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7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성인은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간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다.
☆☆☆
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 2,23-28)
"Look! they are doing
what is forbidden on the Sabbath!"
Then Jesus said to them
The Sabbath was made for man,
not man for the Sabb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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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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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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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갑곶순교성지를 떠나서,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의 주임신부로 생활합니다. 13년 만에 본당신부로 생활한다고 하니, 기대도 되고 또 알 수 없는 두려움도 엄습합니다. 그러나 아주 열심하고 교회에 헌신적인 신자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들과 함께 재미있고 기쁘게 생활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지난주, 이곳 김대건 성당으로 오기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포장 이사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가지고 있는 짐을 정리하려는 마음에 직접 짐을 정리했습니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짐을 정리해보니 얼마나 많은 짐들과 함께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옷장을 열어 옷을 정리했습니다. 20년 넘은 옷도 있었고, 살이 쪄서 맞지 않아 언젠가 체중을 줄여서 다시 입을 것으로 생각했던 옷도 많이 있더군요. 아깝다고 또 가지고 다니자니, 짐이 많아질 것 같아서 지금 당장 입을 수 없는 옷들 과감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옷장으로도 충분한 양이 되었습니다.
서랍을 정리했습니다. 문구류를 좋아해서 서랍 하나가 문구류로 가득합니다. 잘 쓰지 않는 펜을 정리하니 역시 통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책장도 정리했습니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언젠가 다시 읽을 것이라는 생각에 계속 끌고 다녔던 책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보던 책을 비롯한 15년 이상 된 꽤 많은 책을 과감하게 처분했습니다.
이렇게 짐을 정리하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쌓아만 두었구나.’라고 반성하게 됩니다.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나눌 수 있는 것들도 기쁘게 나눌 수 있어야 했는데, 나 혼자만 쓰고자 하는 욕심과 이기심이 물건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음을 깨닫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즉, 주님은 보지 않고 나만 보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알 수가 있지요.
안식일에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다가,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바리사이들이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라고 따집니다. 밀 이삭 몇 개 뜯은 것이 뭐가 대수일까 싶지만, 이들은 확대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지금 추수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려고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기준만을 내세웁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욕심과 이기심에 주님의 뜻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트 2,28)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에 갇혀서 사랑을 실천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비워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기회는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크리스 그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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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여기서 예수님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인간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다고 하니 안식일은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이 그들의 주인입니다. 그들이 지켜야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쉬며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있는 날인데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옥죄는 율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왜 사람은 자신들이 지배해야 할 것의 지배를 받고 살까요? 돈의 지배를 받고 명예나 쾌락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그 집착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돈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잠깐의 쾌락을 위해 양심을 저버립니다.
반드시 무언가는 삶의 이유로 삼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글로리’라고 넷플릭스에서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내용은 한 아이가 학교 폭력을 지독히 당하여 이 악물고 커서 복수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공감되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문동은이라고 하는 아이가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엄마는 이 아이의 합의금을 들고 도망을 갑니다. 더는 살 이유가 없는 문동은은 자살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무언가가 그를 죽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복수심’이었습니다. 복수심은 그녀를 견디게 했습니다.
만약 복수가 끝나면 그녀는 무엇으로 살아갈까요? 사람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유를 찾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존재입니다. 짐승들이야 그저 생존하면 그만입니다. 다른 이유가 필요 없어서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유를 찾습니다. 물론 그 이유들도 동물들과 결국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한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 찾아낸 삶의 이유는 결국 나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문동은은 복수하고 싶으면서도 복수를 질질 끌 것입니다. 빨리 끝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복수가 끝나면 어디에서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무석 정신분석학 교수는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있을 때 계속 자해하는 군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지 않으면 우주에 붕 뜬 존재처럼 느껴져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 그래도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살 이유가 없는 것은 벌써 죽은 것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영화 ‘기억의 밤’은 자기 부모가 죽는 것을 목격한 한 아이가 부모의 복수를 하기 위해 평생을 기다렸는데 그 대상이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기억을 회복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래야 복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억을 회복한 그는 본래 매우 착한 사람이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지금의 자기보다 훨씬 착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하지 못합니다. 그러며 그는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더는 살 이유가 없습니다. 복수하려던 그가 자살합니다.
