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Margaret K 2023. 1. 8. 06:14

2023년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은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의 출현은 공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그래서 공현이란 말을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1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내고 있다.

☆☆☆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마태오 2,1-12)

And behold,

the star that they had seen at its rising preceded them,

until it came and stopped over the place where the child was.

They were overjoyed at seeing the star,

and on entering the house

they saw the child with Mary his mother.

They prostrated themselves and did him homage.

Then they opened their treasures

and offered him gifts of gold, frankincense, and myrr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빛이 왔다고 하면서, 민족들이 그 빛을 향하여 오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약속의 공동 상속자가 되고 공동 수혜자가 된다고 한다(제2독서). 동방 박사들은 베들레헴에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다(복음).

주님의 별을 찾아 떠나십시오

-키엣 대주교-

‘주님 공현 대축일’은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함으로써 예수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난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몇세기 전부터 예언자들은 상서롭지 않은 별이 출현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을 만나지 못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성경에 대해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물었을 때 그들은 이미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으러 나서지 않았기에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과 가까운 곳에 있었음에도 주님을 경배하러 떠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책속에 있는 글자만 보았을 뿐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단지 책 속에서만 주님을 찾을 뿐 생활과 삶속에서 주님을 찾아나서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음은 헤로데 왕입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었지만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찾고자 한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위와 이익만을 위해 주님을 찾았습니다. 또한 주님께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찾았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을 찾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자신의 뜻을 따르도록 강요하기 위해 주님을 잡으려했습니다. 그러한 헤로데이기에 하늘의 권능으로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신 주님을 영원히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가까이 있었고, 가장 많이 알고,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가장 가난하고 힘없고, 가장 멀리 있었던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바로 목동들과 세 명의 동방박사들입니다. 그들로 인해 우리는 ‘주님 공현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주저없이 떠났습니다. 성경은 물론 예언자의 말을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사롭지 않은 별을 보자 곧 길을 떠났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주님의 은총에 절대 순종하는 태도와 헌신의 표현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주님을 찾겠다는 강한 의지와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고난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간절히 원했습니다. 간절히 원했기에 쉬지 않고 광활한 밤하늘에서 주님의 별을 찾았고 단 하나의 작은 별이 출현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주저없이 그 별을 따라 나섰습니다. 갑자기 주님의 별이 사라져 버렸음에도 실망하지 않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물어보았고 끝내 아기 예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소박하고 성실한 영혼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들이 찾아 나선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찾고 주님께 경배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소박한 영혼을 가졌기에 그 넓은 하늘에 아주 작게 잠시 반짝였을 뿐인데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어둡고 좁은 마굿간 한 구석에 아주 작은 모습으로 누워계셨지만 바로 이분이 아기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삶은 주님을 찾는 여정이 되어야합니다.

동방박사처럼 소박하고 성실한 영혼과 주님에 대한 간절함을 지니고, 형제에게 봉사하는 사랑의 계명과 주님 말씀을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수석사제와 율법학자들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믿음이 없었던 동방박사들은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2. 주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소박하고 성실한 영혼으로 주님의 별을 찾아 떠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인도하는 별이 되어주세요.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40대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어렸을 때 일화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새 구두를 맞추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구둣가게에 갔습니다. 수선공은 레이건의 발 치수를 잰 뒤에 구두 앞이 둥근 것과 각진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둥근 것을 선택할지, 남들과 다른 특별하게 보이는 각진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되면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망설이자, 구두 수선공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 그렇다면 일주일 뒤에 구두를 찾으러 오너라. 내가 만든 대로 구두를 신으면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일주일 뒤에 레이건은 완성된 구두를 보고 크게 실망했고 화가 났습니다. 완성된 구두의 모양이 한쪽은 둥글고 다른 쪽은 네모난 짝짝이 구두였기 때문입니다. 이 이 모습을 본 구두 수선공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물쭈물하면서 똑 부러지게 결정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런 짝짝이 신발을 신어야 한다.”

이 경험이 큰 교훈이 되어 레이건 대통령은 남에게 결정을 맡기지 않았고 스스로 신속하게 결정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결정이 놓여 있습니다. 그때 이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는지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미루다가는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선택이 그러합니다. 지금은 일할 때이고 돈 벌 때라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뒤로 미룹니다. 나중에 한가해지고 할 일 없으면 그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뒤로 미룬 선택으로 만족스럽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바로 ‘지금’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신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당신을 드러내셨음은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야 나의 구원이 여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그런데도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온 것입니다. 곧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위해 그 먼 곳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귀한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 이방인인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과는 달리, 헤로데는 자기 지위가 영원하길 바라면서 예수님을 제거할 생각만 합니다. 잘못된 선택이 무죄한 아이들을 살해하는 엄청난 범죄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선택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좋아하실 선물을 마련하십니까? 그 선물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위에 주님의 영광이 떠오를 것입니다(이사 60,1 참조).

