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4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지역에서 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났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특히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심시켰다.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602년 교구장이 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에 선종하였다.
☆☆☆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코 3, 31-35)
And looking around at those who sat there he said,
"Here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Whoever does the will of God is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to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남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는 평생 살아가면서 이혼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또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어떨까요? 그런데 어떤 연구 결과를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도 평생 살아가면서 200번 정도 이혼을 생각하게 되고, 또 50번은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극도의 혐오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부부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될까요? 바로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질 때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삶 안에서 고통과 시련도 커지게 됩니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부부는 두 사람이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였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미련한 사람은 상대방을 적으로 여겨서 항상 결점을 없애려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을 전우로 여기고 기쁨을 함께 나누며 함께 어려움을 짊어집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지혜가 가득해야 합니다. 이 지혜는 자신이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지혜롭고 완전한 사람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모습도 받아들이면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생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삶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요구하는 삶이 아닌,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하는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내게 요구하는 사람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마르 3,22).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친인척이 찾아왔으니 다른 것을 다 뒤로 하고 먼저 만나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군중이었습니다. 영적 갈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육체적으로도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진정한 형제, 누이,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요구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요구를 들어주는 삶을 살고 있나요?
사랑하는 것은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이다(카렌 선드).
오늘 복음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지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라고 하시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35)
물론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따른 사람이 없기에 성모님만큼 완전한 그리스도의 가족은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에겐 핏줄보다 강한 가족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을 그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발견함으로써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려면 예수님의 이 시선을 배워야 합니다.
위대한 형제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잭 캘리라는 한 신문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겪은 체험담이 있습니다. 기자 일행이 수도 모가디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기근이 극심한 때였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기자는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배가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으며 피부는 백 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 기자가 과일 하나를 갖고 있었기에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 힘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서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사내아이가 땅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 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 온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형은 왜 동생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일까요? 부모가 같다는 이유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없어도 부모에게 효도하려 합니다. 받은 것이 있기에 나오는 의무감입니다. 이것이 형제간의 사랑을 만들고 가족을 만듭니다. 형은 사실 동생 안에서 부모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형이 동생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일은 없습니다. 형제들은 형제 안에서 부모의 유전자만 발견이 되면 이렇듯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유전자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우리 아버지의 유전자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또 사랑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만약 부모를 사랑하면 형제를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도 성당에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정말 나의 형제요 자매로 생각하고 부르는 것일까요? 어쩌면 친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뜻은 양식을 통해 들어옵니다. 양식을 함께 먹으면 식구가 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성당 형제자매들이 혈육의 형제자매보다 덜 형제자매 같다면 어쩌면 우리는 양식을 제대로 먹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 곧 말씀과 성체는 우리가 같은 유전자(DNA)를 지닌 형제들임을 확증해 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족처럼이 아닌 가족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화 ‘과속 스캔들’(2008)은 잘나가던 서른여섯 은퇴한 아이돌 스타에게 스물두 살 딸, 그리고 그녀에게서 난 여섯 살 손자가 함께 찾아오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았습니다. 차태현은 아직은 잘나가는 연예인이자, 청취율 1위의 인기 라디오 DJ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10대에 사고를 쳐서 자녀가 있고 이미 할아버지라 한다면 그의 인생은 거기서 끝입니다. 그는 딸과 손자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잃을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DNA 검사 결과 친자가 확실한 이상 자기가 살겠다고 딸과 손자를 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는 모든 인기를 포기하고 결국은 가족을 선택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느닷없이 나타난 아이들의 DNA가 자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차태현도 부모로부터 양식을 먹고 컸기 때문에 부모의 뜻이 그 안에 있어서 자기 뜻대로 양심상 할 수 없습니다. 형제가 서로 싸운다는 말은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서로 갈라져 싸우는 이유는 서로 같은 DNA를 부모로부터 받았음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 부모까지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같은 하느님의 성체 성혈을 받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처럼 지내려 노력하지 말고, 가족임을 인정합시다. 한 아버지를 둔 우리들은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고 그래서 부모가 되신 하느님의 뜻이 같은 유전자를 지닌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힘으로는 생겨나지 않던 사랑의 감정이 생깁니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 혹은 하느님의 유전자, 하느님의 뜻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온전한 사랑이 실천 되지 못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유전자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도 사람이 어떻든 간에 하느님의 유전자를 지닌 것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신학생 때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가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나환자 마을로 봉사를 갔을 때입니다. 친구는 그곳 아이들에게 자기가 만든 노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가 1983년 겨울이니 어느덧 40년이 지났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노랫말과 멜로디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오늘은 그 노랫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만나던 즐거운 일요일에/ 우리 사랑 영원하라 주님께 기도하며/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마저도/ 우리들의 사랑을 축복하는 곳으로/ 이 세상에 너보다 어여쁜 이 있다면/ 이 세상에 너보다 사랑한 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다 거짓말이야/ 어여쁜 너 어여쁜 너 나의 천사여” 노래의 제목은 ‘나의 천사여’입니다. 유안진 선생님은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의 허물도 모두 예뻐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허물이 크고, 늘 죄를 짓고 살지만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023년을 시작하면서 저도 ‘천사’를 몇 번 만났습니다.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께서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덕분에 새해가 시작하는 1월 1일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습니다. 성지순례로 시작한 2023년은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할 것 같습니다. 새벽 5시에 무덤성당으로 조배를 갔습니다. 미사를 예약하지 못해서 미사를 봉헌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천사 같은 수녀님이 부활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미사를 봉헌하는데 순례 온 한 교우분이 미사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 형제님의 몸가짐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덤으로 미사를 봉헌한 네 명의 사제들의 사진도 찍어 주었습니다. 주님공현 대축일을 앞둔 화요일에 베들레헴 주님 탄생 성당으로 순례를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현지에 사는 한 형제님이 친절하게도 주님의 탄생 성당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고, 경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4박 5일의 짧은 성지순례였지만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 덕분에 감사하고 은총이 충만한 순례가 되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저 역시도 이웃을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천사가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에는 27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 태조, 한글을 창제한 세종,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정조, 나라의 문을 닫아야 했던 고종 등이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존경받는 왕은 세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국방, 과학, 문학, 외교, 예술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왕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글의 창제는 세종의 가장 빛나는 업적입니다. 한글은 그 만든 목적이 유일한 문자이며, 창제의 원리가 전해지는 유일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창제원리는 우리가 인터넷 강국이 되는 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은 백성들을 사랑했고, 백성들의 고충을 이해했고, 백성들에게 문자를 선물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입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요,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내 출세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세포는 끊임없이 주위에 있는 다른 세포에게 영양분을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세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양분을 나누지 못하는 세포는 ‘암’세포가 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틀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새해에는 ‘나’라는 틀에 갇혀있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의 것들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보다 매력적인 존재, 사랑스런 존재, 세파에 지친 세상의 나그네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는 사목자!
