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월 3일 주님 공현 전 화요일

Margaret K 2023. 1. 3. 06:19

2022년 1월 3일 주님 공현 전 화요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요한 1,29-34)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He is the one of whom I said,

‘A man is coming after me who ranks ahead of me

because he existed before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자녀는 그분을 뵙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자신을 순결하게 하려고 애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981년 미국 대통령 로널드 윌슨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은 존 힝클리(John Warnock Hinckley Jr.)가 쏜 총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실려 가면서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예전처럼 영화배우였다면 잘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병원에 도착해서 간호사가 지혈하기 위해 손을 몸에 대자, “아내 낸시에게는 허락받았나요?”라고 말했고, 수술 의사들에게는 “당신들이 공화당원이면 좋겠네요.”라면서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습니다. 사실 당사자인 레이건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죽음의 문턱에서도 여유를 보여줌으로 인해 사람들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83%의 높은 지지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지지율이 30%로 떨어지자, “또 한 번 총 맞으면 되지, 뭘.”이라고 걱정하는 참모진에게 말한 것도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렇게 그는 유머로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만약 자기 자신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유머를 보일 수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주변을 배려하는 말을 통해 자신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고, 그것이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면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자기 PR 시대라고 하면서 나를 드러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하지만, 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을 드러내는 데만 최선을 다합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를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광야에 나가 메뚜기와 벌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만 베풀 뿐이었습니다. 좋은 옷과 좋은 음식 한 번도 취하지 않고 철저하게 예수님께만 시선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1요한 3,6)라는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했던 분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역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만을 증언하고 높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높이는 방법은 주님을 높이고 증언해야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대여, 그대가 갖지 못한 것을 상상함으로 인해서 그대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훼손하지 말라. 그대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은 과거 한때 그대가 갖기를 열망했던 것임을 잊지 말라.”(에피쿠로스).

​겪어보면 보이고 사랑하면 제대로 보인다

-전삼용신부-

https://youtu.be/tAg1T-isHn0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입니다. 공현은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주님 공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서 드러내 보이셨어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려고 하는 이들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면 먼저 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보라고 하는 이유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라고 말합니다. 보아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체를 보면서도 아직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보지 못하는 이유는 겪어보지 못해서이고, 겪어봐도 오해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예전에 합천 우체국에서 택배 배달이 시작되면 이런 문자가 보내집니다.

“***님이 보낸 택배 배달 예정. 합천 우체국 오세용.”

문자를 받은 많은 사람이 왜 오라 가라 하느냐며 항의 전화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배달 예정 문자를 보낸 분이 우체국 직원 오세용씨입니다.

이렇게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겪어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제대로 보게 됩니다.

 

아주 오래전 컬투쇼에 나왔던 사연입니다. 어느 여학생의 집 근처 주유소에서 알바 하는 남자 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어 보고 싶기도 하고 눈 도장도 찍을 겸 매일 휘발유 1리터씩을 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연쇄 방화 사건이 터지고 경찰들이 조사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주유소 알바생은 그 여학생이 유력하다고 증언해 1차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 남학생이 여학생을 사랑했다면 그렇게 용의자로 볼 수 있었을까요?

 

하느님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겪어봐야 합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에서 겪어본다는 말은 ‘머문다’는 말과 같습니다. 겪어 ‘본다’라고 하듯, 머문다는 말은 ‘본다’라는 말을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요한은 묻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그리고 믿음이 생긴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머물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야 머무는 힘을 줍니다. 요한과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었던 이유가 예수님의 이 질문에 들어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예언자 시메온과 안나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 희망이 그들을 성전에서 평생 머물게 하였고 그들의 눈을 열어주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였습니다. 바라면 머물게 되고 머물면 보게 되고 보면 믿게 됩니다.

 

페르시아 전쟁 때 장군 마르도니우스가 막대한 보물을 파 묻어 놓고 전사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테베 사람이 보물을 찾으려고 신전에 빌자 제우스가 말합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돌을 뒤집어보라.”

