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Margaret K 2022. 12. 31. 06:24

 

2022년 12월 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18)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Father’s only-begotten Son,

full of grace and tru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고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한다(제1독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940년대 말, 심리학자 버트럼 포러는 학생들에게 새로 제작된 성격 검사라며 검사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검사 결과지를 나눠주었지요. 결과지에는 각자의 성격이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포러는 타인의 검사 결과는 보지 못하게 한 후, 검사 결과와 실제 자신의 성격과의 일치도를 0점(전혀 정확하지 않음)에서 5점(매우 정확함)까지 매기게 했습니다. 그 결과 학생이 매긴 점수는 평균 4.26점으로, 대부분 학생이 실제 자기 성격과 일치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결과지의 내용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그럼에도 학생 모두 결과지 내용이 자기 성격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같았던 결과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거나 존경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비판적인 경향이 있다. 당신은 장점으로 살리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약점도 있지만 그에 대한 대응책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때때로 당신은 옳은 결정을 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곤 한다. 당신은 변화와 다양성을 선호하지만 한계에 부딪힐 때면 만족하지 못한다. 당신은 자신이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사람들의 말을 수용하지 않는다.”(이하 생략)

자세히 읽어보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당연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성격을 정확하게 찍어낸 것처럼 착각합니다.

인간은 서로 너무 다른 것 같지만 다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르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만 다르다고 할 뿐입니다. 사람들과의 차이점이 아닌 공통점을 찾아 나갈 때 함께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2022년 12월 31일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2023년 1월 1일입니다. 단 하루 차인데도 엄청난 시간적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연도가 바뀌어서 한 살 더 먹는다 해도 내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한 살 더 먹었다고 서운해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 살 먹어서 어른이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2022년을 마무리하며 내 마음도 다시 깨끗하게 정리해보면 어떨까요? 부정적인 마음을 모두 털어버리고, 대신 사랑의 마음으로 그 자리를 채웠으면 합니다.

2022년 수고하셨습니다.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다음 3가지를 갖추고 있다. 첫째는 과거에 감사하고, 둘째는 미래의 꿈을 꾸고, 셋째는 현재를 설레며 산다(모치즈키 도시타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eNsyIqkRD6k

 

​-조재형신부-

2022년 12월 31일입니다. 2022년을 돌아보면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들이 많았습니다. 제게 건강을 주셨고, 무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고 참혹한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에 올랐습니다. 이태원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망하는 슬픈 사고도 있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2022년을 보내면서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립니다. 오늘이 지나면 2023년입니다. 내년은 ‘계묘년(癸卯年)’입니다. 토끼띠의 해입니다. 저는 토끼띠입니다. 내년에 저는 환갑입니다. 예전에는 환갑잔치를 했는데, 요즘은 환갑이라고 해도 젊은 나이에 속한다고 합니다. 육체의 나이는 한 바퀴 돌았는데 마음의 나이는 아직 반 바퀴도 안 돌은 것 같습니다. 공자는 60이라는 나이를 ‘이순(耳順)’이라고 했습니다. 이순은 ‘인생에 경륜이 쌓이고 사려(思慮)와 판단(判斷)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나이.’라고 하는데 저는 아직도 사려와 판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2023년에도 감사할 일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아쉬움과 부족함은 모두 털어버리고 감사와 찬미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지금 힘들고 지친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나의 멍에는 가볍고, 나의 짐은 편합니다. 모두들 나에게 와서 쉬십시오. 하느님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해 주셨고, 아픈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주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고난을 이겨냈고,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배는 초대 교회의 신앙 공동체에 의해서 거친 세상을 힘차게 넘어 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표징으로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023년에는 이제 우리가 제2의 그리스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행동에서 위로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에서 희망을 보면 좋겠습니다.

 

신앙 안에서 다가오는 2023년을 드러내는 사자성어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동상동몽(同床同夢)’으로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자라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어른이 되고,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꿈을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같이 가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나의 삶과 같아야 합니다. 이제 곧 2023년이 시작됩니다. 주님과 함께 동상동몽(同床同夢)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2023년을 기다리며, 지난 1년 동안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성탄 8부 내 7일'이며, 2022년을 마감하는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다보며, 오늘을 가져다 준 지난날들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보낼 수 없었던 한해를 보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를 통해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복음을 통해서는 ‘한 처음의 날’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한 처음’의 놀라운 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4)

여기서 “사람”은 직역하면 ‘살을 취하였다’는 것으로, 약함 안으로 들어온 것을 말하고, “사셨다”는 것은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거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어 오셨고, 사람이 되시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과 ‘그분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함께 거주하고 사신다.’는 믿음은 초기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 교리가 되었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가 인용한 초대 교회의 찬미가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리 2,7)

이는 단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 되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하신 일인 것입니다.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엄청난 사랑을 말해줍니다.

교부들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까닭은 인간이 하느님 되기 위함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변모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변모와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변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신을 ‘비우는’ 일이 있고, 그와 ‘같아지는’ 일이 있고, ‘하나 되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본받는’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심도 깊은 신비적 차원을 일이 벌어집니다.

곧 베드로가 표현한대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2,4) 되는 일이 있고, 바오로가 표현한대로 “그분의 형상을 지니고”(1코린 15,49), “그리스도를 입고”(로마 13,14; 갈라 3,27; 콜로 3,10), “같은 모습이 되는”(로마 8,29)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비워주고 내어주어, 그로 하여금 당신께서 누리는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함께 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타자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리를 그에게 내어주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그의 자리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어주는 것은 곧 들어가는 일이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고 나아가 상대에게 들어가기에, 동시에 자신의 그 빈자리에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상대를 취하고 상대를 받아들여 상대와 같아지고,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에서 전해져 오는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직 같아지는 것만이 구원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비우는’ 행위의 종착지는 ‘같아지는’ 것이요,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것은 또 다시 당신에게로의 변형을 가져옵니다.

곧 이러한 변화는 변화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또 다른 차원의 변화로 끌고 갑니다.

 

그것은 당신이 오시어, 우리와 같이 사시는 까닭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같아짐’을 통해 사랑이신 당신은 우리와 같아질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와 자리를 바꾸는 지점까지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까지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본질 자체로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은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를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바로 그 길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곧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그저 자기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 안에 머물면, 하느님께서 그 안에 들어와 ‘전부’가 되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4)

 

주님!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제 발길이 당신을 향하여 있는지, 제 마음에는 당신의 평화가 들어와 있는지를 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제 안에 생명의 빛을 불어넣으셨으니

이제는 죽음의 어둠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제가 당신 생명으로 새로워지고, 세상에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온 세상이 생명의 빛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생명, 그리고 빛」

-반영억신부-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큰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품을 읽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한 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3-5) 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려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요한1,10-11).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요한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