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43-51)
Nathanael answered him,
“Rabbi, you are the Son of God;
you are the King of Israe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 필립보를 직접 인도하시고 난 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파한다. 나타나엘은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님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받아들이려 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행복은 전염된다고 합니다. 이는 실제로 많은 학자의 연구 조사로 밝혀진 결과입니다. 이 행복은 반드시 접촉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행복이 있으면 전파되어 행복 지수를 높여줍니다. 발표된 내용을 보면, 자신이 행복하면 내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15% 증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자기가 행복하면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10%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은 어떻게 될까요? 0%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6%나 증가한다고 합니다.
결국 나의 행복을 나와 직접적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도 전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가까운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맞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며 예수님과의 만남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자기 생각을 이렇게 쉽게 바꿀 수 있을까요?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도대체 왜일까요?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곧바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神性)이 전달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막고,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타나엘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 역시 변화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집중한다면 분명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변화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느낄 수 있고, 그 행복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자신보다 하느님의 선물을 더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악이다(십자가의 성 요한).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위로 성령께서 내리시는 것을 보고 믿었고 증언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내리는 이를 보는 것이 곧 성령을 받음입니다. 성령께서 내리는 이가 표징이 되고 표징을 보고 믿는 이가 또 표징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아무리 표징을 보아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로 ‘거짓’이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진실했기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라고 하십니다.
거짓이 없는 이는 더 큰 표징도 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여기서 천사들은 성령, 혹은 성령을 담은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거짓이 없는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실까요? 두 가지 이유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거짓말하는 자는 성령의 은총을 오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서 ‘오늘부터 지각 변명은 이렇게’라는 동영상을 보십시오. 학생이 강의에 20분 늦은 것을 변명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변명합니다. 버스에 테러리스트가 탔다거나 코끼리가 나타났다거나 아버지가 좀비가 되었다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웃기자고 만든 동영상이지만, 교수 처지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 학생에게 진심이 담긴 강의가 가능할까요? 왜냐하면 나에게서 배우는 사람은 또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진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거짓이 있는 자에게는 내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은총의 열매는 맞지만, 진리와 하나라서 거짓이 있는 이에게는 은총도 내리지 않아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논문 표절이 예상되는 이를 가르치겠다고 말하는 교수는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이에게 은총이 갈 수 없는 이유는 그 은총을 오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거짓말하는 자는 성령의 은총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과 비슷한 또 다른 형태의 거짓말이 있는데 ‘모른다’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원하는 것이 명확해지면 행동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기 싫어서 모른다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원하는 것을 모른다는 것, 혹은 방향을 모른다는 말도 사실은 거짓말입니다. 그는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본능이 이끌리는 대로 사는 것을 합리화합니다.
영화 ‘앱솔루틀리 애니씽’(2015)은 신적 존재들에 의해 신의 능력을 갖추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남자는 세상에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워 죽겠는 자기가 가르치는 반 아이들을 죽게도 만듭니다. 하지만 다시 살려냅니다. 자기를 싫어하는 교장 선생님의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대통령이 되어보기도 합니다. 또 아래층의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의 방을 훔쳐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그런 능력으로 자기를 좋아하게 만든 여자에게 실연당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능력을 개에게 줘버립니다. 그 능력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용기를 내어 여자에게 식사나 한번 하자고 말합니다.
솔직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게 은총을 받기 위한 시작입니다. 솔직하지 않으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은총을 남용합니다. 거짓말은 은총을 오용하게 만들고 남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거짓말은 은총의 가장 큰 첫 번째 적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벌거벗음과 같습니다. 벌거벗는 장소가 있습니다. 목욕탕이 그렇습니다. 이런 곳에 옷을 입고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벌거벗어야 다른 이의 벌거벗은 몸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벌거벗음, 곧 가죽 옷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가죽 옷을 입으면 에덴 동산에서 계속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죽 옷을 입혀 주셨다는 뜻은 미래에 그렇게 될 예언이고, 실제로는 그들이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리려 했기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표징이 있습니다. 그 표징 속에서 성령의 내리심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벌거벗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하게 주님 앞에 서야 주님께서도 솔직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곧 성령입니다. 성령이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합니다.