인간이 삶의 이유를 찾는 이유는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계속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나의 존재 이유를 정합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쾌락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그런 것들이 없으면 나도 존재 이유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들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돈이 나의 것이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내가 돈의 것이 됩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인간이 지배하라고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들을 지배하지 못하고 지배당합니다. 그것들이 삶의 의미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 법이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며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그들이 선택한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 이유로부터 자유로운 누군가를 보면 참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가 저절로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존재 이유를 나를 만든 분으로 삼으면 됩니다. 그분이 있건 없건 그렇게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돈이나 명예, 쾌락이 존재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에 묶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세상 것의 노예가 되는 시스템에서 우리에게 어떤 선택의 삶이 더 낫겠습니까?
영화 ‘그래비티’는 결국 내가 존재하게 된 이유, 곧 지구에 발 붙이고 살지 않으면 우주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 무엇이라도 잡으려고 하는 존재가 된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있을 때 우주에 떠도는 것을 굳이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주 공간에서 헤맬 때는 자신을 잡아줄 무언가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출처를 인정하지 않는 삶과 그것에 순종하는 삶의 차이가 이럴진 데 사람 대부분은 그래도 지구로부터의 자유, 그러나 우주 쓰레기에 집착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자유라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모든 것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고 지구에 발 붙이지 않으면 우주 쓰레기라도 움켜쥐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뭍으로 가는 게 의미여야 하고 우주에 떠 있는 사람은 땅에 발을 붙이는 게 의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찮은 것에 목숨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안식이 없는 이유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분은 이제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으로 이웃의 발을 씻기 위해 내어줄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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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 12)” 저는 강론을 준비하면서 이 말씀을 스쳐지나가듯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이병호 주교님의 글을 읽으면서 말의 힘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복음 말씀을 모두 암송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여전히 복음 말씀을 암송하신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성당 제대 앞에서 큰 절을 올린다고 합니다. 매일 치명자 산에 오르는데 그곳의 경당에서도 감실 앞에서 큰 절을 올린다고 합니다. 주교님의 삶에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정말 어떤 쌍날칼보다 날카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이 살아 있으니 육체의 나이는 들어 시력이 예전 같지 않지만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말씀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에서 감탄과 놀라움을 가져야 합니다. 놀라움과 감탄의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놀랍고, 감탄스러운 것들로 보입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일상으로 보면 아름다운 그림을 보아도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좋은 말씀을 들어도 감홍이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 들었던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통계와 수치로 나타는 이야기는 큰 감동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우들을 만나면 삶의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교우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주교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실 사제들은 딸린 가족이 없고 교회가 생활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큰 우산 속에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우산 없이 눈비를 그대로 맞으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도 대부분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그대로 당하고 산 사람들입니다. 성서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도 교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길가에 있는 신호등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파란 불에 이동하고, 빨간 불에 멈추면 안전하게 다닐 수 있습니다. 신호등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빨간 불에 움직이면 교통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호등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만, 사람은 신호등의 지시를 따라는 것입니다. 신호등의 표시가 중요하지만 때로는 사람이 신호를 줄 때가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는 신호등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경찰의 신호를 따르게 됩니다. 공사 중일 때도 그렇습니다. 신호등은 정해진 규칙에 의해서 표시를 할 뿐이지 공사의 현장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공사의 현장에서는 현장 근무자의 신호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맞습니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재난의 상황에서는 안식일의 규정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기 때문에 안식일의 규정을 무시하거나 어겨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규정을 넘어서는 삶을 사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친구가 잘못하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친구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과 규정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권한은 행사하지만 책임은 소홀하였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말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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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바다로 돌아가듯이 끊임없이 사막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보다 주님께 가까이 다가서고, 보다 주님을 깊이 느끼고, 보다 주님을 잘 따르기 위해 깊은 광야나 사막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메시아 오심을 준비했던 구약 시대 마지막 대예언자로서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잇는 가교 역할에 충실했던 세례자 요한도 깊은 유다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광야에서 최소한의 옷을 걸치고, 최소한의 음식만 먹으며 자신의 내면을 갈고닦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직전 유다 광야로 들어가셔서 홀로 40일간의 대피정을 실시하셨습니다. 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 단식을 하셨는데, 적당한 단식이 아니라 철저한 단식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셨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안토니오 아빠스를 비롯한 사막의 교부들 역시 현란하고 요란스러운 도시를 떠나 깊은 사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냥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간 축척해 두었던 재물이며 학식이며 명성이며 사회적 기반이며...모두를 내려놓고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훌훌 털고 혈혈단신으로 아무런 미련도 없이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는 은수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멋있다, 쿨하다고 박수칠 수도 있겠습니다. 사막 생활의 낭만도 없지 않았습니다. 까마득한 사막 저 너머에서 태양이 떠오를 때라든지, 서녁 하늘을 장엄하게 물들이는 일몰 시간에는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또 어떤가요? 캄캄한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의 잔치가 벌어지겠지요. 인간 세상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손에 잡힐 듯이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낭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낮의 더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강풍이라도 불어오면 함께 날아오는 모래로 인해 눈을 제대로 못뜰 지경입니다. 건기가 되면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굶주림과 목마름은 기본이었습니다.
