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3-17)
“Why does he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Jesus heard this and said to them,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but the sick do.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해외 성지순례를 가면, 종종 가이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진 찍을 시간을 충분히 드릴 테니, 제 설명 좀 들어주세요.”
비싼 돈 내고 해외 성지순례 왔는데, 사진만 찍어서 가면 얼마나 아깝냐는 말도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남는 것은 사진뿐이다.’
설명을 잘 들으면 분명히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억의 한계 때문에 3일만 지나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해외 성지순례 중에 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기억하지 못할 테니, 열심히 사진 찍으세요. 남는 건 사진뿐입니다.”
설명도 중요하지만, 사진도 중요합니다. 특히 자신이 찍은 사진에는 마음에 각인될 수 있는 기억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합니다. 추억이 없으면 지금을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도 지나간 일 전부를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이때 그 기억을 도와주는 것이 ‘사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진으로 추억을 떠올리고, 지금을 더 잘 살게 해 줍니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역시 이 사진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과거에 그러했음을 떠올리면서 지금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무시하고 경멸했던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마르 2,1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가셔서 그의 동료인 다른 세리들과 함께하며 먹고 마십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이 장면을 여러분의 사진기로 찍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죄에 기울어져서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이 사진을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맞아.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지.”라면서 힘을 다시 내지 않겠습니까? 성경 말씀은 새로운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예수님을 계속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예수님처럼 살게끔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내 마음의 사진기로 분명하게 찍어 놔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 바로 잡아주는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한다(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조재형신부-
매일 꿈을 꾸지만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꿈은 생생하게 기억나기도 합니다. 최근에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약속장소로 가는데 제가 자꾸만 다른 길로 가는 거였습니다. 약속시간은 다가오는데 전혀 생소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꿈속이라도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마치 꽉 막힌 공간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났고 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꿈에 대한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꾼다고 합니다. 마음에 드는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새로운 목표를 찾아서 나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2023년 저의 새로운 목표는 ‘성지순례’입니다. 1월에는 과달루페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4월에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5월에는 그리스와 터키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6월에는 이탈리아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10월에는 한국성지순례가 있습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2년 동안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성지순례가 많이 예정되어 있어서 걱정도 되었나 봅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지러웠던 방을 깨끗이 정리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버릴 것은 다 버렸고, 벽지도 새로 붙였습니다. 넓고 깨끗해진 방에서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꿈이었습니다. 꿈이었지만 마음이 편했고, 가족이 모이니 즐거웠습니다. 이번에도 마음에 드는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말끔히 해결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는 꿈이니 모든 문제는 이웃들의 도움으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2022년을 돌아보면 제 주변에는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회계사와 변호사님께서 회사의 문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퀸즈의 정하상 바오로 성당의 신부님들은 언제나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미국생활의 어려움을 잘 들어주었고,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동북부 ME 대표 신부를 맡으면서 엠이 부부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줌으로 하는 강의를 녹화해주기도 했고, 편집도 해 주었습니다. 모임이 있으면 차량 봉사도 해 주었습니다. 엠이에서 주관하는 행사는 따뜻했고, 먼 타향에서 사는 저에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3년 째 부르클린 한인성당 미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손님신부라서 어색했는데 지금은 가족처럼 친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2023년 새해에는 저 역시 누군가의 어려움에 함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꿈을 꾸게 됩니다. 어떤 꿈은 걱정과 근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꿈은 선택과 결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꿈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의 꿈은 바뀌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신자들을 잡아가던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약하게 숨어 지내던 모세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평범하게 가축을 키우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반석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으뜸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레위는 지금가지는 세상의 재물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저 재물을 모으면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레위는 이제 마태오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복음사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를 통해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물을 모으던 세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사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한다면 우리는 삶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른다면 우리들 역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 죄인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당시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죄인’에 대한 개념은 참으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죄인은 의인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 거룩한 유다 전통을 따르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인은 회당 출입이 금지되었고, 일반 사람들과의 접촉도 불가능했을뿐더러,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방인 노예와 동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랍비들은 죄인들을 ‘회개 불가능한 존재’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존재’로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이런 죄인이란 빨간 딱지를 가슴에 달고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세관에 앉아 있는’(마르코 복음 2장 14절) 이란 표현을 참고했을 때, 보통 세리가 아니라 대단한 세리, 카파르나움에서 힘 꽤나 쓰던 세관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국경을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였던 카파르나움에서 통행세 징수를 총괄하고 있었습니다.
꽤나 높은 자리에 앉아있던 레위, 꽤나 많은 재산을 모았던 레위였지만,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더구나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도 없었고, 회개의 가능성조차도 부여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리 레위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제거 대상으로 여겼는데, 그분께서는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스스로를 세상과 하느님의 민폐로 여겼는데, 그분께서 자신을 용서하시고 치료하실 뿐 아니라 당신 제자단에 가입시켜주셨습니다.
모두가 외면하던 나를 눈여겨보시고, 나에게 다시 한번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그분의 은혜가 너무 커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료 세리들, 죄인들을 모두 불러모았습니다. 한바탕 큰 잔치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 죄인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어째서 저 큰 죄인들, 부당한 죄인들을 제자로 부르시냐고 따지는 이들에게, 똑같이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코 복음 2장 17절)
<"나를 따라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이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과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과 방식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로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 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 갈라 3,27; 콜로 3,10; 에페 4,24)을 말합니다.
곧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써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마르 2,14)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17)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따뜻한 가슴을 요구합니다」
-반영억신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신임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에서“추기경이라는 직위는 승진이나 명예의 상징이 아니라 넓은 시야와 광활한 가슴을 요구하는 봉사의 자리”라며 “멀리 보고 보편적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은 겸손의 길을 걸은 예수의 길을 따라야만 갖출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아울러 “추기경이라는 자리를 기쁘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달라”며 “금욕과 청빈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맞지 않는 축하연을 열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저 대신 바티칸의 작은 아파트에서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지내고 방탄 리무진 대신 포드 승용차를 타는 교황은 자선단체를 돕기 위해 선물로 받았던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경매에 내놓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따뜻한 가슴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징수를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는 로마인들의 하청을 받아서 세금을 거두어 바치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받았고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민족적인 시각에서는 압제 세력인 로마에 빌붙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요, 반역자입니다. 세리는 직업상 이민족인 로마인들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늘 부정한 상태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건한 이들은 그들과 상종조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과의 친교자리를 상징하는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깨끗한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데 죄인들을 그 자리에 불렀다면 결국 그것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행위입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가 아니어서 행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써 오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내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용서에로의 부르심을 행복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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