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1월 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3. 1. 10. 06:37

2023년 1월 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코 1,21ㄴ-28)

Jesus rebuked him and said,

“Quiet! Come out of him!”

The unclean spirit convulsed him

and with a loud cry came out of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의 사진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먹으면서 제 모습이 계속 변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갓난아기 때의 제 모습을 보고 지금의 저를 떠올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초등학교, 중학교 때의 제 모습을 보고도 지금의 ‘저’임을 알기 힘들 것입니다. 그만큼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격은 어떨까요? 성격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하긴 인간의 세포는 거의 7년 주기로 완전히 바뀐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포로는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7년 후의 ‘나’ 모두 완벽하게 다른 존재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계속 변합니다. 그래서 제가 잘 안다는 상대방 역시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잘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부부간에도 대화가 점점 줄어든다고 합니다. 지레짐작하고,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리를 둡니다.

변화하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못할 때 드러나는 증세입니다. 상대방이 변했다면서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를 진짜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권위로 가르쳤습니다. 율법에 쓰인 한 획 한 획만을 강조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율법에 구속된 것이 아닌, 당신의 말을 통해서도 더러운 영이 복종하는 권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권위는 바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신원에 대해 말하는 더러운 영의 말을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 나가라.”(마르 1,25)라고 꾸짖으십니다. 악의 틈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에 갇혀 있는 사람의 아들을 잘 아시기에 그 감옥에서 곧바로 풀려날 수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권위는 사랑에서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모든 변화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 하느님께 모이도록 이끌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권위를 우리 역시 갖춰야 합니다. 진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게으름뱅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았는가! 노력의 결과로써 오는 어떤 성과의 기쁨 없이는 누구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블레이크).

​표징 없는 가르침은 진리일 수 없다

-전삼용신부-

https://youtu.be/jd1__lYDH40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 권위란 세속적인 자격증을 의미하지 않고 성령의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렇게 성령으로 이루는 일을 ‘표징’이라 칭합니다. 표징이 따르는 가르침이라야 진리입니다. 표징이 가르침을 진리로 만드는 권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율법은 그러면 진리가 아닐까요? 십계명은 진리일까요, 아닐까요? 누구에게는 진리가 되고 누구에게는 율법으로 머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7)

 

이 말씀을 따르자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아직은 진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오시는 은총으로 표징이 따라야 그 같은 가르침이 진리가 됩니다. 율법은 아직 밀과 같아서 물과 불, 그리고 소금으로 빵이 되지 않으면 진리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아무리 율법을 가르쳐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진리로 만드시는 그리스도를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표징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꼭 기적을 행해야만 표징이 아닙니다. 가장 큰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만큼 큰 표징은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표징이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일인데 요한의 삶은 ‘인간이라면 저럴 수 있을까?’라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요한이 마귀가 들렸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누구에게나 표징을 베푸는 가장 큰 스승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공통된 ‘어머니’란 스승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항상 세례자 요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가르침은 가슴에 새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이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했을 때 영국의 한 신문사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처칠을 가르친 교사들을 전수 조사해서 ‘위대한 스승들’이란 제목으로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은 처칠은 신문사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짤막한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귀 신문사에서는 나의 가장 위대한 스승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는 제 인생의 나침반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신학기인데도 선생님이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무료한지 여럿이 모여 모래 쌓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노인이 안타까운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선생님이 어디에 계신 줄 아느냐? 지금 곧장 집으로 돌아들 가거라. 그대들을 맞으러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사람이 자네들을 가르쳐줄 선생님이야.”

 

만약 저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의 표징이 없다면 저는 그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구약의 율법을 되풀이해서 신자들에게 들려주는 사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제 가르침에는 진리가 없을 것입니다. 권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가르침이 구원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내가 변하고 이웃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성령께서 함께하셔야 그 가르침이 자녀에게 진리로 스며듭니다.

 

나 자신이 성령의 은총으로 변화되고 표징을 일으킬 수 있을 때 가르침의 내용도 조금은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그러니까 분명 구약의 율법과 같은 가르침이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권위를 뒷받침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라고 놀라는 것입니다. 권위는 표징을 말하고 그 표징은 자기가 가르치는 것에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 나오는 존 키팅 선생님은 가르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내용이 달랐다기보다는 무언가 달랐습니다. 성적을 올리려는 가르침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을 변화 시켜줄 수 있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현재를 즐기라 하고 변화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어쨌건 아이들에게는 참된 선생님이었습니다. 표징은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가르침을 주었기에 하느님 눈에는 하느님 나라 율법 학자입니다.