교회는 언제나 성경들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하여 왔다(계시헌장, 21항).

​찬송할 때 하느님 체험을 가장 많이 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https://youtu.be/SWjnbXsJs7c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께서 누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가장 중요한 요건이 남았습니다. 바로 ‘경배’의 조건입니다. 지금까지 한 주일 동안 묵상한 것을 다 잊어버려도 오늘 것만 기억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경배’에 모든 조건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경배하다’란 단어는 ‘프로스퀴네오’인데, 직역하면 ‘~ 앞에서 무릎을 꿇다’란 뜻입니다. 전에도 체나콜로에서 만난 페데리코 청년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알코올과 마약 중독으로 체나콜로에 들어왔습니다. 어머니의 간곡한 청으로 세 달만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으로 미사 때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거의 마지막 미사에서 자신도 무릎을 꿇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때 체험한 느낌은 ‘평화’ 자체였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그 평화를 잃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나가고 싶었던 공동체에 3년 이상 머물고 있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찬미하려는 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실까요? 단순합니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자신을 의사로 인정하는 이에게 의사가 됩니다.

한 번은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이러저러한 것을 의사 앞에서 아는 척을 했더니 의사는 당신이 의사냐며 그러면 왜 찾아왔느냐는 듯이 기분 나빠했습니다. 그러면 그 의사의 능력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 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져왔습니다.

황금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황금을 봉헌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모든 것의 주인으로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십일조로 주님을 찬미 하는 이에게 당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더 많은 은총을 퍼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유향은 ‘기도’입니다. 이 말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하느님으로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몰약은 ‘죽음’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으려면 그 상대가 생명이셔야 합니다. 하느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할 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동시에 봉헌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우리가 다윗처럼 우리 자신을 버리고 덩실 덩실 춤을 추며 주님을 찬양할 때입니다. 다윗이 은총을 받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찬양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찬양에서 주님을 만난 것은 남들이 찬양할 때 졸면서였습니다. 신학생 때 창세기 연수에 들어가서 남들이 찬양할 때 졸고 있었습니다. 그때 “갈 길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우리들, 어둡고 컴컴한 곳에 갇혀 있던 우리들. 하느님이 어딨냐며 대들던 우리들. 알려고만 했을 뿐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 ” 이런 가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저는 감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처음으로 찬양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다시 받고 싶어서 지금도 찬양을 듣고 부릅니다.

 

개신교에서는 당연히 찬양할 때 하느님 체험을 가장 많이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찬양을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붓습니다. 이것에 비해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그레고리안이나 모차르트의 곡에 가사를 붙여 부릅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새롭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신자들의 하느님 체험을 위해 주님을 경배하는 분위기를 더 많이 더 자주 더 정성껏 조성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말로만 주님을 알려고 하지 말고 먼저 고백해봅시다. 그러면 주님을 만납니다.

 

"지식채널e"에서 ‘엄마가 울었다’의 제목으로 올라온 동영상입니다. 한 중학교에서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쓰고 오라는 실험 내용이었습니다. 처음엔 어색해 하다가 나중엔 부모님의 보지 못하던 면을 보고 집이 행복한 곳이 되었다는 줄거리입니다.

 

한 아이의 일기는 이렇습니다.

“난 엄마 아빠와 같이 산다. 너무 당연한가? 우린 같이 산 지 얼마 안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엄마 아빠는 오랫동안 같이 살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돌아오셨다. 난 너무 기쁘다.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실 때 ‘엄마가 만든 음식, 매일 먹으니까 행복해요’ 엄마가 울었다. ‘엄마, 왜 울어요?’ ‘아, 양파 때문에 그래.’ 나도 양파 때문에 눈물이 났다.”

 

자녀가 부모를 칭찬하는 것과 우리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같습니다. 부모를 칭찬하니 부모의 참 모습을 보게 된 자녀들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을 찬양하면 하느님의 참 모습을 뵈옵게 됩니다. 그러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에 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먼저 억지로라도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모를 칭찬해 드리십시오. 그분들의 진정한 면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분이 당신 사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늘과 별 그리고 빛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fvYo1cgI9ws

 

