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바 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오늘날의 터키 카파도캬)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 영광스러운 가문의 출신이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였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다. 379년 무렵 선종하였다.
그 레고리오 성인 역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이 뛰어났으며,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90년 무렵 선종하였다.
☆☆☆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19-28)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desert,
‘Make straight the way of the Lord,’
as Isaiah the prophet s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1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적’ 문제를 계속해서 다룬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신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으므로, 이 서간은 신자들에게 그들을 조심하며 배운 신앙에 항구하게 머물 것을 권고한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은 유다인들이 보낸 이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자기는 그분의 길을 마련할 뿐이며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을 알려 준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모습에 감탄합니다. 거리가 깨끗하다는 것, 화장실도 너무 청결하다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쇼핑몰 같다고, 지하철도 너무 편안하다고, 음식도 맛있고 사람들의 인심도 너무 좋다는 식의 칭찬 일색입니다.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모습이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저는 건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부위가 생겨서 수술해야 했습니다. 수술 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건강했을 때 얼마나 감사했는가?’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건강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결핍을 체험해야 감사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결핍을 체험하기 전에 미리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조금 더 힘차게 그리고 현재의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그토록 이스라엘이 기다려왔던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어떻게 알았는가? 당신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가 바로 ‘나’ 맞소.”라고 말만 해도 사람들의 엄청난 섬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답변하지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이렇게 답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몫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였기에 예수님을 가장 잘 준비할 수 있었고, 교회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으며, 기쁘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힐 때 다른 쪽 행복의 문이 열린다. 하지만 닫힌 문만 오랫동안 바라보기 때문에 새로 열린 문은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헬렌켈러).
-조재형신부-
요즘은 처음 가는 길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방향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자칫 길을 놓쳐서 다른 길로 갈지라도 내비게이션은 곧 새로운 방향을 알려줍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발달해서인지 더 빠른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합니다. 내비게이션은 인공위성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받아서 목적지를 향해서 갑니다. 202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나라를 향해서 길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식별’이라고 합니다. 먼저 우리의 올바른 식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교만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욕심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자신의 포도밭이 충분히 있으면서도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았습니다. 게으름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인색이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질투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하였습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하였습니다. 분노가 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서 공든 탑을 쉽게 무너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해에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영적인 장애물들을 피하면 좋겠습니다. 영적인 장애물을 피하는 것이 바로 ‘식별’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식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을 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 할 때는 식별을 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 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든 식별의 시간이 왔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넷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2023년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함에 겸손의 덕까지 더한 세례자 요한!
-양승국신부-
세례자 요한이 등장으로 인해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바짝 긴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종래 예언자나 지도자들과는 다른 촌철살인의 설교와 함께, 구름 군중을 불러 모으며 유명세를 떨쳤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찬밥 신세인데, 다들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가고,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심기가 엄청 불편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두고 유다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 설왕설래도 많았을 것입니다.
“보아하니, 오시기로 된 메시아가 분명해!” “입고 다니는 옷을 봐. 초라하고 남루한 행색을 봐서 그럴 리가 없어.” “그런데 신선하고 거침없는 언변에, 강력한 카리스마에, 메시아가 맞을지 몰라.”
고민 끝에 그들은 사제들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 그의 정체를 파악하라는 미션을 줍니다. “당신은 누구요?” 질문에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세례자 요한은 길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딱 잘라 본론만 말하는데, 그야말로 솔직담백함의 극치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복음 1장 19절)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복음 1장 23절)
뿐만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솔직함에 겸손까지 더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복음 1장 26~27절)
구약시대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대 예언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정체,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하늘을 찌르는 인기 앞에 조금도 우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유효 기간이 언제까지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떠날 순간이 왔음을 인지하자, 단 한 순간도 지체 없이, 그 어떤 미련도 없이, 잘 마련된 무대를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넘겨드린 다음, 신속히 구세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뭐 그리 아쉬움이 많은지, 미적미적, “아직 떠날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어요. 좀 더 있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바람처럼, 구름처럼, 홀연히 떠나가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입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자기 증언입니다.
광야에 살면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들과 레위인들에게 반복해서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 1,19.21.22)
이 질문은 단순히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메시아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당신의 관계는 무엇이요?” 라는 질문입니다.
요한은 그분과 관련하여, 자신의 신원을 부정과 긍정을 통해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요한 1,20)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23)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구세주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증거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언하고 증거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가 그리스도를 스승이나 주인으로 따르기보다 자신을 스승이나 주인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는지,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자신을 존경하도록 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이고, 앞서가는 자가 아니라 뒤따라가는 자입니다.
주인이 아니라 속해 있는 자요, 판단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응답해야 하는 자요,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리고 요한처럼 우리도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곧 ‘내 안에서 외치는 분’을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화살표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사실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은 누구요?”
(요한 1,19)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만을 드러내게 하소서.
저 자신이 아니라 주인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 당신의 귀염둥이 아들, 당신의 사랑이오니, 당신께만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을 전하는 이의 태도」
-반영억신부-
가끔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을 씁니다. 경중이나 선후가 서로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서슴지 않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엘리야인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 역시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시 ’예언자‘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 곧 메시아가 계시는데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자신을 한껏 낮추며 곧 다가오실 예수님의 신원을 알립니다. 만약 요한이 인기에 영합하여 자신을 부각시켰다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고 있었기에 항상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도 요한의 모범은 감동을 줍니다. 겸손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가운데 주님께 대한 갈망과 사랑이 커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 전해야 할 분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면서도 내심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모습들을 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이니 그것으로 만족하여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수요일 (0) | 2023.01.04 |
---|---|
2022년 1월 3일 주님 공현 전 화요일 (0) | 2023.01.03 |
2022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0) | 2023.01.01 |
2022년 12월 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0) | 2022.12.31 |
2022년 12월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0) | 2022.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