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1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열네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성녀는 청혼을 거절한 것에 앙심을 품은 자의 고발로 신자임이 드러났으나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 준 그녀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된다.
☆☆☆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코 3,20-21)
Knowing what was happening his relatives
came to take charge of him:
"He is out of his mind," they s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다고 한다(제1독서).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는데,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해 붙잡으러 나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 등산을 좋아했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무조건 산에 갈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정상에 오르는 것이 커다란 성취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즉, 이 산을 정복했다는 성취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산 정상에 오르는 맛에 지도를 펼쳐서 정상에 오른 산을 하나 하나 표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산도 정복하고, 저 산도 정복하고…. 거의 이런 식이었습니다.
어느 날, 험한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하산하는 길을 찾기가 힘든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비까지 쏟아집니다. 갑자기 산이 너무나도 커 보였습니다. 자연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생하고 난 뒤, 산을 정복했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산 정상에 다녀온 것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긴 고양이가 내 머리 위에 올라갔다고 해서 사람을 정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역시 정상에 갔다 온 것뿐이고 조금 더 알 수 있게 된 것뿐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들의 열심을 보면서 커다란 존경심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열심히 하시지만 정복자의 모습을 보이는 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자기 기준에 맞춰서 다른 이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는 정복자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교회 한 가운데 주님께서 계시는데, 주님께서 먼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커다란 겸손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알고 함께 하기 위해 우리 역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면서 인정하고 지지하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정복자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친척이었습니다. 음식을 들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지요.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름같이 몰려드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 관계라서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미쳤다면서 활동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마 친척들은 당시의 높은 지위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말만을 굳게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이 배웠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들이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님께서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실제로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자기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또 사회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정복자입니까? 아니면 겸손한 사람입니까? 정복자의 모습을 통해서는 예수님과 절대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정복자의 모습을 가감하게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일의 일을 훌륭하게 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는 바로 오늘 일을 훌륭하게 완수하는 것이다(엘버트 허버드).
-조재형신부-
예전에 동창 신부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동창 신부님은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은 동창 신부님이 'SKY' 대학에 지원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본인에게도 좋고, 학교에도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창 신부님은 굳이 ‘서울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한 대학으로 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미친 짓’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면서 설득했지만 동창 신부님의 강경한 주장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벌써 4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동창 신부님처럼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기에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담임선생님도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교가는 이렇습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교가의 내용도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미친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배움의 목적은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움의 목적은 성공, 명예, 권력을 향한 사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학교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줄고 있다고 합니다. ‘미친 짓’을 선택하려는 학생들이 줄고 있다고 합니다. 가정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미친 짓’을 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가정에서 말씀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미친 짓’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친 짓’을 하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기도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미친 짓’을 몸소 행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죽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사제들이 참된 행복을 찾기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먼저 찾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미친 짓’이 신앙의 기준으로는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거름이 되기보다는 화려한 꽃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기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하는데 세상의 창고에 보화를 쌓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 때문에 가슴이 벅차야 하는데 말씀이 바람처럼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 촛불이 재가 되어야 하는데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형식과 관습의 ‘틀’에 갇혀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세상의 것들에 머물면서 말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제들이 있다면, 자비를 베푸는 사제들이 있다면, 온유한 사제들이 있다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제들이 있다면, 믿음 때문에 세상의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사제들이 있다면 그래서 ‘미친 짓’을 하는 사제들이 행복해 한다면 성소는 다시 불처럼 타오를 것입니다. 불쏘시개가 없는데 밑불이 없는데 불이 타오르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꿈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면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살과 피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내가 보낸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 시간이 참된 행복의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어제 내가 했던 행동은 어떤 행동이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 행동이 참된 행복의 행동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도에 머물며, 말씀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양들을 향한 사랑에 깊이 빠지고 미친 사목자들이 필요합니다!
-양승국신부-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예수님으로부터 그리 좋지 않은 소식이 친척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이 미쳤다는 것입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걱정들이 대단했습니다.
뭘 보고 미쳤다고 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 민족이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안식일 규정을 깨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전수되어온 정결례를 개무시하고 있다.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하고 다니고 있다. 저러다가 분명 제 명대로 못살 것이다. 미친 것이 맞다.’