​-조재형신부-

제가 태어난 60년대에 주변에서 자주 듣던 말이 있습니다. “잘 살아 보세”라는 말입니다. 노래로도 들었습니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노래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문화, 예술, 스포츠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잘될 겁니다.”라는 말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갑니다. “너 때문이야, 나는 안 돼, 그럴 줄 알았어, 우린 할 수 없어.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라는 말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가톨릭교회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운동이 있습니다. “내 탓이요.”운동입니다. 책임을 전가하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고백의 기도에 나오는 “내 탓이요.”라는 말을 스티커로 만들어서 차에도 부치고 다녔습니다. ‘내 탓이요.’라는 말은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하였습니다. 불신과 비난 보다는 이해와 용서를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1984년에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03위의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과 3학년이었습니다. 저는 행사 진행 요원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시성식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103위 시성식을 상징하는 표어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이 땅에 빛을’이었습니다. 1784년이 시작된 한국 가톨릭교회는 100년이 넘게 박해를 받았고, 10,000명이 넘는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03위의 성인이 시성되었습니다. 성인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 땅에 빛이 되었습니다. 1989년에 제44차 세계 성체대회가 한국에서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과 5학년이었습니다. 저는 괌에서 온 순례자들을 안내하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당시 성체대회를 상징하는 표어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성체대회의 참된 의미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2014년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4위의 시복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구 성소국장이었습니다. 저는 교황방한 준비 위원회 영성신심분과에서 봉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복식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시복식을 상징하는 표어를 정하면서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일어나 비추어라”라는 말이 좋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103위 시성식의 표어가 “이 땅에 빛을”이었기에 “일어나 비추어라”는 124위 시복식의 표어로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복식의 표어는 “일어나 비추어라.”로 확정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병자를 고쳐 주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비추어야 할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나는 안 돼”라는 열등감의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게으름의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남들도 그러는데”라는 비겁함의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늘의 별을 보고서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러 온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멀리 동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아보았는데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헤로데 왕도, 율법학자도, 바리사이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의 별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별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별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욕망의 별을 보았습니다. 교만의 별을 보았습니다. 거짓의 별을 보았습니다. 그런 별들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별은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별을 보고 있다면 우리들 또한 동방박사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드릴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 몰약을 예수님께 선물로 준비했듯이 우리들 또한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공현 대축일을 상징하는 표어는 무엇이면 좋을까요? 오늘 바오로 사도는 “공동상속자”라는 표어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혈연이나, 능력, 학벌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거하고, 신앙의 빛으로 비추어야 참된 상속자가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과 교회는 성탄을 맞으면서 트리를 만들고 그 위에 예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도시의 밤에 많은 십자가가 붉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불을 밝히는 것, 희망의 빛을 비추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주님을 경배하는 참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그분의 별”>

-이영근신부-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 계시되었습니다.”

(에페 2,5)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오늘을 '거룩한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

(이사 60,5)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벅찬 기쁨을 찾아, 동방박사와 함께 임을 찾아나서는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길’은 성경의 핵심 단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고(요한 14,6), 프란치스코 교종은 친구인 ‘한 랍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때, 그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

사람은 걸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느님을 찾으면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찾아 나서도록 허락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길을 떠난 이들’이요, 또 한 부류는 ‘길을 떠나지 않는 이들’입니다.

 

‘길을 떠난 이들’은 빛을 따라나선 동방박사들과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온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멀리 하늘에서 길을 떠나온 아기 예수님이 있습니다.

한편 ‘길을 떠나지 않은 이들’에는 왕궁에 머물러 있는 이들, 수석 사제들, 율법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요?

빛과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일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안전과 편리에 머물러 안주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만나려고 길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나요?

지상이 화려한 왕인가요?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아기 예수 왕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세 번의 ‘길 떠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의 터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길 떠남이요, 두 번째는 헤로데 왕궁에서 마구간으로의 길 떠남이요, 세 번째는 마구간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 떠남입니다.

‘길 떠남’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빛’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별이 나타나 우리를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별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빛을 볼 수 있으며, 그 별을 보는 자만이 그 별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애타게 갈망하고 고대하는 자만이 “그분의 별”(마태 2,2)을 따라 그분을 만나 경배하러 길을 떠납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그분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으로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첫 번째 길 떠남을 위해 우리는 온갖 편리와 안주를 포기해야 했고, 위험과 위기의 십자가도 져야 했습니다.

이 길을 오면서 때로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고 쓸쓸할 때도 있었고, 빛을 놓치고 어둠에 쌓여 길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반항할 때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좌절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했고, 그분이 계실만한 화려한 하려한 왕궁을 찾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 왕궁을 기웃거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처럼 별의 안내를 받아서 이스라엘까지는 왔지만, 메시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찾아 만나는 데에는 “꼭 필요한 한 가지”(루가 10,41)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빛이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마태 2,3)를 이미 “말씀” 속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예언자 미카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미카 5,1)

그리하여 마침내 동방박사들이 “말씀”을 따라 다시 두 번째 길을 떠났듯이, 우리도 ‘말씀을 따라’ 여행 중입니다.

잠시 착각하고 머문 허황한 왕궁인 자기를 떠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향하여 갑니다.

