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1월 29일 연중 제4주일

Margaret K 2023. 1. 29. 06:45

2023년 1월 29일 연중 제4주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1-12)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분노의 날에 이스라엘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라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시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시어, “행복하여라!” 하고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선언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저는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이 꽤 많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저이지만 스키도 또 골프도 이제까지 해 본 적이 없어서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을 부러워할까요? 굳이 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부러움도 없고, 못한다고 해서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전혀 하지 못하지만, 꼭 해 보고 싶은 것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토바이 타는 것입니다.

특히 쿠바 혁명가인 체 게바라가 젊은 날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대륙을 여행했었다는 글을 읽으며 나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 오토바이 위에는 단 한 번도 올라가 본 적도 없습니다.

전에 살았던 강화도에서는 종종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며 어렸을 때의 소망이 떠오르면서 부럽기도 하면서 또 그들이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그들과 나란히 신호대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차림새였습니다. 오토바이 타는 한 사람을 볼 때는 멋있었는데, 똑같은 차림새에 개성이 전혀 보이지 않아 실망한 것이지요.

남만큼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남을 쫓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보다 자기 개성을 드러내며 자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훨씬 더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모두 다르게 창조하신 하느님 뜻에 어떤 삶이 맞을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어렵고 힘들어도 나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처럼 사는 삶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 역시 옳지 않습니다. 자기 고유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의 삶,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행복 선언’을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굶주리는 사람,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주님만을 바라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며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있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만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십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과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참조). 그렇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관점이 아닌 주님의 관점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향한 관심을 기울이는 날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가난한 이들과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가 될 것을 다짐하고 또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과연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다시금 묵상하면서 사랑하며 사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과 연민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사랑과 연민이 없으면 인류는 생존할 수 없다(달라이 라마).

​이것만 대답해주면 지금 너의 행복 수준이 얼마인지 알려줄게!

-전삼용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7rehJXGfAYY

 

저는 어릴 적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경험하며 덕분에 ‘행복’이란 목표를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두려웠던 죽음의 공포가 행복하니까 줄어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더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진복팔단, 곧 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뉩니다. 동물-인간-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각 존재는 자신이 행복이라 믿는 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여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사이먼 시넥의 골든 서클 이론입니다. 인간의 뇌는 이유(Why) - 방법(How) - 목적(What)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마음의 영역이고, 방법은 이성의 영역이며 목적은 육체의 영역입니다. 사람에도 깊이가 있는데 동물과 같은 사람은 목적을 먼저 생각하고 영적인 사람은 이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유가 중요한데, 동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동물이라 믿습니다. 곧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나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사람은 내가 왜 마음이 가난해야 하는지, 내가 왜 슬퍼해야 하는지, 내가 왜 온유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당해야 하는지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그저 생존이기 때문입니다.

 

상어는 사람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어는 그저 생존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기처럼 무조건 내 앞에 있는 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구별하기 위해 덥석 물어보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배를 채울 필요가 없거나 맛이 없으면 물었다가도 그냥 놓습니다. 만약 그런 존재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반드시 “나는 나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나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배만 곯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채워야 할 행복의 정도가 그저 동물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분류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구분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노숙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면 근처에 그분들이 거저 숙박을 할 수 있게 나라에서 만든 시설들이 존재합니다. 거기 가면 이슬을 맞지 않아도 되고 따듯한 물도 나와서 몸도 씻고 빨래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밖에서 얼어 죽을망정 그곳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일까요? 나의 자유를 침해 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인데 타인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지만 않는다면 밖에서 떨면서 자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만약 노숙자로 살면서 살기 힘들고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런 분들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누구의 아빠”, “나는 누구의 남편”, “나는 누구의 딸”이라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이유(why)가 나가 아니라 타인이 되어버린 결과입니다. 타인이 자신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 안에 들어오려면 그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내가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나는 부모의 자녀가 됩니다. 저는 부모의 굳은 살을 보면서 내가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녀로 살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부모의 마음이 아픈 것을 보면 나도 행복하지 않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럴 때 인간의 행복 정도에 오릅니다.