아직도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신원 파악을 하지 못한 친척들 역시 미쳤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냥 저대로 뒀다가는 친척 예수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강제로라도 데려와 집에 가두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미친 것이 맞습니다. 미치긴 미쳤는데, 사랑에 미쳤습니다. 세상의 기준, 세상의 잣대로 바라볼 때, 예수님의 인생을 한 마디로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사심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투자란 단1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모든 에너지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이 땅에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쏟아부었습니다. 예수님의 안테나는 오로지 우리 인간의 행복과 구원, 영원한 생명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미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열렬한 사랑에 미쳤습니다. 당신의 모상인 우리 인간을 향한 뜨거운 사랑에 미쳤습니다.
가난한 청소년들의 아버지 돈보스코 역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탁월했던 돈보스코는 서품 직후 여기저기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좋은 본당에서, 병원 원목실에서, 학교에서...
그러나 돈보스코는 좋은 제안들을 다 거절하고 토리노 뒷골목으로 나갔습니다. 거기서 거부당하고, 착취당하고, 소외당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친구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유능해보이는 젊은 사제가 본당에 있지 않고, 사고뭉치 뒷골목 청소년들과 정신없이 뛰어놀고 있는 모습, 위험해 보이는 수많은 아이들의 우두머리처럼 행세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돈보스코 역시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미쳤습니다. 그 누구도 돌보지 않던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에게 깊이 빠져들었고 그들에게 미쳤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목자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향한 사목적 열정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자기 자신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양들에게 깊이 빠져,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께서 그런 모습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절로 되어 있는 짧은 본문입니다.
첫 번째 절(20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곧 복음으로 ‘물들어가고 섞여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배추벌레가 배추를 먹으면서 배추색깔로 변해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절(21절)에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 3,21)
여기에서 “붙잡다”(krateo)라는 말은 ‘손에 쥐다, 제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친척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러 나섰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들의 손에 쥐고 조정하고 흔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당신을 꼭 붙잡고 반박'(마르 8,32)하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려고 붙잡는 이는 그가 비록 제자라 하더라도, 혹은 친척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의 행위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신 것이지, ‘나를 붙잡으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뿐 붙잡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자기의 뜻으로 예수님을 붙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서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요한 20,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붙들린 사람’,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앙드레 루프) 일 뿐입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제지하시도록 승복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그 제지는 우리의 굴복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원하는 바를 얻으려고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께 붙들려 사로잡혀 따라가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붙드셨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매달려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사실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선 이유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붙들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에 붙들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붙잡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느님이 아니라 한갓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치신 분’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사로잡히신, ‘아버지께 미치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내가 배신하고 무관심할 때마저도, 언제나 나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진정,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마르 3,21)
주님!
당신께 사로잡힌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잡힌 자로 살게 하시고,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사로잡혀 살게 하소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에 붙들려 살게 하시고,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조정에 승복하게 하소서.
아멘.
「몰이해와 소문 」
-반영억신부-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셨습니다(마르3,20).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기를 고집하며 새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급기야 소문을 듣게 된 친척들조차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이나 죄인이나를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아우르고 품으셨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조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견제심리에서 모함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헛소문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일을 하면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침묵하심으로써 항시 행할 바를 일깨우셨습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법입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겉포장에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줏대란 노와 같아요.
배를 타는데 꼭 있어야 할 노와 같아요.
줏대 없는 돌이 아빠는
노 없는 배를 탄 것처럼
남의 말에 흔들려요.
줏대 있는 순이 아빠는
노를 저어 가는 배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갈 길을 가요”-이규경-.
우리도 일상 안에서 이런 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 그야말로 ‘줏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오해 받으시고 모함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는 일이야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선을 선으로 보고 기뻐하는 이도 있고, 그 선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다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의 일을 한다면 흔들림 없이 기쁨으로 하십시오! 소문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헛된 소문 때문에 그 진실을 알게 되니 은총이기도 한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하는 의도, 속셈을 알게 됩니다.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 안에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덕행으로 가슴을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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