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3. 1. 13. 06:13

 

2023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2,1-12)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him,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간다며,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힘쓰자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죄를 용서받았다며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어머니께서 제 위의 누님에게 식사 후에 무엇인가를 먹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나는 어머니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그것을 먹어야 했지요. 그런데 당시에 너무 배가 고파서 누나만 무엇인가를 주는 어머니가 미웠고, 누나가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모두 자는 밤에 몰래 나와 그것을 훔쳐 먹었습니다. 달콤한 사탕이 아니었고, 생각보다 너무 썼습니다. 하지만 물을 마시며 억지로 몇 알을 삼켰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부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저를 발견한 어머니는 옆집 친구분을 불러 저를 업고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더 큰 병원에 가라는 말을 듣고 또 저를 둘러업고 더 큰 병원 응급실에 가서 저는 살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때 제가 죽는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눈이 뒤집혀 있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친구분이 오셔서 정신없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저를 업고 병원으로 간 것입니다. 병원에 가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시 깨어나는데 저의 역할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프니 병원에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고, 아프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장 믿었던 옆집 친구를 불렀고, 그 친구분은 병원을 믿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일이 떠올려진 이유는 오늘 복음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였지요. 그의 곁에는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래서 지붕을 뚫고 내려보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의 믿음으로 병원에 간 것이 아닌 것처럼,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고서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어머니와 친구분을 보시고 고쳐 주신 것처럼, 중풍 병자가 고쳐 달라고 달려오지 않았아도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렇지 않을까요? 내가 열심히 해야 구원받을 것 같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곁에 있는 많은 사람을 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들을 내쳐야 할까요?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큰 힘이 되는 그 누군가를 위하여 함께할 수 있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파도를 멈출 수 없다. 그러나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울 수 있다(존 카밧전).

​우리가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어야만 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https://youtu.be/DzYYx0XD8Dk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마르 2,10)을 보여주십니다. 중풍 병이 고쳐지는 것도 성령의 힘이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성령께서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사람에게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질 수 있음을 명확히 하십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하느님께서 당신 살과 피, 곧 당신 생명을 직접 양식으로 주실 수 있다거나 혹은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까지는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교회에, 혹은 인간에게 ‘많이’ 주시기는 하지만 ‘다’ 주신다고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는 하느님을 온전하지 못한 부모로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율법 학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런 말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다 주지 않고 어떤 것은 제한해서 준다면 자녀는 부모의 진정한 자녀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다 받았다고 믿어야 부모처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못하여 그 못 받은 것을 더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덜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덜 주어도 된다고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만약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교회에 주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교회는 남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어차피 자신이 믿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지 못했다고 믿으면 교회는 이웃의 죄를 용서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하느님처럼 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덜 받았다고 믿었고 그래서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처럼 되는 길이 막혔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는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여 자신도 자녀를 칭찬할 줄 모르는 엄마가 나옵니다. 안타깝기만 합니다. 아이는 엄마를 아줌마라 부르고 새엄마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하지만 아이는 사랑 받는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받아야 줄 수 있는데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자신도 못 받았으니 그렇게 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합리화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덜 받는 만큼 덜 인간이 됩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내어주는 일이 용서입니다. 부모로부터 덜 받았다고 믿는 자녀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아도 당연하다 여깁니다. 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 받은 자녀는 자신이 다 받았기에 용서하지 않으면 이율배반이 되기에 형제를 다 용서합니다.

 

전에 눈 큰 콤플렉스를 가진 여인이 이무석 박사를 찾아온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두고 술집 여자와 바람을 피운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았다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쌍꺼풀이 있는 자기 동생을 더 사랑하고 눈이 작은 자신은 덜 사랑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여전히 아버지에게 사랑받으려고만 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녀가 꿈을 꾸었을 때 남편과 바람을 피운 여자의 눈이 엄청나게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덜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이 덜 사랑하는 것을 그 믿음으로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완전한 사랑이 되려면 다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사람의 아들에게도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 고유의 권한이 주어져야만 했는지를 강조하셨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온전한 자녀가 될 수 없고 그리면 하느님처럼 되지 못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합당하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셨음을 아셨습니다(요한 3,35; 13,3 참조). 그래서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모든 것을 받으셨기에 모든 것을 내어놓으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만큼만 줄 수 있고 그만큼만 하느님을 닮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목숨까지 내어놓습니다. 그러려면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혹은 고해성사를 받으면서도 부족하게 받았다고 느낀다면 더는 하느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항상 나는 하느님의 모든 권한을 다 받은 사람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합시다. 그래야 하느님을 빨리 닮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 기적과 복음화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_NmNBEcWyYI

 