 

행복은 이제 생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누군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하지만 나만을 만족시키던 동물적 행복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행복을 느낍니다. 이런 사람이 먹고 마시고 돈이나 명예욕으로 살아가는 동물적 인간을 볼 때는 불쌍함을 느낍니다.

7조 원의 재산을 모았지만, 결국 사형을 선고 받은 한룽 그룹 류한 회장은 다시 태어나면 그저 가족과 함께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죽기 전에 비로소 가족의 행복이 동물처럼 생존을 위한 행복만을 좇을 때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만약 세속-육신-마귀의 욕망 추구가 행복이라 여기는 이가 있다면 아직 동물적 행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물론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가족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화 ‘정이’(2023)에서 내용 상 안타까운 것은 딸이 사이보그 엄마를 풀어줄 때 자신에 관한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존재는 “나는 나”로 살아갑니다. 생존만이 행복이고 돈과 음식과 힘만이 행복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보그 엄마는 죽더라도 딸을 위해 싸울 때가 더 행복했습니다. 딸은 엄마에게 그 행복의 가능성을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행복하다 할 수 있는 이유는 동물보다 더 뜨거운 가족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자녀 행복의 수준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실 나의 ‘이유’(why)를 다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나는 가족을 위해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이 나를 존재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다시 눈을 만들어주고 생명을 되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존재 이유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자동차의 존재 이유가 자동차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부모도 존재하게 만든 창조자가 나의 존재 이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바꿔주러 오셨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살과 피가 되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하는 성체가 바로 하느님의 피 흘림임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거하게 되시고 이제 나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하느님만 있으면 되니 이 세상 것들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게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슬퍼집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인데 하느님의 자녀 수준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고 다른 수많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 믿지도 않고 그저 인간으로, 혹은 동물로 살아감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온유합니다. 자기 힘으로 하느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하거나 화낼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의로움에 주립니다. 오직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움만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자비롭습니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또한 마음이 깨끗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됩니다. 세상의 생존 법칙에서 벗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박해를 받습니다. 다른 이들은 다 자기를 나라고 하고 누구의 자녀나 남편이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은 자신을 하느님이라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교만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쁘고 행복합니다. 나의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복권에 당첨되어 이제 돈을 바꾸기만 하면 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것만 대답해주십시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행복은 우리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 믿음이 내가 어떻게(how) 살아야 하는지 알려줄 것이고 무엇을(what) 해야 하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삶이 육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시작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사는지 생각해봅시다. 나를 기쁘게?, 가족을 기쁘게?, 하느님을 기쁘게? 이것이 나의 행복 정도를 말해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v35LqksQJXw

 

​-조재형신부-

엠이 부부모임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에 대한 나의 느낌은?’이라는 주제로 나눔을 하였습니다. 함께 했을 때의 기억들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여행을 갔을 때, 식구들과 한 침대에서 누워있을 때, 손자가 태어났을 때와 같이 작고 소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행복과 행운’의 차이를 읽었습니다. 4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행운은 쉽게 찾지 못하고,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복권을 사지만 당첨될 확률이 적은 것과 같습니다. 3잎 클로버는 행복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돌아보면 행복은 쉽게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숨을 쉴 수 있는 공기와 같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물과 같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행운’은 많지 않았습니다. 외모와 체격이 크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선천적으로 운동신경이 발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술적인 감각도 별로 없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거의 문맹과 같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행복’은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4년 전에 이곳 뉴욕으로 왔는데 다정한 친구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는 동료사제들이 있습니다. 새해 첫날에는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무덤 성당과 부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축복도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조배하러 가니 수사님이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 또한 행복입니다. 매주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에 가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기쁨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3달만 도와주려고 했는데 어느덧 3년이 되었습니다.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지금은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긴 터널을 교우들과 함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듯이,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어울려 미사를 봉헌할 때가 행복합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켜주는 직원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매주 새로운 지면을 만드는 것은 때로 전쟁과 같습니다. 직원들이 함께 하기에 부족한 제가 잘 지낼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채워서는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참된 행복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루가 복음 19장을 보면 예리코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자캐오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리 자캐오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허전하였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캐오를 무시하였고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를 부르셨고, 자캐오의 집에서 하루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자캐오는 자신의 가진 재물의 반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또 자신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세리 자캐오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캐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고 불쌍한 이들을 보살펴 주고 도와주며 그들과 하나 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우리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의무이며, 그와 같은 삶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로 우리를 초대한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참된 행복을 얻는 것은 지위, 능력, 가문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무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자캐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다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의 이정표를 보면 안심하고 갈 수 있듯이, 우리들의 이정표인 주님을 바라보며 행복의 길,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충실하게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영근신부-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행복하기를 바란다.