-조재형신부-
고부간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아서 힘들다고 합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격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줄 돈인데 몇 달씩 미루다가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시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약속을 정했는데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항상 일찍 도착하는 편이라 짜증이 났습니다. 타고난 성격이 그렇고, 자라온 환경이 그래서인지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남을 바꿀 수 없다면 그러려니 하고 지내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돌아보면 저 역시 타인과 소통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조급한 성격에 정해진 일을 몇 번씩 확인하곤 합니다. 상대방은 저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짜증이 날 때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함께 여행을 가서도 새벽에 일어나 불을 키곤 했습니다. 상대방은 여행 와서도 일찍 일어난다고, 잠을 자는데 깨운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배려심이 부족한 편입니다. 2023년 새해에는 먼저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소통의 강으로 이해의 배가 하느님께로 갈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었습니다. 천사 미카엘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알몸으로 교회 옆에 떨어진 미카엘은 자신을 돌봐준 가난한 구두 수선공과 그의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만하고 교만한 부자가 통가죽을 가져와서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미카엘은 죽은 다음에 신기는 슬리퍼를 만들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깜짝 놀라서 장화를 만들지 않는 미카엘에게 왜 슬리퍼를 만드는지 물었습니다. 슬리퍼를 다 만들었을 때 부자의 시종이 와서 장화는 필요 없고 슬리퍼를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미카엘은 미리 만들어 둔 슬리퍼를 주었습니다. 부자의 옆에 죽음의 사신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앞날을 모른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미카엘은 쌍둥이 자매를 위해서 신발을 사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인은 고아가 된 쌍둥이를 돌보았습니다. 한 아이는 다리를 절었지만 그 아이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미카엘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023년에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면 좋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일로 미리 걱정하기 보다는 오늘 주어진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톨스토이가 이야기하기 전에 성서는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극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톨스토이는 3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라고 합니다. 지나간 과거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2023년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 하느님의 날개 아래 서 있던 사람, 하느님의 얼굴을 찾던 사람!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나자렛은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동네, 기대할 것이 없는 낙후된 고을이었던가 봅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나타나엘은 최근 사람들 사이에서 희자되고 있는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소식을 듣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는 즉시 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접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자렛이라는 마을은 보잘 것 없는 동네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고 온 필립보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나타나엘을 초대했는데, 나타나엘의 반응은 완전 시니컬합니다.
“나자렛에서 무든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러나 필립보의 거듭된 초대와 강권에 마지못해 나타나엘은 필립보를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한 마디로 상황은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당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나타나엘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평소 좀체 사용하지 않으셨던 극도의 칭찬을 건네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런 예수님의 칭찬을 통해 우리는 나타나엘의 인간 됨됨이, 그의 깊은 신앙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 그 어디를 봐도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대단한 칭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나타나엘을 다른 무엇에 앞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 서 있던 사람, 하느님의 날개 아래 서 있던 사람, 하느님의 얼굴을 찾던 사람, 하느님 나라를 간절히 고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은 생각은 물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던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을 봐서 나타나엘은 신앙의 정도를 걷던 사람, 다른 이들의 이정표요 귀감인 사람, FM 신앙인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빈말을 하신다거나 없는 것을 애써 꾸며 말씀하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탁월했던 모범생 신앙인이었던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더 큰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토록 우리가 그리워하고 꿈꾸던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을 약속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하늘나라의 아름다움, 감미로움, 그곳에서의 평화로움, 잔잔함, 행복을 맛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안드레아의 증언을 들었는데, 오늘은 필립보의 증언과 나타나엘의 증언을 듣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을까?
