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Margaret K 2023. 1. 1. 06:15

 

2022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세계 교회의 보편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평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 평화의 선물을 청한다.

☆☆☆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6-21)

 

When they saw this,

they made known the message

that had been told them about this child.

All who heard it were amazed

by what had been told them by the shepherds.

And Mary kept all these things,

reflecting on them in her hear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모세에게 이르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953년 미국 예일대는 졸업생들에게 장차 이루고 싶은 꿈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만이 인생의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을 써서 제출했다고 합니다. 97%는 그저 생각만 하고 있거나 생각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사했더니, 놀랍게도 3%의 졸업생이 나머지 97%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1979년에 하버드대에서도 똑같은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같았습니다. 3%가 나머지 97%보다 무려 10배나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분명히 큽니다. 실제로 심리학에 ‘자기실현적 예언 효과’라고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발언하면 거기에 맞춰 자신의 태도를 변경하는 경향이 있어서, 실제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은 씨가 된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표를 세우고 이를 말로써 계속 밝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목표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목표 자체를 세우지 않아서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면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2023년 1월 1일. 계묘년이 밝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목표를 세웁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뚜렷한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목표, 헛된 목표, 남과 비교하는 남의 목표만을 세워서 자기만의 뚜렷한 목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며 성모님의 모습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성모님의 목표 역시 아들의 목표인 인간 구원에 동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 후에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 이렇게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섣부른 판단보다는 늘 곰곰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과연 어떤가요? 자기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주님과 함께 할 것인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목표보다, 주님과 함께하는 목표를 곰곰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여러 개의 꿈을 조율하고 변주해 가는 과정, 그러면서 때로 기뻐하고 때로 절망하는 과정이 성장일 것이다(한지혜).

하느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삼용신부-

https://youtu.be/ZHFuwCFkybc

 

​오늘은 새해의 첫날이고 그만큼 큰 은혜의 선물을 받는 날입니다. 그 은혜의 선물이란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다니, 이 얼마나 벅찬 기쁨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겁할 일인데 그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니, 이 큰 사랑을 우리는 새해의 첫날부터 찬미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교의는 네스토리우스 주교가 성모님은 그저 인간 예수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해야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라 하느냐는 주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단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인간이라고 해도 되지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해서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불붙은 떨기 나무의 불과 나무처럼,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숯불은 나무와 불이 서로 다른 두 본성이지만 결국 하나 입니다. 숯불은 숯이기도 하고 불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그저 선악과를 따 먹으면 벌을 줄, 그런 분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부모의 지위까지 올려주실 사랑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앞에서 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면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아담과 하와의 불신의 죄를 그대로 짓는 것입니다. 밀가루까지 하느님으로 만드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신성은 우리 인성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진심이 될 수 없습니다.

 

천연두로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흉터 자국을 가친 채 도시로 이사 온 그레이스는 친구들에게 ‘괴물’이란 놀림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상처 받아 울고 있는 그레이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어렸을 적에 천연두라는 큰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단다. 그 병은 네 오빠와 동생의 생명을 빼앗아 갔지. 이웃의 많은 아이도 죽었단다. 하지만 하느님이 너만은 살려주셨단다. 네 얼굴에 생긴 상처는 하느님께서 네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표징이란다.”

 

그레이스는 엄마의 말을 믿었고 누구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녀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였고 잘생긴 남학생과 결혼하여 미국 하원의원까지 지냈다고 합니다.

그레이스가 어머니를 공경하고 기념하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나는 괴물이야!’라고 자기 비하를 하는 것일까요? 어머니의 말을 믿고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만약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고 하느님은 될 수 없다고 믿으며 같은 인간으로서 하느님 어머니의 지위까지 올라가신 성모님을 공경한다면 말이 될까요? 성모님은 지금 인간이 어떤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머니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아수라’란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인육까지 먹는 사람이 생길 정도의 기근이 들었을 당시 한 어머니가 아기를 낳습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살리려는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길에 쓰러진 사람의 고기까지 먹습니다. 아기도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으며 자랍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아이 눈에는 모든 사람이 고기로 보입니다. 그래서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이때 그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스님과 한 여인입니다. 스님은 제발 인간이 되라며 자기 팔을 잘라줍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기에 아수라는 인육을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구해준 여인이 굶어 죽어가자 말을 죽여 고기를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 고기가 인육인 줄 알고 죽기까지 먹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수라는 굶어 죽으면서도 동물의 수준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는 여인과 자기가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팔까지 자른 스님에 의해서 이제 타인을 구제하는 스님이 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셨습니다. 모기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면 아수라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한 공경이었듯이 우리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인간이기를 포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품은 여인이요, 하느님을 낳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공경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기를 믿으신 분 앞에서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믿음으로 공경한다고 하는 거짓 기도를 하지 맙시다.

