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3. 1. 20. 06:05

2023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코 3,13-19)

 

he appointed twelve to be with him;

and he called them apostles.

He wanted to send them out to preach,

and he gave them authority to drive out demon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시며,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이것 해 주세요. 저것 해 주세요.”라고 부탁만 한다면 어떨까요? 심지어 제 이름도 모르고, 저의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면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알아서 하세요.”라고 말까지 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아주 간단한 것이라면 해 줄 수도 있겠지만,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하는 것이라면 거절할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지금 너무 어렵습니다. 돈 좀 주세요.”라면서 제게 부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꽤 큰 금액이었기에 제게 그런 부탁을 한다면 저를 잘 아는 사람인가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저의 이름도 몰랐고, 새벽 묵상 글을 통해 저를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신부’라는 이유로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교구 사회복지회에 연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신부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잖아요.”라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돈을 주고 도움을 주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분과의 만남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주님께서는 얼마나 더 어이가 없으실까 싶더군요.

기도도 잘 하지 않고, 주님을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을 찾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자기 부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공평한 하느님이라면서 화를 내고, 하느님께서 안 계신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왜 자기 뜻이 이루어져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할까요?

먼저 하느님을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뜻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들을 뽑으신 이유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 3,15 참조).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박해 속에서 고통과 시련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주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순교까지 하십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만의 사랑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사랑을 봐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는 것만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견디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사랑으로 갚아주십니다. 참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시도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더라도 그것은 또 하나의 전전이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토마스 에디슨).

​표징 없는 말을 믿는 사람은 없다

-전삼용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MYIUxsxsxe4

 

​새롭고 영원한 계약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T7aoXV90P5A

 
 

​-조재형신부-

공자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습니다. 3명이 같이 있으면 그 중에 반드시 배울 점이 있다고 합니다. 후배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지내면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지난번에는 식탁에 예쁜 식탁보를 깔았습니다. 벽에는 좋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식탁보와 그림이 있으니 사제관 주방이 밝아졌습니다. 이번에 갔더니 거실에 화초들이 가득 반겨주었습니다.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신부님이 교우들에게 집에 있는데 시들어가는 화초가 있다면, 바빠서 물을 주기가 어려운 화초가 있다면 사제관으로 보내달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교우들이 하나 둘 화초를 가져다주었답니다. 신부님은 늘어나는 화초를 보관하기 위해서 선반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거실 안 선반 위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화초를 보니 거실이 정원이 되었습니다. 쌀을 씻을 물을 화초에 주니 화초가 더욱 생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화초를 가꾸는 정성으로 교우들을 만나니 교우들도 신부님을 아끼고 존경하는 것 같았습니다.

 

‘삼인행필유아사’ 이야기를 하나 더 나누고 싶습니다. 함께 일하는 분이 그만 고속도로에서 자동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습니다.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한분 나타났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어머니가 오기에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중에 타이어가 펑크 난 차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천사는 1시간가량 시간을 들여서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해 주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피부색도 다른 사람입니다. 다만 고속도로 위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어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돈을 주려고 했더니 받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 주려면 이번 성탄에 카드를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주세요.” 그리고 전화번호를 주면서 집에 무사히 도착하면 문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성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이렇게 고속도로 위에도 있었습니다.

 

예전에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를 연극으로 했었습니다. 예수님께 경배 드리기 위해서 출발한 사람은 원래 4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4번째 동방박사는 오는 길에 가난한 사람을 만났을 때 가지고 간 선물을 주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을 만났을 때도 가지고 간 선물을 드렸습니다. 병든 사람을 만났을 때는 여관에 데려다 주었고, 남은 돈을 여관 주인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네 번째 박사는 이제 가진 것이 없어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30년 시간이 흐른 뒤에 네 번째 박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 박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내가 가난했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너는 내가 굶주렸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너는 내가 병들었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네 번째 박사는 예수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13번째 제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네 번째 동방박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초를 가꾸는 정성으로 교우들을 사랑하는 사제가 13번째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펑크 난 타이어를 교체해준 천사가 네 번째 박사라고 생각합니다. 2023년이 시작되었고 어느덧 1달이 되어갑니다. 2023년에는 나의 이름이 13번째 제자의 이름으로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이름이 네 번째 박사의 이름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께로 가는 이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르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를 제자로 뽑으시는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양승국신부-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이 며칠 저희 집에 며칠 묵어갈 때였습니다. 연령대가 두 살부터 스무 살까지, 그야말로 대가족이었습니다. 손이 두 개여서 일일이 다 품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어머니 원장님를 돕기 위해 형들과 누나들은 꼬마들 한 명씩 도맡아 케어해주는 모습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대여섯 살 꼬마들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 꼬마가 우리가 하니 괜찮다고 극구 말려도, 밀걸레를 손에 꼭 쥐고 열심히 바닥을 닦았습니다.

 

사실 크게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도 함께 돕겠다는 그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메시아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인류 구원 사업, 당신 홀로 충분히 이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도움이 조금도 필요 없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도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엄청나고 위대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별 도움 안되는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 시기로 접어드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심으로 당신의 일이 지속되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명의 제자를 사도,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사절로 부르셨습니다.

 

그 누군가의 사절은 곧 그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유다 율법의 원칙이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합법적이고도 직접적인 대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을 추종하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을 넘어, ‘파견된 사람’(Apostolos)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분의 사명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목격 증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선포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사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는 다름 아닌 ‘파견 된 사람’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힘과 개인적 권위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들은 왕이 아니라 사절입니다. 손이 아니라 연장입니다.

 

사도들이 받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 직분을 수행하기에 앞서 사도라는 직분에 대한 겸손한 신원 의식을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그분은 지혜로운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고 어부들과 세리들을 뽑으시어,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와 재물, 권력과 귀한 신분에 이끌려 믿음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도는 논쟁 실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암부르시우스 교부)

 

오늘도 별 도움 안 되는 우리를 당신의 사도로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과연 무엇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겠는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마르 3,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당신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나아온” 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의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계시는 곳에 제자도 있어야 하고, 스승이 파견한 일을 사도가 하게 됩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갑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