은수자들이 깊은 사막으로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온전히 주님을 추종하기 위해서, 오로지 주님만 선택하기 위해서, 하루 온종일 주님 현존 속에 살아 숨 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집트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던 안토니오는 일찍이 부모와 사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다음과 같은 복음말씀을 듣게 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안토니오는 전율과도 같은 느낌을 받은 동시에 그 말씀은 바로 자신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안토니오는 37만평이나 되는 비옥한 토지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외롭고도 허전한 길, 쓸쓸하고도 고통스런 사막의 길-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안토니오의 위대함은 쉼 없는 기도생활과 한결같은 겸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토니오는 한 은둔소에서만 20년간 칩거하며 기도생활에 전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수많은 방문객들을 모른척하며 그 오랜 세월 하느님과의 만남에만 몰두하셨습니다.
안토니오에게 하느님 이외의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오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떠받들었지만 거기에 조금도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안토니오의 주옥같은 권고 말씀이 오늘 하루 삶의 양식이 되길 빕니다.
“물고기가 마른 땅에 머물러 있으면 죽듯이 수도자들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되면 정신이 해이해집니다. 그러니 우리 수도자들은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가듯이 끊임없이 사막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 부단히 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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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마르 2,23)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 사이”를 질러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세상에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2,22)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임을 암시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는 것은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줍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마르 2,24)
바리사이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그들이 남의 곡식을 수확했다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일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의 본질과 우선순위를 깨닫게 됩니다.
곧 ‘해야 할 일’(생명을 살리고 축복하고 하느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생명을 저해하고 자신이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자신의 유익과 유쾌함 따르는 일)의 순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일을 우선하고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세우신 것일까?
그리고 그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그리고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야훼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
(탈출 31,13)
이처럼 안식일을 새운 이유를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줍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또한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날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
(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 쉼도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마르 2,25) 하고 물으시고, 그들이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그렇게 해서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으며, 안식일 계명의 근본 정신이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 2,28)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시니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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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진 법」
-반영억신부-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며,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는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가름하고 휴일을 즐기고 싶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성당을 찾았는데 미사참례의 계명이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싫습니다.”
교회법에서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교회법1248조1항).고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이나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 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33살까지 사셨으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라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예전에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이 한글도 모르고, 성경도 라틴어로 된 책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대신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성당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 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8).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안식일 규정을 강화하는 가운데 본래의 의미를 잊고 자구에 매인 나머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집착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규정들을 세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되레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이 고해성사를 보시면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될 일,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규정을 생각하기보다 그 의미, 알맹이를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요즘 법은 왜 그리 물러졌어요?” 하셨습니다.
안식을 취해야 할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보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단순히 미사참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이날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마음이 완고하고 오그라들어서 안식일 법을 확대해석하며 사람들에게 짐을 지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원의와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전권을 가진 분으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이영헌).
그러므로 적극적인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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