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Margaret K 2022. 12. 30. 06:15

2022년 12월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하는 축일이다. 1921년 이 축일이 처음 정해질 때에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첫 주일이었으나,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로 옮겼다(팔일 축제 안에 주일이 없으면 12월 30일).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부터 해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보금자리로 가꾸어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마태오 2,13-15.19-23)

 

The angel of the Lord appeared in a dream

to Joseph in Egypt and said,

“Rise, take the child and his mother and go to the land of Israel,

for those who sought the child’s life are dead.”

He rose, took the child and his mother,

and went to the land of Israe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상쇄하는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의 신자들에게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이집트로 피신하였던 요셉은 헤로데가 죽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와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2020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021년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함께하실 것 같았던 부모님께서 1년 사이에 모두 하늘 나라에 가시니 마음이 먹먹해지고, 잘 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늘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부모님 물건을 정리하는데 큰 형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님 재산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니? 다른 사람들 보니까 재산 분할 문제로 싸움도 많이 하던데, 우리는 그럴 일이 없잖아.”

사실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재산은 신앙심과 교육이었습니다.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삶을 늘 강조하셨고, 또 한 가지는 끝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책을 손에 놓지 않으면서 생활합니다.

많은 돈도, 세상의 높은 지위도, 그밖에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는 우리 가족 모임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게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가 가족들 간에 더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가정을 성가정의 모범으로 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가정이 부자였을까요? 아니면 세상 안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들의 가장인 요셉은 가난한 목수로 알려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결 예식 때 바치는 제물도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비둘기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고통과 시련이 없었을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가족을 보면,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첫아기인데도 마구간에서 낳아야 했던 형편이었습니다. 에집트로 피난도 가야 했고, 12살 때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너무 일찍 하느님 곁으로 가신 것 역시 인간적 관점에서는 커다란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십자가 아래에서 직접 봐야 했던 어머니의 아픔을 떠올리면 고통과 시련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없어야 성가정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성가정은 이 세상의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 서로가 서로를 위한 사랑의 마음에서 성가정은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신앙의 일치를 성가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고통과 시련이 없어야 성가정도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 가정에 있는가를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그 사랑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시면서 진짜 성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의 특징은 그것이 불행한 것인줄 알면서도 그쪽으로 가는 점에 있다. 우리 앞에는 불행과 행복의 두 갈래길이 언제나 있다. 우리 자신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A.링컨).

가정의 붕괴, 해법은 없는가?

-전삼용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mIlK3MzzNAg

 

나자렛 성가정 이야기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aMAyaFh_jAY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소경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소경은 ‘보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또 다른 기적도 보여 주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볼 수 없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에 침을 발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를 지어서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소경의 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요소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삶의 기쁨입니다. 꽃, 새, 구름, 바다, 나무, 아이,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기쁨입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모니터는 우리를 더 넓은 세상과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은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잘 지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흡족해 하시면서 그렇다면 가진 것을 보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부자청년은 슬퍼하면서 떠나갔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자청년이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행동했다면 우리는 부자청년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도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율법학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문득 생각합니다. 보는 것은 주체가 ‘나’입니다. 내가 보는 것이고, 내가 즐거운 것이고,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것은 주체가 ‘남’입니다. 남이 말을 해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은 보는 것으로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합니다. 구약 예언자들도 모두 말씀을 듣고 전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라고 선포했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알아들어라.’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전에 읽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비가 오는데,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 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집니다. 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 해결 방법의 하나는,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 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 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 둘이서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됩니다.”

기도와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 그리고 신뢰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이란 대체 어떤 가정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는다면, ‘성가정’이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요, ‘말씀’이 성취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주인 되게 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말씀의 성취를 전해줍니다.

하나는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2,25)라는 말씀의 성취요, 또 하나는 “그는 나자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2,23)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의 성취 안에는 모진 고통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이 가정은 이집트에서 불려나오기까지, 또 나자렛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쫓겨다녀야 했고, 변방의 거류민으로 살아야 했고, 숨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고통이 없는 가정이 ‘성가정’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아니 어쩌면 ‘성가정’에는 고통이 필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성취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이란 고통이 없고 편안하고 안정된 단란한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고통 속에서도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이루는 사람이기에 앞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요 공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활동하고 성취되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신비로운 것은 ‘말씀이신 분’께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아기 모습으로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면서도 우리를 이끄십니다.

참으로 묘한 신비입니다.

‘말씀이시면서 말을 못하는’ 이 아기는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고통으로, 때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때로는 보이지도 않은 빈자리가 되어 우리네 가정, 우리네 공동체를 이끄십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은 우리 가정과 공동체의 주인이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빈자리’로 계십니다.

마치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주인공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빈자리’로 있는 신부처럼, 우리 가정 안에서도 ‘빈자리’로 계시면서 우리 모두를 품으시고 끌어안으십니다.

그러면서도 성취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빈자리’, 그곳이 바로 중심임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님’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 안에 말씀이 살아있는지 들여다볼 일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이 우리 안에 작고 낮고 무력하게 말 못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살아계심을 볼 일입니다.

 

‘말씀’은 사랑하는 이 앞에서 항상 작고 낮은 이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결코 자신을 높이거나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관상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보다 작고 나약한 예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작고 무력한 예수님을 만났는가?

나를 사랑하기에 언제나 나보다 작은 모습으로 내 앞에 무력하게 낮아져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심지어는 ‘없는 자’, ‘빈지리’가 되어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마태 2,20)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들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살아있고 존중되는 말씀과 함께 친교를 나누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항상 중심이요 주인이 되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 안에서 서로의 고통을 끌어안고 십자가를 함께 지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