 그의 미래는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객사, 아니면 동사, 아니면 자살...

 

이렇게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악령 들린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권능의 예수님과 마주칩니다. 악령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신 것을 보고 벗어날 길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이유로 완전히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소리로 외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예수님의 기에 완전히 눌린 악령들은 완전한 무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특별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령이 하느님의 능력과 위엄에 호소하며 자신의 거처인 악령 들린 사람에게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지옥의 괴로움 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외치시며 악령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악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악령의 이름은 독특하게도 ‘군대’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로마 군대는 6826명의 군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 안에 6826마리의 악령이 붙어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아니라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가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악령들은 수가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똘똘 뭉쳐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악령들을 쫓아내시어 근처에 있는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천 마리나 되는 악령 들린 돼지 떼들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려 달려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악령들과 당당히 맞서시며, 악령 들린 사람에게 다시 한번 생명을 부여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악령들을 바라봅니다.

 

악령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비약적인 경제성장 그 이면에 깃들어진 죽음의 문화가 곧 악령들입니다. 부익부빈익빈의 현실, 집단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왕따 현상, 성매매, 마약, 자살에의 유혹...

 

이 모든 악령들이 우리 주님의 권능과 자비에 힘입어 하루 빨리 사라지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이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인데,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돌풍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습니다. (마르 5,2)

그러나 이제 그에게서 영들의 군대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마르 5,15) 있었습니다.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은 더러운 영에 들렸던 왜곡된 인간성을 버리고 이제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는 것,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되었다.’(에페 4,21-24)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둠은 빛을 반기기보다 오히려 배척하고 저항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마르 5,19)

이렇게 그는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마르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푸신 일”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일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