 

예전에 EBS에서 ‘선생님이 달라졌어요’란 프로그램을 하였습니다. 한 여 선생님은 아이들도 싫고 학교 오기도 싫습니다. 결국 자신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선생님으로 사는 것조차 맛을 잃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보다 먼저 출근해서 오는 아이들을 안아줍니다. 이러한 표징을 통해 같은 가르침이지만 아이들이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전에는 선생님이 도깨비 같다고 하고 악마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먼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면 가르침도 바뀝니다. 새로워집니다. 사람을 바꾸는 가르침이 됩니다.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로 무장하여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며 가르침에 합당한 표징도 일으키는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돌보아주시나이까?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3ZXYv0jpmBc

 

​-조재형신부-

‘아바타 물의 길’을 보았습니다. 3D로 구현되는 화려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13년 전에 개봉되었던 전편의 주제가 ‘교감’이라면 이번에 나온 ‘물의 길’의 주제는 ‘순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생명들은 서로 교감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생명들은 삶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에서 온 인간은 교감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서 행성을 파괴하고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지구에서 온 인간은 순환의 이치를 따르기 보다는 생태계를 파괴하고, 다른 생명을 죽여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바타 물의 길에서 원주민들은 서로를 환영하고 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대사가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교감한다면 우리는 멀리 있어도 서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교감하지 못한다면 가까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결코 자연을 파괴하거나 이웃을 파괴하거나 죽이지 못합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이웃을 죽이는 것은 곧 나를 파괴하고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바타는 화려한 영상으로 먼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서로 순환하는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서로 교감하면서 존중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신앙의 길 또한 우리가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길 또한 우리가 서로 교감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인류의 여정은 서로 교감하지 못하고, 스스로 연결의 고리를 끊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진보하는데 인류의 지성은 진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국주의는 판도라 행성에서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해치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원주민들의 자원을 착취하였고,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았고, 노예로 팔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자유, 평등, 박애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 같았지만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문화유산을 파괴하였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불평등의 사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내전과 독재로 많은 난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작년에 시작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문헌 ‘복음의 기쁨, 찬미 받으소서. 모든 형제들’은 교감과 순환의 질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감을 넘어 연민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걷게 해 주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5000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연민의 삶이었습니다. 그 연민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셨습니다. 그 연민 때문에 모욕과 수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 역시 교감을 넘어 연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순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사고친 내용입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고, 그것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사고를 친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은 먼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고 네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음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마르 1,22).

 

그런데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에 들린 이’가 소리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첫 번째 행적은 두 가지의 일이었습니다.

첫째는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는 일’요, 둘째는 ‘악마에 사로잡힌 이에게서 악마를 쫓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첫 번째 행적’은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고 본래로 돌려 놓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요, 구원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더러운 영’을 쫓아낼 뿐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인간과 같이 영원불멸의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암시해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라고 밝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 신원에 대한 아는 정보를 드러낼 뿐 신앙고백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앎은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결정적인 때가 오기까지는 제지당하게 되고, ‘메시아 비밀사상’에 가두어지게 됩니다.

한편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마와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를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악마가 추방된 사건’이 아니라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다름 아닌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권위”(exusia)란 말의 원어의 뜻은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이 구마치유는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것은 ‘권위 있는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직접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여 행하지 않으심으로써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권위 있는 가르침」

-반영억신부-

오늘은 청주교구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소명에 감사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히 봉헌하는 삶이 항구하게 지켜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하느님의 권위가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마르1,21-22). 권위를 나타내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아우제레’(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은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2,13).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 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한 마디로 소통하기를 거부합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악령 들린 사람처럼 한 입으로 두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거룩해 보이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며 내 뜻을 관철하고 이루려 안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손희송)' 부디, 권위 있는 가르침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ㄴ-22).”

 

여기서 ‘권위’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으로 해석됩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고,

그 힘에 압도당하면서 놀라게 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달리’ 라는 말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서는

그런 힘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또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말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말재주’였을 뿐이고, 삶으로 실행하지는

않으면서 말만 잘하는 ‘위선’이었을 뿐입니다(마태 23,3).

그러니 율법학자들의 말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하느님의 힘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말씀의 힘이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삶’과 하나였고, 그 말씀은 곧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성령으로 가득 찬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들의 말은 성령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

자기 지식이나 자랑하는 ‘빈말’이었다는 것이 됩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3-28).”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느낀 ‘예수님의 말씀의 힘’이

그냥 느낌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이라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는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의 힘은 ‘살아 있는 힘’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에게 명령하시고

바람과 호수가 그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9.41)”

예수님의 ‘말씀의 힘’은,

천지 창조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힘’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에도

“소녀야, 일어나라!” 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마르 5,41-42).

예수님의 ‘말씀의 힘’은 바로 그런 힘,

즉 창조력이기도 하고, 생명력이기도 합니다.

 

마귀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

복종한 것은 그 ‘말씀의 힘’에 복종한 일이기도 하고,

주님이신 예수님의 주권에 복종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예수님에게

‘사람들도’ 복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들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예수님 말씀에 복종한 일이 진짜 복종이었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복종으로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거역할 능력이 없어서 겉으로만 복종한 것일 뿐이고,

실제로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떠났습니다(루카 4,13).

즉 참된 복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귀라는 것들은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하느님과 예수님께 반항하고 반역하는 존재이고,

이미 파멸이 예정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마귀들에게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도 기회도

자유도 안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는 선을 선택하고 실행해서 공로를 쌓을 수 있는 능력이고,

그래서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6).”

이 말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으면 심판과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겁을 주는데, 무서워서 순종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선택의 자유가 될 수 있는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다음 말씀입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요한 3,19).”

 

“이 길이 살 길이고, 저 길은 죽을 길이다. 제발 이 길로 가라.” 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죽을 길’로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그랬습니다.)

심판과 멸망을 예고하는 말씀은 겁을 주거나 위협하는 말씀이 아니라,

‘살 길’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의 호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주는 구원과 생명을

받아 누리라고 우리에게 호소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