​평화의 복음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6w4tqu5lEDc

 

​-조재형신부-

2023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새로운 한 해에도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이 모두 잘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은 계묘년 토끼띠의 해입니다. 저는 토끼띠이고 생일은 5월 16일입니다. 토끼가 좋아하는 풀이 자라나는 때에 태어나서인지 크게 부족함은 모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고, 형제들과는 원만하게 지내고 있으며, 무엇보다 부모님께서는 신앙을 물려 주셨습니다. 어려서 토끼에 대해서 들을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토끼와 거북이’입니다. 토끼는 잘 뛰는 동물이고, 거북이는 느린 동물입니다. 잘 아는 것처럼 잘 뛰는 토끼는 한참을 먼저 가서 느긋하게 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느린 거북이는 쉬지 않고 걸어서 토끼보다 먼저 결승점에 도착했습니다. 새해에는 능력이 있다고 먼저 가기 보다는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쉬는 교우가 있다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긴 이웃이 있다면 깨워서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가면 좋겠습니다. 저도 토끼처럼 자만하지 않고, 주어진 일이 있다면 충실하게 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겠습니다.

 

토끼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겁 많은 토끼’입니다. 어느 날 토끼가 낮잠을 자는데 나무 위에서 도토리가 떨어졌습니다. 겁이 많은 토끼는 지진이 난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물어보니 지진이 낮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동물들도 모두 토끼를 따라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왜들 그렇게 뛰어가는지 물었습니다. 토끼는 지진이 났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그럼 그 장소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도토리 하나가 떨어져있었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태산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였습니다. 새해에는 거짓이라는 도토리에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시기와 질투라는 도토리에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다! 아니야 내가 그리스도다!’라며 나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동요하지 마라.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새해에는 부화뇌동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토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별주부전’입니다. 용궁으로 갔던 토끼이야기입니다. 바다에 사는 용왕이 병이 들었습니다. 토끼의 간을 먹으면 좋아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거북이는 육지로 와서 토끼를 감언이설로 속여서 용궁으로 데려갑니다. 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토끼는 기지를 발휘하여 간을 집에 놓고 왔다고 합니다. 결국 거북이는 토끼를 육지로 데려다 주었고 토끼는 도망을 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유혹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을 한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사탄들은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술과 도박으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재물과 권력으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가장 큰 방법은 ‘다음에 하지’라는 생각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멀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새해에는 뒤로 미루기보다는 행동으로 옮기는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토끼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지능지수로 보는 산토끼의 반대말은 알아보겠습니다. (지능지수 30의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 끼토산, 지능지수 50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은 집토끼, 지능지수 80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은 죽은 토끼, 지능지수 100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은 바다토끼, 지능지수 12의 산토끼의 반대말은 판토끼, 지능지수 150의 산토끼의 반대말은 알칼리 토끼) 새해에는 우리의 신앙도 성숙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길가에 떨어지는 신앙이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자갈밭에 떨어지는 신앙이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가시밭에 떨어지는 신앙이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기름진 밭에 떨어져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 있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2023년 새해를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2023년에는 모두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천주의 모친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또한 새해 첫 날, 모든 날들의 어머니인 날입니다.

대축일을 축하드리며, 세배도 드립니다.

“축복의 멋진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 모후이신 마리아)의 신비를 잠깐 보고자 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사건, 이를 두고 우리는 ‘강생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시는 일’, ‘인간이 하느님을 낳은 일’, 곧 ‘인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강생을 담은 신비로운 그릇인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란 호칭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우선 낳은 아기가 ‘하느님’이라는 신원의 정체성을 드러내줍니다.

