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교육받은 철저한 유다인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한 뒤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신하였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마르코 16,15-18)
"Go out 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The on e who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the on e who refuses to believe will be condemned.
Signs like these will accompany
those who have belie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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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백성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신자들을 박해하던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을 전하는 증인이 된 사연을 들려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하고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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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좋은 인간관계? 직장에서 좀 더 많은 권한과 자유? 더 나은 새 직장? 좀 더 자상한 배우자? 아기의 탄생? 회춘? 공부 잘하는 자녀? 질병이나 장애의 치유? 더 많은 시간?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알아내는 것? 등등….
대부분 이런 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의 연구 결과는 이런 요소들로는 행복해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점에서 볼 때,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마틴 셀리그만 교수는 우울증 환자에게 행복감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그날 있었던 좋은 일 세 가지씩을 기억해서 적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94%가 증세의 호전을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찾는 첫 단계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에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좋은 일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즉, 일상의 삶 전체가 자기 행복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열정을 키우는 것입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소로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 의지적 활동을 뽑습니다. 이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50%의 유전적 요소입니다. 그리고 의지적 활동이 40%, 환경적 요소가 10%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인 60%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40%인 의지적 활동으로 나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침팬지와 99% 유전자가 같지만 다른 1%의 유전자의 차이로 침팬지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40%라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비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바꿀 수 없는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에 계속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의지적 활동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행복을 일상 삶 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지요.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지만, 회심한 뒤에 열정적으로 주님을 세상에 선포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의 주님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는 사도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에 매여 있지 않고, 의지적 요소에 열중해서 주님을 굳게 믿고 따랐기에, 하느님 나라에서 큰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의지적 요소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듯 진정한 회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에 매이지 않고, 열정을 다해 자신의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만족을 알면 세상이 넓어지고, 욕심을 부리면 우주도 좁아진다(증국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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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신부님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면서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지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물렀던 ‘Notre Dame of Jerusalem Center’는 주님의 무덤 성당에서 가까웠습니다. 매일 새벽 성지에서 조배하고 미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주님의 무덤 성당으로 찾아갔습니다.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의 눈빛은 경건함과 진실함으로 빛이 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빈 무덤을 향해서 달려갔던 것처럼 신부님들과 함께 무덤성당을 방문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순례의 여정 중에 신부님들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부님들의 열정과 경건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4명이 왔기 때문에 단체로 오면 가기 힘들었을 성지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들이 기도하였던 ‘St. George's Monastery’를 순례하였습니다. 자동차의 바퀴가 4개이기 때문에 자동차는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것처럼 함께했던 4명의 신부님들이 모두 주님께로 가려는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순례의 피곤함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사제가 된 신부님이 이런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신학생 때 교구장님과 대화할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신학생이 교구장님께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주교님, 신학교의 규칙을 완화하면 더 많은 신학생들이 사제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주교님께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교구장님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10사람의 불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10사람의 교만한 사제는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10사람의 욕심 많은 사제는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불성실과 교만 그리고 욕심을 비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본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성장시킵니다. 한 사람의 겸손한 사제는 공동체에 큰 위로를 줍니다. 한 사람의 청빈한 사제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합니다.” 그러자 신학생은 규칙을 잘 지키는 신학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업에서도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여러 상품이 아닙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특정한 상품이 매출을 선도합니다.
지난 12월 31일에 선종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이러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문제는 신자 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기에 위기가 생기고, 기도와 전례에 대한 미지근한 태도가 나타나며, 선교를 등한시합니다. 참된 개혁은 토착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개혁은 내적인 각성, 불타오르는 마음입니다.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할 일은 그리스도께 대해 확실히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타협과 무기력과 같은 모든 유혹에 맞서 하느님 말씀의 위대함과 순수성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과 계명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다. 세상 끝날 까지 율법과 계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에 친교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경건함이 없는 친교는 참된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성지순례인지 여행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면 그것은 이미 성지순례가 아닙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몇 번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방인을 위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과 헌신은 사도행전과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본과 재물에 대한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세상과 타협하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권력이라는 우상을 섬기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내 안에 있는 나태함과 교만을 끊어내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 대한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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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도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회심이 필요합니다!