-양승국신부-
오늘 우리는 참으로 특별한 성인 한 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품위 있고 매력적인 사랑과 온유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입니다.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사목자이다 보니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은 발길 닿는 곳마다 그분께 흠뻑 매료된 수많은 추종자들과 군중이 몰려와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그분께 가까이 가려고 경쟁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그분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가 던지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눈물까지 흘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오늘 수많은 우리 사목자들 가운데 단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계시는가? 자문해봅니다. 급격히 침몰해가는 우리 교회가 회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우리 가운데 단 한 분이라도 그런 사목자가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연히 한 유명 가수의 일상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가수가 주도하는 콘서트 장소에는 수천·수만의, 군중이 입추의 여지 없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동원되어 오거나, 억지로 와 앉아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멋진 가수는 멋진 노래들과 퍼포먼스로 콘서트장을 감동의 도가니요,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팬클럽 회원들은 한마음 한 몸이 되어 그 순간을 즐겼습니다. 가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는 팬들의 눈은 마치 꿀이라도 뚝뚝 떨어지는 듯했고, 천국에라도 와 있는듯한 얼굴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분위기를 이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우리 교회의 지상 최대의 잔치인 미사는 저렇게 되지 않는 건지...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그 멋진 가수는 경호원, 안무팀, 연주팀, 무대팀 등 수많은 스탭들과 만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더군요. 수정하고 보완하고, 동시에 그들에게 감사하고, 격려하고 고무하고...
우리 교회의 대잔치인 성체성사도 전례 차원에서, 성가 차원에서, 말씀 선포 차원에서 보다 세심하게 고민하고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얼마나 온유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는지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들이 제네바의 주교 시절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와 샹딸 수녀를 음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틈만 나면 있지도 않은 추문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퍼트렸습니다.
그러나 주교는 그 어떤 법적 대처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기도만 하셨습니다. 엄청난 모욕 앞에서도 분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동정심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장본인인 벨레라는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주교는 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맞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호사님은 저를 음해해서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신다지요? 제가 그 일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으니 제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변호사님이 제 눈 하나를 멍들게 한다든지 뽑아 버린다 할지라도 저는 나머지 한쪽 눈을 가지고 여전히 선생을 기쁘게 바라볼 것입니다.”
매력적인 사목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축일을 맞아 우리 사목자들이 좀 더 매력적인 존재, 사랑스런 존재, 세파에 지친 세상의 나그네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는 사목자로 거듭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영근신부-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당신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립과 충돌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환영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친척들에게마저도 몰이해와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하여 당신의 진정한 영적 가족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34)
이는 당신의 영적 가족의 ‘두 가지’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 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소외받고 가난하나 구원을 갈망하여 몰려와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이는 엄청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인데,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시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시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말슴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영적 가족은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함께 하는 사람이요,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동행자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실행’하는 이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 혈연이라는 세상 가치는 힘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니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이라 할지라도, 곧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아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하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앞서지 말고,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내 형제, 누이, 어머니」
-반영억신부-
한번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끊을 내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혹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부자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핏줄로 맺어진 연결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더니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라고 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핏줄로 맺어지는 관계를 무시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참된 가족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태어난 모든이와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부모 형제, 자매의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무늬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는 태양이 형님이요, 달이 누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몫을 다하였을 때 그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는 “하느님은 영이시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영이시니 영적인 분을 만나려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떠서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영적인 관계가 먼저 입니다. 어떤 외적인 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면 혈연이나 지연을 먼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직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은 탓에 “예수님께서 미쳤다”, “악령이 들렸다”(마르3,22) 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회당으로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기적을 믿었지만 그런 능력을 어디서 받았는지 의심하였습니다. 결국 육친의 가족은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눈뜬 가족은 예수님 안에 있기 마련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은 “가족을 먼저 챙겨야지 성당을 우선하면 되겠느냐?” 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당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성당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이 가족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혹시 가족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더더욱 성당에 나와서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야 합니다. 신앙과 삶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나의 가족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이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한마음 한뜻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핑계로 가족에 소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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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1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0) | 2023.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