이제 오로지 “참 빛이신 말씀”의 비추임을 따라 걷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 걷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 이 비추는 낮은 곳, 누추한 마구간에서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낮은 곳, 마구간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비로소 ‘참된 빛’이 낮게 엎드린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배 드리는 일, 자신을 땅에 내려놓는 일, 낮아져 예물이 되면 우리 안에 참 빛이 들고, 우리 안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세 번째 길을 떠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안에 탄생한 빛이신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 번째 길을 떠남이 바로 오늘 주님의 공현이 우리에게 이끄는 “길”입니다.

이제는 빛이 되어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은 자신을 채우기 위해 온갖 화려함으로 꾸미고 있는 왕궁을 향해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과 동행하여 빛을 비추며 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분의 별”

(마태 2,2)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빛이 되어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귀한 선물은 우리 자신입니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주님을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기념합니다. 이시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 드리고 예물을 바쳤듯이 우리에게도 주님께 진정한 예물을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탄생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무뎌진 양심이 지금 누리고 있는 자기의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것을 놓으면 자유를 얻을 것인데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립니다. 먼저 내려놓으면 잃을 것이 없는데 주지 않으려 하니까 결국은 누가 빼앗지 않아도 빼앗긴 기분입니다. 오늘의 정치현실도 꼭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헤로데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헤로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임금인데 감히 어디에 다른 임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놀란 것은 저 소리를 들은 헤로데가 어찌 나올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기 말고 다른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2살 이내의 남자 아기를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죄악을 가져온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면서까지 자기 안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권력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로마를 위한 전쟁에 큰 공을 세워서 기원전 47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대성전도 짓고 세금정책도 잘 세워서 백성을 위했습니다. 자기 개인 사치품을 팔아서 백성의 식량도 사들이고 하던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부터 의심증이 생기고 의처증이 생겼습니다. 결국 말년에 가서 폭군으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인 미리암도 죽이고, 장모 알렉산드라도, 장남 안티파테르도 다 죽였습니다. 장남의 두 아들도 그리고 10명의 부인에게서 난 아들들 중에도 왕권을 탐낸다 싶으면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인 욕심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충분한데도 근심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1,15)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야고4,2)라고 말합니다. 결국 욕심을 부리면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욕심은 그나마 지금처지의 행복마저도 거두어 갑니다.

술에 만취한 베드로가 한참 비틀비틀 걷다가 전봇대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더니 전봇대를 잡고 서너 바퀴 빙빙 맴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는 전봇대에 기대어 땅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습니다. “큰일 났군,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렸어!”

살다 보면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욕심이 그 길을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헤로데는 천년만년 권력을 잡을 줄 알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없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것을 움켜잡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십시오.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과거의 전철을 밟고 있으면서도 아무 잘못이 없는 양 당당합니다. 뻔뻔합니다.

동방의 이방인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멀리서 귀한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삶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면,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목적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별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6세기경부터 카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고 불렀습니다)은 믿음이 있었기에 먼 길을 마다 않고 주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혹 예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내가 바치면 예물이고, 남이 바치면 뇌물이랍니다. 감사해서 그저 고마워서 바치면 예물이고, 조건이 붙으면 뇌물입니다. 주님, 이것을 해 주시면 제가 이것을 꼭 하겠습니다. 이것은 뇌물이지요. 우리가 봉헌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물을 봉헌해야지 뇌물을 바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동방 박사들은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첫 번째 예물은 황금입니다. 황금은 왕권을 말합니다. 당신을 왕으로 모셔 순종하고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주인이시고 저는 종입니다.’

두 번째의 예물은 유향입니다. 제사장의 권한, 다시 말하면 그분의 신분이 신적 사제인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신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말합니다. 왕이 죽음을 감당하는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것이기에 불사불멸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미사 때 사제가 봉헌예물을 준비하면서 포도주에 물을 섞으면서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선물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황금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기성화의 모습으로 유향을, 또한 불사불멸에 대한,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삶을 몰약의 예물로 바쳐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에 하나는 선교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예비자 인도를 통해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빛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은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주님을 증언할 의무가 있습니다. 영생에로 인도된 기쁨은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전교는 우리의 소명이고 그래야 믿음이 성장하고 기쁨도 커집니다. 그러므로 예비자를 인도하시고 인도된 사람이 꼭 영세 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 열매 맺는 기쁨을 차지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 한명을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잠시 앞으로 예비자로 인도할 한 사람을 기억하실까요?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게 위해서는 우리가 이 지역사회에서 더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은 앞서는데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빛나게 하는 가운데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각자가 지향하고 봉헌하는 예비자를 기꺼이 받아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후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한 왕의 부탁보다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더 중요하게 받아드려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내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내 계획,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간적인 요구보다도 천상 것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삶의 방향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손길을 꼭 잡으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에게 매이거나 세상 것에 묶여 천상을 놓치는 일은 결코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분 위에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나타나기 바랍니다(이사60,2).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