곧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줍니다.

동시에 그 어머니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됨을 말해줍니다.

 

이에 교회는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그리스도는 참된 ‘하느님’이며, 따라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장엄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이 호칭을 직역하면, ‘하느님의 어머니’라기보다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Θεο(하느님)+τοκοσ(아기를 낳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마리아가 하느님과 동급인 신적인 존재이거나 또는 하느님보다 더 위대한 존재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말이 아니며, 혹은 성부 하느님의 어머니도 성령의 어머니도 아니며, 단지 인간이자 피조물이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성자의 어머니’를 뜻하며, 성자의 강생을 비추어줍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오랫 동안 기다려 온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시는 분’, ‘다윗과 같은 임금으로서의 메시아’로 드러납니다.

곧 예수님은 ‘새 다윗 임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다윗 왕가의 자손’(마태 1,1)임을 밝히며, 마리아는 ‘임마누엘의 어머니’(마태 1,6)로 증언됩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의 눈으로 보면, 마리아는 ‘왕실의 모후’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가 ‘다윗 왕조의 임금인 예수님의 어머니’라면, ‘왕의 어머니인 여왕 혹은 모후’로 부르는 것이 합당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서구 근대의 왕국에서 ‘여왕’이라는 호칭은 왕의 아내를 지칭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여왕’ 혹은 ‘왕비’란 왕의 아내가 아니라 ‘왕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태후’ 혹은 ‘모후’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왕의 어머니는 ‘모후’로서 영예를 누리며 공경을 받았으며, ‘왕관’을 쓰고 ‘왕 오른편에 놓인 왕좌’에 앉아 왕과 함께 다스렸고, 왕에게는 가장 유력한 ‘전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1열왕 2,13-18),

따라서 마리아가 ‘그리스도 왕국의 모후’라면 그리스도인들이 ‘모후’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마땅하며, 또한 임금이신 예수님께 우리를 위해 ‘전구’해주시도록 기도드리는 것도 합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마리아를 ‘공경’하고 ‘전구’를 청하는 전통은 ‘그리스도 왕국의 천상 모후’라는 마리아의 정체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마리아 공경’과 ‘하느님 흠숭’의 차이점을 드러내줍니다.

곧 마리아를 공경하고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되, 하느님처럼 ‘흠숭’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마리아를 흠숭하고 숭배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요 우상숭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예레미아서(7,17-18)에 나오는 ‘하늘여왕에게 과자를 만들어 바치고, 다른 신들에게 술을 부어 바치는’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공경’과 ‘흠숭’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 ‘흠숭’의 본질은 희생제사였습니다,

곧 공경하고 간청을 드리고 찬가를 드리는 것은 영웅이나 위인들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 있지만, 희생제사는 오직 하느님께 유보된 것이었습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에서 특별한 공경으로 당연히 공경을 받으신다.

사실 오랜 옛적부터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로 공경을 받으시고, 신자들은 온갖 위험과 곤경 속에서 그분의 보호 아래로 달려 들어가 도움을 간청한다.

... 공경은 교회 안에 언제나 있었던 그대로 온전히 돈독한 것이지만, 강생하신 말씀과 똑같이 성부와 성령께 보여드리는 흠숭의 공경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또한 그 흠숭을 최대한 도와준다.”

(971항)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예배’와 ‘흠숭’은 무엇보다도 ‘성찬례의 희생제사’를 바치는 것이며, ‘성찬례’는 오직 하느님께만 바쳐집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곧 ‘모후’로 공경하지만, 결코 마리아를 하느님처럼 ‘흠숭’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과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의 결정적인 차이점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의 축일을 축하드리며, 새해 축복을 빕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9)

 

주님!

지난 한 해 동안 당신이 하신 일, 그 큰 자비를 제 마음 한가운데 새겨 주소서.

그 자비가 제 중심이 되고,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 자비를 늘 맨 첫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올 해도 그 자비가 날로 커지고, 그 기쁨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