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3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다 놓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다
.(마르 3,22-30)
The teachers of the Law who had come
from Jerusalem said,
"He is possessed by Beelzebul:
the chief of the demons helps him
to drive out demons."
Jesus called them to him and began teaching them
by means of stories or parables,
"How can Satan drive out Satan?
If a nation is divided by civil war,
that nation cannot 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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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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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프랑스어로 헐렁한 옷이라는 뜻의 블루즈(Blouse)가 변형된 옷인 블라우스는 청순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옷입니다. 그런데 이 블라우스를 남자인 제가 입는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옷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니스커트는 어떨까요? 이는 블라우스보다도 더 보기 싫은 모습이겠지요. 이제 아름답고 화려한 파티용 드레스는 어떨까요? 분명히 그 자체는 아름답지만 제가 입는다면 도저히 봐 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옷이라 할지라도 옷을 입는 사람에 따라 옷의 가치가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의 가치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치를 더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합당한 자세를 갖춰야만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 들고서는 오히려 주님 사랑이 끔찍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의 모습에 따라 세상에서 환하게 또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통해 주님 사랑을 드러내고 있었을까요? 나의 많은 죄로 인해 주님 사랑을 끔직해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하느님의 영광을 전혀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내가 받을 사랑만을 청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변화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늘 변함없이 내 곁에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내가 그 사랑을 거룩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온전히 사랑을 전해줘서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의를 표현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마음만 키우고 있었지요. 그들 자체가 변하지 못하니, 주님 사랑이 그들 안에서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루카 3,28.29)
주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곧 성령을 모독하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을 끔찍한 것으로 변질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이라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세상에 아름답고 멋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가치는 다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엘리노어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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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저는 강론의 서두에 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합니다. 생각해 보면 ‘안녕’이라는 말에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어로 ‘How are you, Good morning!’과 같은 말입니다. 어른들에게 하는 인사로도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때는 문안의 인사입니다. 가끔 어르신들이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제가 강론 때 ‘안녕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은 처음 보는 분들에게 하는 인사도 아니고,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늘 성당에 잘 오셨다는 ‘환영’의 인사입니다. 그러고 나서 편안하게 오늘 성서 말씀에 대한 강론을 시작합니다. 안녕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이별’입니다. 영어로는 ‘Good bye, See you later!’와 같은 뜻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헤어지지만 곧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말입니다. 저도 친근한 사람들에게 ‘안녕 다음에 또 봐요.’라고 인사하곤 합니다.
2023년 새로운 한해를 같이 시작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 12월 31일에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뉴욕 동북부에서 함께 지내던 백운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도 12월 30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제 새로운 한해 2023년을 같은 공간에서 만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안녕, 이별’은 없기 때문입니다. 위령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나도 천국성인도 에서 그대들과 같이 만나 영원한 복을 즐기게 될 것을 바라고 있소. 그대들을 정답게 껴안아 주겠소. 틀림없으니 그리 몹시 슬퍼 마시고 큰 사랑을 가지고 천주를 섬기도록 힘쓰시오. 그렇게 하면 죽은 후 영원히 주님 앞에서 서로 만나 끝없는 즐거움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요.”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독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고, 성령을 모독하는 삶을 산다면 권력을 지녔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없습니다. 재물이 많아도 우리는 안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병중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안녕할 수 있습니다. 박해의 칼날 위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부활할 몸이요, 하느님의 살아계신 성전인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인 몸이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속량된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도 주님의 몸이요, 성체도 주님의 몸이요, 하나로 일치를 이루는 몸입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묵상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테살로니카 전서 5장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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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성령의 힘으로 마귀 쫓아내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결함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393항)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라는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혹은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용서를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지 못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을 주시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활동을 스스로 제외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한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주님이 아닌 피조물, 곧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가기 자신을 앞세우다 자칫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혹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용서하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 당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 3,29)
주님!
용서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생각과 제 자신이라는 우상에 빠져 구원의 빛을 스스로 차단하지 않게 하소서.
이제는 제 완고함을 꺾으소서.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당신의 용서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여, 받은 그 용서로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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