-조재형신부-

교회를 상징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교황님을 중심으로 하는 교계제도가 있습니다. 바티칸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구심점입니다. 교계제도는 이단과 분열을 막아주는 방패가 됩니다. 교계제도는 신학과 교리의 오류를 식별합니다. 교계제도는 사적계시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 판단합니다. 저 역시 교계제도의 ‘틀’에 의해서 사제가 되었고, 교계제도의 ‘인사이동’에 의해서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교계제도는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거나, 새로운 시대의 표징을 읽는 유연성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교계제도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교회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지역교회의 다양한 의견을 담은 시노드의 문서가 교황청에 전달되었습니다. 이제 대륙별로 시노드의 의견이 정리되면 시노드의 최종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시노드의 의견을 청취하고, 식별하여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데도 3년은 넘게 걸립니다. 2000년 동안 교계제도가 이어지는 것은 교계제도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시노드를 통해서,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의 법과 제도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수정되기도 하고,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상을 향해 교회의 창문을 활짝 열었던 공의회였습니다. 라틴어로 사용되던 전례를 자국어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평신도가 교회의 활동에 더욱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사를 통해서 시작되고, 성사를 통해서 성장하고, 성사를 통해서 완결됩니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물질과 형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이고, 죄를 용서받는 선물입니다. 견진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복음의 사도로 이끌었듯이 세례 받은 신앙인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사를 줍니다. 고백성사는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잔치를 베풀어준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회개하는 이들이 공동체와 하느님 앞에 화해할 수 있는 성사입니다.

 

병자성사는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수고하는 이들은 모두 내게로 오라고 하셨듯이 아픈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성사입니다. 혼인성사는 나자렛 성가정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듯이 부부가 가정을 이루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신품성사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에 봉사할 사람을 선발하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몸과 피를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시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들 또한 우리의 몸과 피를 기꺼이 이웃을 위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탄이 교계제도와 성사의 ‘울타리’를 부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시기, 질투, 욕심, 분노와 같은 것들입니다. 시기, 질투, 욕심, 분노는 늘 상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상대와 화해하거나, 상대가 용서를 청하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마지막 수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절망과 낙담’이라고 합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예수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절망하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우리가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교계제도와 성사의 ‘울타리’에서 우리가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우리가 잘못한 것을 뉘우친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용서한다면 우리는 모두 희망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하겠지만, 고통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줍시다!

-양승국신부-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은총을 입은 중풍 병자를 바라보며 제 자신의 발밑도 내려다보게 됩니다. 오랜 세월 중풍으로 온몸이 경직되고 마비된 채 살아온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낫게 해주겠다!’가 아니라,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코 복음 2장 5절)였습니다.

 

중풍 병자는 몸이 아프기 전에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영혼과 정신이 아팠던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강하게 억눌리고 짓눌려, 마음이 마비되고 몸이 마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고 죄일 수도 있습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오랜 세월 홀린 듯이 무엇인가로부터 억압받고 구속받고 마비되어 살아왔습니다.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강박 관념 속에 스스로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이 늘 지지부진하고 부자유스러웠습니다. 이런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건네십니다.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우리는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는지? 우리를 속박하고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완벽주의로 인해 힘겨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어떤 한 사람 때문에 온몸과 마음이 마비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때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하는 깊은 후회나 상처, 트라우마로 인해 온 몸이 경직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자유로움의 원천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각자가 그 무엇에도 억눌리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갈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상처로부터, 죄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부조리한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비인간적인 조건으로부터...

 

예수님께서는 단기간에 걸친 증상치료가 아니라 심층적인 원인 치료를 행하셨습니다.

 

사목자인 동시에 치유자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기적같은 능력을 기대합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완벽한 해결책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에게는 그런 역량이 없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처럼 우선 근본적인 치료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대하는 시선을 바꾸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하겠지만, 고통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며, 대 죄인들이며, 중증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조건 속에서도 하느님 현존 안에서 기쁘고 충만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동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늘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가 일어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고무하고 격려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영근신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 이사 43,25;44,22).

그런데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치유받았다고 해서 ‘들것’을 버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치유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굳이 제거하고 없앨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매여 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것’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들것’ 위에 인류를 태워 아버지께로 들고 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서 ‘상처’을 받으시고 바로 그 ‘상처’로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화해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그 ‘들것’ 위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구원’의 표지입니다.

‘사랑’의 표지, ‘용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반영억신부-

천국을 가야 하는데 성직자는 입만 천당에 가고 수도자는 귀, 일반신자는 발바닥만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자기 안에 갇혀 산다는 것을 빗대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삶은 전인적인 성화의 삶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잘못된 선입견을 지붕을 벗겨 내듯이 벗겨 내고 영적 여정을 기쁘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환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환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11).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풍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두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군중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가니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과 소신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나의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요, 군중에 떠밀려 가듯이 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의 선장입니다.

 

두 번째의 장벽은 지붕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들것에 매달아 내려 보냈습니다. 막히면 뚫고 걷어내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들 것에 누워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혹 누워있다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믿음의 사람이 될까요?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환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하며 의아해 하였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하는 이들에겐 안다고 여긴 지식이 장애물이고 병입니다. 영혼의 중풍병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