노력하지 않고 찾으려 하는 것은 진짜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면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것에 머물게 됩니다. 하루에 성경 5분도 안 읽고 기도 5분도 안 하며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머문다고 다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부가 오래 같이 살아도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를 모릅니다. 내 안에 있는 것만, 혹은 보려고 하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본당에 와서 평일 미사에서도 봉헌금을 걷겠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자 이것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저를 잘 알고 오랜 세월 알아 왔는데도 혹시 돈을 많이 걷어 제가 어떤 업적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성전도 최소한으로 지어야 하고 성당에서 걷은 돈은 다시 신자들과 선교를 위해 다 쓰여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그분은 제가 돈을 많이 걷어서 저의 영광을 위해 쓴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저를 사랑했다면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식의 도구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어둠이 가득 차 있으면 어둠만 보이고 빛이 있으면 빛이 보입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그 안에 넣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보려는데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보려 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성령을 봅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봅니다. 요한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있기에 성령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하고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을 볼 수 없을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랑을 증가 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려면 머물려야 합니다. 머무르되 사랑을 증가 시키며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볼 것이고 보면 증언하게 됩니다. 요한 복음 9장에 예수님은 태생 소경의 눈을 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으로 갠 진흙으로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는데 당신께서 성령으로 영적인 눈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도 볼 줄 안다고 말하면 죄인이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볼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매주 가톨릭평화신문을 읽는 것은 마치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 같은 기쁨입니다. 오늘은 지난 12월 25일자 신문에서 읽은 지면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이호자 수녀님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현대 신앙인에게 3가지 기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기도하지 않고 성서를 읽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선교를 하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위 두 가지를 다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꽤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도 뉘우치지 않고, 죄를 지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쓸모없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2023년 새해에는 신앙인의 맛과 멋이 드러나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안희숙 엘리사벳 자매님께서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느낀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고국에 신앙이 전해진지 200년의 시간, 하느님을 가슴에 품어 안고 말없이 죽어간 순교자들! 100년의 길었던 박해 동안 피를 뿌려 흘린, 흘러 적신 이 강산 골짜기 구석구석 돌아보니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그들의 힘겨운 발차취가 남겨져 있고 피로 증거한 삶의 터에 ‘교회’라는 신앙의 두 글자 남아 하느님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게 합니다. 죽어가면서도 절절히 부르던 예수, 마리아! 그 모습 선연하고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사람 존재의 목적이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그들은 자기 존재 목적을 어찌 그리 명백히 알았을까요?

 

안 믿는다는 말 한마디면 족했을 텐데, 양반뿐 아니라 천민, 노비, 상인들의 비천한 신분으로도 하나뿐인 목숨을 신앙이랑 바꾸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입니다. 한지에 물 묻혀 얼굴에 덮어 씌워 질식해 죽어가고, 태형에 아사형, 산 목숨을 굴비 엮듯 엮어 물에 수장하고, 하천 모래구덩이에 선 채로 생매장, 숨져가면서도 아니 두 다리 붙잡혀서 도리개질, 태질을 당해도, 높은 곳에 목 잘려 참수를 당해도, 살아 못 섬길 천주를 죽음으로 섬긴 분들입니다. 임금께 받은 하해지택을 대역죄인, 능지처참으로 바꾼 황사영, 27세 젊은 목숨 천주께 바치고 그 아내 정난주 마리아가 걷던 긴 귀향길, 추자도에 떨군 갓난아기, 어미의 가슴에 박히운 대못은 몇 자 였을까요?

 

또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가 겪던 아픔은요? 가슴에 깊이 파고들어 처절한 슬픔마저 느낍니다. 어찌 한 마디의 말, 느낌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가 금자를 가지고 우리 발자국을 재고 있습니다. 형제여, 힘을 내십시다.’라고 했던 최경환 성인이 있습니다. 그저 침묵할 뿐입니다. 그분이 손잡아 주시고 함께 해 주신 길, 제 신앙의 뿌리, 제게 전해진 신앙의 향기가 얼마나 진한 핏빛 내음인지 마음으로부터 아려오던 날들이었습니다. 인생은 만남이라지요, 만남은 은총이라고요. 제가 만난 하느님, 은총 중의 은총, 금총입니다. 순교자들의 삶의 터, 치명지, 무덤 앞에서 마음 안으로 숨어들던 생각들, 내 삶은 하느님을 살고 있는가?” 저도 성지순례를 많이 다녔지만 이렇게 진한 감동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2023년에는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로 지켜온 신앙을 우리들 땀과 노력으로 이어가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증언했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주님을 증언하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하느님이 여기 우리 곁에 계십니다!

-양승국신부-

 

돈보스코께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위대한 사업이 최초로 시작된 장소는 이탈리아 토리노시 외곽 발도코라는 장소입니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요셉 코톨렌고 성인이 시작한 피콜라 카사(Piccola Casa)라는 대단위 종합사회복지시설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기에, 산책삼아 종종 들렀습니다.

 

시설 이름이 지닌 의미는 ‘작은 집’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부랑인들, 중증 장애인들, 불치병 환자들, 정신질환자들 등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수용되어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인생의 막장에 와있는 환자들이 많다 보니 여기저기 시끌벅적 요란스럽습니다. 그런데 가끔 분위기가 숙연해지며, 동시에 환자들의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편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천정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정기적으로 세상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입니다. 따뜻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듣는 모든 사람들의 긴장된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줍니다.

 

“하느님이 여기 우리 곁에 계십니다!”