...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갈망한다 해도 유일한 목표는 행복이다.”

그런데 진정한 ‘참 행복’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값지고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록펠러는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느냐?’는 질문에 “1달러라도 더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욕망과 애착을 채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까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첫 번째 참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태 5,3)

한편, 삶에는 결핍과 슬픔이나 고통이 끝없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행복의 반대는 이러한 결핍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생기 없는 무기력함과 무감각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결핍과 슬픔과 고통은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은 생기 있는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살아있을 때일 것입니다.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자아의 깊은 곳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자리요, 존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으로, 비록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어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하늘나라의 성취에 대한 예언자적 선언이며 축복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고,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하느님이 버린 결과로 비참하게 된 이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고 적음, 배부름과 배고픔,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가 가난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비록 우리가 가난하지만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슬퍼할 줄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죄를 슬퍼하되 이미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쁘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온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있어야 할 하느님 품 안에 있기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진 까닭입니다.

우리가 진정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하는 이유는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에 그분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은 까닭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이요, 진정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요,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일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란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삶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바로 이때 필요한 한 가지는 물론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내용은 같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실현하는 것, 곧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주님을 모심으로써 행복하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날이 많이 춥습니다. 마음만은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행복에로 초대하십니다. 이 시간 참된 행복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 430억원, 건강과 바꿀 수만 있다면’이라는 제목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많은 돈을 얻는 행운을 쥐었지만, 건강을 잃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으며 감사의 마음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돈은 나에게 슬픔만 가져다주었다. 내 인생을 파괴했다.” 고 말한 뒤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많은 재물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전주의 87세된 김소관 할머니는 시장에서 잡곡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십니다. 하루 벌이가 1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3,000원을 꼬박꼬박 ‘자선남비’에 넣었다고 합니다. “늙은 나이지만 일을 해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행복”이랍니다.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소유와 지배를 통해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거기서 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서 옵니까? 참된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행복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인간 내면의 욕구 충족 상태, 만족한 삶입니다. 우리는 소유, 지배, 사랑 중 어느 것에 만족을 추구해야 할까요? 사랑입니다.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덟가지 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간략하게 묵상해 보겠습니다.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분께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베푸는 마음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또 주고 싶은데 더 줄 것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의 상태가 마음의 가난입니다.

 

여러분은 가족을 위해 또 이웃을 위해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건강도 없어서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이 없다고 하더라도 줄 수 있습니다. 기도로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봉쇄수도원에서 일생 기도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줄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남의 도움 없이 살 만큼 큰 부자도 없습니다. 마지막 장례를 스스로 치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했습니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고 공명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 그 이면에 있는 사랑을 생각하며 나도 그러한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자기의 죄에 애통해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3. 온유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온유는 흔들림이 없는 상태입니다. 단순한 부드러움이나 따뜻함이 아닙니다. 어떤 처지나 상황 여건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하느님 편에서 평상심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해보면 금방 압니다. 마음 안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면, 외풍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구누구 때문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성당에도 그룹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파’가 있습니다. 바오로파 아폴로파, 대파, 실파, 양파, 쪽파....있듯이 신부파, 수녀파, 회장파...사람을 따라가며 끼리끼리 뭉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4. 의로움에 주린 사람은 행복합니다. 진선미를 갈망하며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순명하고, 금식을 통해 마음을 비우며 욕망의 절제로 재물을 이웃과 나누는 실천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성경의 요셉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약혼자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당시의 법대로 하면 마리아는 돌팔매질로 죽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으로 배려했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메시지를 따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5.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잘못이 무엇이든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도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고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행위야말로 자비로움의 절정입니다. 요한사도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지니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며 혹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곧 용서를 청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합니다.