-양승국신부-
초세기 교회의 성장과 관련해서 바오로 사도처럼 큰 기여를 한 인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여러 방면에 끼친 영향력은 예수님의 12 직제자 그룹 전체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토록 위대한 인물이요 대성인인 바오로 사도에게도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한때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 섬멸의 선봉장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가서 철저하게 색출해내고야 마는 유다인 중의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날도 다마스쿠스란 도시에 그리스도교인들이 비밀집회를 지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기탱천한 그는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자신의 애마(愛馬)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말달리던 어느 순간 그는 갑작스런 몸의 이상증세를 느끼며 낙마(落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강골이었던 그는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체험과 동시에 두 눈이 멀어버리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인생의 밑바닥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갑작스럽게 닥쳐온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와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생일대의 전환점, 다시 말해서 회심의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사실 ‘바오로’라는 이름의 뜻은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당시 하층민들이나 종들이 애용하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원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란 ‘크고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가에서나 사용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위풍당당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낙마한 후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면서 바오로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스스로를 귀족, 잘 나가던 사람으로 여겼던 사울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체험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아, 정말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구나. 티끌이요, 종이요, 작은 자, 무(無)였구나.” 하고 깨우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란 의미의 바오로로 바꾼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으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낙마(落馬)한 바오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렇게 예수님을 박해하던 그였는데, 그 역시 3일간의 깊은 바닥 체험 끝에 그의 내면에서는 심오한 삶의 이동, 결정적인 회심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박해자에서 바오로 사도로 새로이 태어났습니다.
악질 중의 악질 고발자였던 사울이었는데 이제 베드로 사도 못지않은 사도가 되어 우리 교회를 든든히 뒷받침하고 계십니다. 그토록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못살게 굴며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이 모든 것들을 다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태생적 한계, 근원적 결핍으로 인해 수시로 죄와 악습, 하느님으로부터의 멀어짐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우리이기에 수시로 되풀이해야 할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회심입니다. 한번 두 번, 열 번의 회심이 아니라 천 번, 만 번의 회심, 매일 매 순간 우리 삶의 심오한 이동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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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소명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비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유대 군중에게 자신의 소명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열성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골수분자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음을 말합니다.
곧 다마스쿠스로 인도되어 하나니아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때 하나니아스는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 22,14-15)
이 말 속에는 신앙생활의 원리가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곧 바오로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한 바람에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는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삶을 신앙생활의 원리로 삼아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그분이 들려주시기에 들을 수 있고, 보여주시기에 볼 수 있고, 깨우쳐주시기에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듣고 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파견한 분에 속한 이가 우리의 신원이요, 파견한 분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복음 전파가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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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은 방향전환」
-반영억신부-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를 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필리3,13). 아마도 지난 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 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 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향을 가려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바쁘게 서두르다가 그만 목적지와는 다른 방향의 차를 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차를 갈아 탈 생각은 하지 않고 기차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고, 노약자를 도와주고,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사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그의 선행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종착역은 그가 목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기차 안에서 선행을 베풀 것이 아니라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습니다.
회심은 바로 방향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교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방법으로 더 분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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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 비 』
-송영진신부-
예수님의 기적들 가운데에서
가장 놀랍고 가장 위대한 기적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이고, 핵심이고, 중심입니다.
그다음으로 놀라운 기적은 사도들의 변화입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자신들의 인생과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들의 증언과 선포로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된 일도 ‘사도들의 변화’ 라는
기적에 속한 일이고, 예수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활동으로 그리스도교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고,
그의 활동은 온 세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만 보면, 박해자 사울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갑자기’ 변화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의 회심이 정말 그렇게 갑작스럽게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을까?
자신의 자유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마치 전쟁에서 붙잡혀서 포로가 되는 것처럼 된 일이었을까?
물론 바오로 사도 자신은 그렇게 말하기는 합니다.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9,16-18).”
이 말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에게 붙잡혀서 억지로 사도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유와 권리도
모두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 말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라는
말은, 선교활동은 자신이 행복해서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삯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가
기쁨이고 삯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고, 그것을 찾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5).”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고, 찾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 1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1티모 1,12-16).”
여기서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라는 말은, ‘바오로’ 라는 사람이
사도가 될 만한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즉 준비되어 있음을
예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몰라서
한 일이라는 뜻인데, ‘참된 구원’을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말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인들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이라는 말은, 자기가 한때
박해자였음을 고백하는 말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크게 갈망했던 사람이었다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보기’로 삼으려고 바오로 사도를 선택하셨다는 말은, 그렇게 큰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왜 하필이면 박해자 사울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바오로 사도 자신의 답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래 바리사이였습니다(필리 3,5).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바리사이들과 같은 위선자는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진리를 찾는 열성적이고 경건한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선 것도 그의 열성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그는 그것이 구원의 진리를 찾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의식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마음속에 어떤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랬는데 스테파노 순교자가 순교 직전에 했던 설교와
순교 모습이 하나의 씨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이 바로 그 씨에서 싹이 트는,
즉 박해자가 사도로 변화되는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회심 뒤의 과정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갈라 1,16ㄴ-18).”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을 받은 뒤에도 갑자기 사도로 나선 것이 아니라,
삼 년 동안 아라비아 사막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면서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준비된 사람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응답을 실행하게 됩니다.
구원의 은총은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응답하고 실천하는 생활을 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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