 

임마누엘 하느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이 대명제는 이론이나 희망 사항이 절대 아닙니다. 명확한 실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권능과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도 확고한 하느님 현존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큰 목소리로 확신을 갖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복음 1장 29절)

 

만일 세례자 요한이 꾸준히 깨어 기도하고 있지 않았다면, 맨날 먹고 마시고 흥청대면서 세상 것이 잔뜩 몰입되어 있었더라면, 엉뚱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메시아라고 외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깊은 광야 속으로 들어가 내공을 충분히 닦았기에, 몸에 밴 극단적 청빈 생활을 기반으로 한 맑은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때가 차자 등장하신 메시아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세례자 요한은 겸손의 덕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저 뒤에 오실 주님을 위한 보잘것없는 작은 도구요 이정표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지속적 겸손의 덕은 어디에 주님이 계시는가를 살펴보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한 일이라기에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사회복지사업 운동을 일으킨 요셉 코톨렌고 성인이었지만, 그 역시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가 살아생전 남긴 말입니다.

 

“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저는 제가 누군지도 어떻게 돼 먹은 인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주의 섭리 작은 집’ 사업은 분명하게 제 일입니다. 이 단체를 지원하는 일이 제 일입니다. 자, 주님 안에서 나아갑시다.”

 

요셉 코톨렌고 성인은 자신이 모시고 있던 가난한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 앞에서 그는 항상 자신을 ‘천주 섭리의 일꾼’이라고 불렀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이 세례자 요한의 신원과 사명에 대한 말씀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한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말해줍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로 ‘양’(탈리야)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어린 양’(하말), ‘새끼 양’, ‘아기’(아들)을 의미하는데, ‘지고 가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나무, 과일 또는 임신한 여인이 아이를 ‘지고 간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시 ‘양’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동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어린 양’이란 ‘속죄양’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 양을 상징합니다(출애 12,1-13).

둘째로, ‘어린 양’이란 ‘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라고 하듯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종’인 메시아를 상징합니다(이사야 53장).

그러니 ‘어린 양’이란 표징에는 인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고 있으며, 동시에 세상의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은 자신이 체험한 환시를 통해 보고 들은 바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요한 1,32)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요한 1,33)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그에게 돌아와 새 시대를 알렸듯이, 이제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어린 양의 흰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께서 성령을 통하여 입이신 옷입니다.

속죄양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깨끗이 빨아 입히신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어린 양’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은 대속으로 자신을 내어놓기에 억울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봉헌’이기에 지향이 있는 삶이요, 향하여 바치는 삶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진정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피어나고 있고, 그분을 향하여 바치고 있는 봉헌된 삶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 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 12,1)

 

 

<오늘의 말 · 샘 기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

 

주님!

죄를 탓하기보다 스스로 짊어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 하늘을 여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기꺼이 바치는 삶이기에, 그 어떤 억울함도 원망도 없게 하소서.

위하여 내어놓는 제 삶 안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모르는 것을 아는, 모르지만 믿는

-김찬선 신부​-

 

어제 복음에서 “너희 가운데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고

말한 세례자 요한이 오늘은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제는 누구신지 알게 되었지만, 전에는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고,

모르다가 알게 되기까지 사이에 성령의 작용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하느님도 그렇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도 그렇고,

사람들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성령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A.I(인공 지능)는 하느님을 얼마나 알고 있고, 어떻게 알고 있을까?

우리 인간보다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잘 알고 있을까?

 

몇 년 전 인간의 지능과 인공 지능 간의 대결이 바둑을 통해 이뤄졌고,

인간이 인공 지능에게 진 것이 크나큰 충격을 준 적이 있었으며

그때부터 바둑 해설을 할 때 인공 지능의 해설을 꼭 곁들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인공 지능이 우리보다 하느님을 더 잘 그리고 많이 알까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공 지능이 더 잘 알고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아니라

인공 지능의 증언에 의지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만일 그런 것이고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 믿음도

성령이 아니라 인공 지능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신학자들 안에서 인공 지능 시대의 신앙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고,

그래서 과학과 신학의 활발한 교류가 이뤄져야 하겠지만

현재의 저의 생각으로는 인공 지능이 신앙의 부분에 답할 수 없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인가?’와 같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도 인공 지능이 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지적인 앎이나 과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영역이기 때문이고,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다른 부분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모르는 것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안다고 까불다가 믿지 못하고,

아는 것이 전부라고 믿다가

정작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조금 아는 것을 믿으면 난리 납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나 자기 꼬라지를 아는 사람,

아니, 인간의 꼬라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알고,

인간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야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하느님임을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가 아니고 하느님임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와 영적인 존재는 이 세상 너머의 것이니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성령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세례자 요한처럼

모르는 것을 아는,

모르지만 믿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