오늘 복음은 그들이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 그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들었을 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하며 핀잔을 주며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와서 보시오”(요한 1,46)라는 필립보의 확신에 찬 초대에 따라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두렵고 떨리는 ‘만남의 순간’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요한 1,47)
예수님의 신적인 전지함, 곧 ‘거짓이 없음을 보는 거짓이 없는 눈’, ‘진실을 보는 눈’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하고, 당혹할 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이는 예수님께서 그를 “보았다. 알았다”는 예지적인 면만이 아니라, ‘내가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랑의 측면을 말해줍니다.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 ‘진실을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 그것은 사랑의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말끔히 사라지고, 마침내 믿음과 감격이 샘솟았습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 나타나엘은 비로소 메시아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을 뵙는다면,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바로 이 분이 나를 온전히 아시는 나의 구원자요, 주님임을 보았습니다.
이를 오늘 독서에서 요한사도는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3,19-20)
비로소 나타나엘은 눈이 맑아지고 환해져 깨달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입술을 타고 신앙고백으로 흘러나옵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49)
이렇게 해서 대전환이 발생한 것입니다.
‘진실을 바라보는 눈’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이제 대역전이 생긴 것입니다.
‘진리’가 그를 전복시켰던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그가 ‘주님을 만난’ 까닭입니다.
동시에 주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심연으로부터 만난 까닭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만남의 신비’가 믿음을 불러오게 되었고 그를 전환시켰습니다.
그리고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진실을 보는 눈’을 지니고,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주님!
저를 주목하여 바라보고 계신 당신 눈동자 안에서 진정한 제 자신을 보게 하소서.
제 눈이 맑아져 거짓 없는 진실을 보게 하소서.
하늘이 열리고 진리를 보게 하소서!
제 마음에 거짓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이 퍼부은 사랑을 퍼 올리게 하시고, 당신 만남의 거룩한 신비를 담아내게 하소서!
아멘.
~ 친구따라 강남? 친구따라 주님?
- 김찬선 신부님 ~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오늘 복음은 제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얘기입니다.
성탄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와서 보는 제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고,
이제 곧 공현 축일을 지낼 터인데 주님께서 점차 공적으로 드러나시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필립보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고,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소개하는데
나자렛 출신임을 이유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나엘이 부정하자
그래도 “와서 보라”고 권유하고 나타나엘은 마지못해 그 권유를 받아들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경우에 따라 안 좋은 말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친구 따라 성당에만 왔다 갔다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친구 따라 주님께 간다면 얘기가 다릅니다.
이때 친구는 주님께로 가는 징검다리 또는 사다리입니다.
필립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소개했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고 친구라고 해도
껄렁껄렁한 친구였다면 도무지 갈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진실한 친구였고
사랑하기에 주님을 소개했다고 생각하고 믿었을 것이고,
이때까지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은 믿을 수 없어도
친구는 믿을 수 있었고 친구의 사랑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들을 본보기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필립보처럼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어야 하고,
나타나엘처럼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가서 보고는
같이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길을 같이 가는 동반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신앙의 역사 안에는 이런 관계가 참으로 많습니다.
서로 인도자와 동반자가 되는 경우요,
홀로 성인이 되지 않고 같이 성인이 되는 경우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안드레아를 비롯한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분도 성인과 스콜라라스티카 성녀,
이냐시오 성인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
클라라 성녀와 같이 수도자가 되고 성인이 된 그의 동생들이 그러했지요.
이런 관계들을 보면서
저는 이런 관계가 부러우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와 저의 형제들은 이런 관계인지,
저의 공동체는 이런 관계로 형성된 공동체인지,
수도 공동체뿐 아니라 지금 제가 하는 일을 통해서 만난 분들도,
그저 일의 동업자일 뿐인지 주님께 함께 가는 동반자들인지 성찰할 때
저는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닮지 못해도 한참 닮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닮기로 마음먹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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