 

7.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평온한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많은 순교성인 성녀들은 박해와 죽음 앞에서 마음이 시끄러웠을까요? 혼란스러웠을까요? 그들은 평화로웠습니다.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증거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차지했기 때문에 육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내 마음의 욕망과 무질서, 불의와 미움을 거두고 화해를 전해주며 갈라진 사람을 맺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8.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진리를 증거 하다 보면 기득권의 반대에 부딪히고 미움을 사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진리 안에 머물게 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지금의 순간을 모면하려고 하면 더 큰 것을 놓치게 됩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모욕과 중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의로움은 단순히 정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따라서 사랑 안에서 나오지 않은 정의는 진리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조카들이 있는데 큰 조카는 서울의 유명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가 학과 대표직을 맡고 정의구현에 앞장섰던 때가 있습니다. 그는 데모하는 학생들의 앞에 섰습니다. 그것도 몽둥이를 들고. 어깨도 다쳤습니다. 결국은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고 저는 삼촌으로서 그에게 반성문을 요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판사를 찾아가 사정하며 제가 교육을 잘하겠다고 해서 옥살이를 면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몽둥이를 들었으니 폭력이지, 어찌 정의구현을 하겠습니까? 의로운 방법으로 의로움을 구해야지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어찌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의로움은 사랑 안에서 나온 상대를 위한 배려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 알게 모르게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주님께 매달리고 의탁하여 행복을 지켜야 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차지하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늘의 큰 상이 우리의 것입니다. 한 주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써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항상 행복하십시오.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정진석 추기경).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

-송영진신부-

산상설교에 있는 ‘참 행복 선언’ 말씀은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의 ‘행복’은

일반적인 의미의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 안식, 기쁨, 생명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참 행복’입니다.

‘구원’은(‘참 행복’은)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신앙인의 삶’은, ‘참 행복’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의 삶’의 시작이고, ‘그 삶’을 미리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0-12ㄴ).”

 

이 말씀에서 ‘의로움 때문에’ 라는 말과 ‘나 때문에’ 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의로움’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고,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로움 때문에, 또는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종교박해를 받아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모욕, 거짓말, 온갖 사악한 말’은

박해자들이 신앙인들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방법들입니다.

여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라는 말씀은, 박해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것과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되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모욕, 박해, 거짓, 온갖 사악한 말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기쁨의 원인이 되기는커녕 참기 힘든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박해 너머에 있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이고, 나중에 누리게 될 그 영광을 생각하면서

지금 받는 박해를 참고 견디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박해만 보이고,

하늘나라의 영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신앙인들을 어리석고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그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사도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41-42).”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라는 말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함으로써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사도들이 박해를 받았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더욱 열성적으로 복음을 선포했다는 점입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차지한다는 믿음과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열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온유’와 ‘자비’는 ‘박해에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또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앙갚음하지 않는 것, 박해자들의 악을 사랑이라는 선으로

물리치는 것, 그리고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온유’와 ‘자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스테파노가 순교했을 때, 만일에 당시의 신자들이 박해자들에게

앙갚음했다면, 즉 박해자들을 심판한다는 명목으로 박해자 사울을

제거했다면, 우리는 위대한 사도 바오로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앙갚음하지 않고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 가르침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마음의 가난함’과 ‘마음의 깨끗함’을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재물의 힘’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을 제대로(온전히) 받으려면, 마음속에서 탐욕을 버려야 하고,

재물에 대해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