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8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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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 4,35-41)
he rebuked the wind and ordered the sea,
"Quiet now! Be still!" The wind dropped
and there was a great calm.
Then Jesus said to them,
"Why are you so frightened?
Do you still have no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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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 스라엘 역사의 신앙 전통은 하느님의 약속에 믿고 참여한 성조들은 영원한 것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서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의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제1독서).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신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성조들이 믿음으로 고대하였던 세계를 당신을 통해 직접 보게 하셨다. 자연의 풍랑도, 공안 선풍의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도 모두 예수님 권능의 말씀 한마디에 복종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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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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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는 행동한 것에 대한 후회가 큽니다. 그러나 50대를 넘어서면서는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2배 이상 많다고 합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켈로그 경영 대학원 양 왕 연구팀은 신참 과학자들이 국립 보건원에 제출한 연구 보조금 신청서를 조사했습니다. 연구팀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기준선에 걸친 신청서 1,000장을 검토했습니다. 15년 동안 지원자의 절반이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깝게 떨어진 이들은 작은 차이로 보조금을 받지 못함에 크게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앞서 미세한 차이로 보조금을 받지 못한 과학자들이 보조금을 받은 과학자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냈다는 것입니다. 주목받는 논문도 보조금을 받지 못한 과학자들이 21%나 더 높았습니다.
후회가 실패를 돌아보게 했던 것입니다. 이 후회의 핵심은 ‘성찰’이며, 후회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단서가 숨어있었습니다.
행동한 것에 대한 후회보다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실패의 행동이 되더라도 더 나은 성장의 가능성은 행동하는 것 자체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후회가 되더라도 우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한 뒤에 포기하고 좌절에 빠진다면, 성장의 가능성도 그 순간에 바로 닫히게 됩니다.
행동할 수 있는 용기는 주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또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기에 분명히 행동하는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십니다. 피곤하셨는지 뱃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십니다. 그런데 거센 돌풍이 일어서 배 안에까지 물이 가득 차게 되지요. 뱃사람이 많았던 제자단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워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위험한 상황임을 깨닫고 있어서 ‘죽음’까지도 떠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때 그들이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워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냥 걱정만 하면서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걱정하고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깨워 함께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인생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 것,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일어서 보지도 못하는 사람의 비극이 진짜 비극이다(아널드 베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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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성지순례를 마치고 뉴욕에서 아침으로 ‘곰탕’을 먹었습니다. 며칠 한국음식을 먹지 못해서인지 곰탕의 구수한 육수와 김치 그리고 깍두기가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민족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유전학적인 분류가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DNA는 인류의 시작과 지금까지의 여정을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도 DNA 검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정학적인 분류도 타당한 방법이 됩니다. 저는 한반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들으면 동질감을 느낍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분류방법입니다. 교포 2세들 중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어색한 점이 있습니다. 저는 음식도 민족을 분류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외국에서 살지만 입맛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4년간 살면서 음식 때문에 불편한 적이 없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한국음식’을 한국음식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트에서도 한국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먹방’이 인기 있는 것도 ‘미각’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사제’이기 때문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사님은 무덤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서는 예수님 탄생을 표시하는 곳에서 경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숙소에서도 사제이기 때문에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임을 알 수 있는 방법도 몇 가지 있습니다. 교구에서 발급해준 ‘사제신분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사제신분증을 보여주지 않아도 제가 사제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 모든 사제들이 함께 입는 ‘사제복’입니다. 사제복에는 ‘로만칼라’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작고 하얀 로만칼라는 제가 사제임을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공항에 내려서 이민국 심사를 받을 때도 사제복을 입고 있으면 심사원이 ‘신부님!’이라며 인사하곤 합니다. 예전에는 사제복이 거북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제복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을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사제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어색할 때도 있었습니다. 32년 사제로 지내보니 사제복이 제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미각이 쉽게 변하지 않듯이, 사제는 사제복을 입을 때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수학과 과학에는 ‘공리’가 있습니다. 공리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증명하거나,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리라는 터전 위에 수학과 과학이라는 탑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종교인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증명과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은총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배움과 탐구의 영역이 아닙니다. 믿음은 관념과 사유의 영역이 아닙니다. 믿음은 실천이며 행동의 여정입니다. 사제라는 직분이 믿음에 도움을 주겠지만 실천과 행동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질책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에는 ‘믿음’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족, 부족, 민족은 ‘믿음’이 없으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신용’이라는 뿌리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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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우리 배 안 어딘가에 주님께서 반드시 현존하고 계십니다!
-양승국신부-
오랜만에 공동체 소풍차 타이타닉호 비슷한 배를 타고 물 건너왔습니다. 배 안에 식당도 있고, 편의점도 있고, 노래방도 있고 제 눈이 다 휘둥그레졌습니다.
목포에서 출항할 때만 해도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더니, 제주 가까워지니 엄청난 바람과 높은 파도에 엄청난 규모의 배조차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얼굴도 노래지고 불안해지는 분위기였습니다. 지나가는 어선을 보니 얼마나 위태로워 보이던지요.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던 제자들도 비슷한 상황을 맞이합니다. 엄청난 돌풍을 만나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치게 됩니다.
참으로 절박한 순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당황스러웠던 제자들은 이러다 죽은 것 아닌가 싶어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배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의 앞부분을 이물 혹은 선수(船首)이라고 하고, 뒷부분은 고물 혹은 선미(船尾)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다들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배의 뒤쪽에 누우셔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천하태평 예수님의 탁월한 유머 감각이 다시 한번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볼맨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코 복음 4장 38절)
제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삼라만상의 주인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있는데도 제자들은 목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미성숙과 불신앙, 몰이해와 두려움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느릿느릿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호수를 향해 외치십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코 복음 4장 39절)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조금 전 집채만한 풍랑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당신을 향한 믿음도 부족하고, 이해의 폭도 넓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크게 나무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코 복음 4장 40절)
폭풍을 잠잠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이 그분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옛날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겪었던 체험을 고스란히 겪게 됩니다. 이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여정 안에 높은 풍랑과 파도를 수시로 겪게 됩니다.
폭풍우가 다가올 때 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흔들리는 우리 배 안 어딘가에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로 아니 계시는 듯 하지만, 반드시 우리들의 여정에 함께 동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시련의 높은 파도나 고통이 다가올 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점 한가지!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시련 여부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 주님은 우리 앞에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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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
-반영억신부-
무서운 꿈을 꾸었다며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무엇을 무서워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 꿈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결정적으로 위기 앞에서는 주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 안에 있었는데 마침 거센 돌풍이 일었습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이쳐서 위험에 처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하소연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을 드러내 줍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지만, 사실은 깨어나야 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실 능력의 주님과 함께하면서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이 연약한 믿음의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탄 것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동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풍이라는 환난이 옴으로써 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돌풍을 통해서 믿음의 현주소를 보았다는 것이 은총의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돌풍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 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와 함께 죽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나와 함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인생여정에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으며 폭풍우가 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잠잠해 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능력을 지니고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따라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을 키워야 합니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 5장 7절에는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선언하였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옆에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밤이란 악마가 활동하는 시간이고, 깊은 물과 풍랑은 생명을 위협하는 혼돈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종종 악의 세력이 거센 풍랑처럼 우리를 위협하여 혼란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역경이 폭풍처럼 휘몰아칠 때 우리는 혼자라는 생각에 더욱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손희송). 시련과 역경 속에서 주님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곁에 함께 계심을 굳게 믿고 그분께 끊임없이 간청하면서 매달립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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