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요한 사도는 어부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의 동생이다. 그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함께 최초의 제자단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함께했으며 예수님의 당부로 성모님을 모셨다. 전승에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사마리아와 안티오키아, 에페소 등에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뒷날 요한 사도는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를 가서 요한 묵시록을 저술하고 에페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요한 20,2-8)
They both ran,
but the other disciple ran faster than Peter
and arrived at the tomb fir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체험한 참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한다(제1독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들은 두 사도는 무덤을 찾아가 빈 무덤을 확인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나의 자유를 가로막는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감옥 간수를 매수해서 탈옥한다.
2) 가장 실력 좋은 변호사를 선임해서 감옥에서 벗어난다.
3) 다른 수감자들과 친해져서 탈옥을 함께 계획하고 실행한다.
아마 대부분 두 번째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법대로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의 감옥만을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의 자유를 가로막는 감옥에 갇혀 있게 만드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도록 나를 가둬놓고 있습니다. 돈, 명예, 욕심, 죄….
이런 것에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감옥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매일 ‘돈’만을 외치고 생각하고 있다면 ‘돈’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매번 ‘명품’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명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가득하다면 ‘미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탈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만을 바라보며,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라고 알려진 요한 사도는 오로지 주님 안에만 있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늘 예수님 곁에 있었고,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무덤 앞으로 뛰어갔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무덤 안에 먼저 들어가는 것을 베드로에게 양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제자이니 무덤에 먼저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먼저 무덤에 도착했으니 그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베드로를 존중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 안에서만 머물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세상의 틀이 아닌, 오로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가 선포하신 ‘영원한 생명’(1요한 1,2 참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걱정은 출처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를 약화시키는 것이요, 용기를 앗아가는 것이요, 인생을 단축시키는 것이다(존 란카스터 스팔딩).
오늘은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가장 사랑받는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 지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히 관상하는 단계에까지 올랐습니다. 요한 묵시록에 이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요한 1,17-18)
요한은 그리스도와 3년을 함께 하였고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어 비밀스러운 것까지 물을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리스도의 신성을 뵈니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이렇게까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고 정확히 기록한 이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보는 것을 우리는 ‘관상기도’라 합니다.
우리가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까닭은 그래야 그분처럼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상기도는 하느님의 신성, 곧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보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의 굳은살을 관상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부모님을 보는 것과 그분이 고생한 흔적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님이 아닌 부모님의 사랑, 곧 부모님의 영광을 보아야 부모처럼 성장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느님의 영광, 곧 사랑의 표현, 어쩌면 표징이라 부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1코린 3,17-18)
이는 분명 관상기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곧 ‘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분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피조물 본성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변하는 방법은 ‘보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세처럼 얼굴에 너울이 씌워져 있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어땠어야 할까요? 부모님의 영광, 곧 부모님의 사랑을 보았어야 합니다. 처음에 부모님을 의심할 때는 부모님처럼 되지 않습니다.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리 밑으로 진짜 어머니를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굳은살을 통해 부모님의 영광을 볼 때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 사랑을 믿고 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도착합니다. 물론 젊은 요한이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궁금하기도 했을 테지만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보고 나서야 요한도 들어갑니다. 요한도 분명 무언가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장으로 뽑아주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이 능력이 오히려 관상기도를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관상기도는 사실 원하는 사람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믿지 못하면서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보면 애정결핍으로 부모의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부모를 괴롭히는 금쪽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아이들이 부모를 괴롭히는 이유는 단 하나, 불안함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녀임을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부모는 더 지쳐갑니다. 그래서 더 조를수록 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지적 장애가 있는 아버지가 아들이나 딸을 혼자 키울 때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힘들게 자신을 키운 부모의 손을 잡아주고 발톱을 깎아주고 어깨를 주물러줍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더 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힘이 납니다. 그렇게 더 높은 사랑의 표징이 나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표징을 주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은 지칩니다. 그러면 그들을 관상으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관상기도는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해서 더 요구할 것이 없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먼저 지금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려 하지 않으면 하느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영광은 발밑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모님의 발을 만져보고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면 그 영광을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볼 때는 라면 한 그릇도 그분들의 살과 피가 섞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분들께서 주시는 모든 사랑 안에서 그분들을 찾아내게 됩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두 분이 써 보내신 편지는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부모의 영광은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것에 담겨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따라서 내가 겸손하여지지 않으면 그분들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위만 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지면 그분의 영광을 봅니다. 제가 어머니께 드린 용돈을 어머니는 쓰셨을까요? 저에게 다시 주기 위해 하나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다 모아놓으셨습니다. 감사해야 그분이 지치지 않고 더 큰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 하였습니다. 무덤은 그저 그분께서 묻혔고 지금은 부활하셔서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그분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무덤뿐입니다. 그녀는 무덤에서 한없이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분이 남긴 자취가 무덤뿐이었기에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남겨놓은 사랑에 머무를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관상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 영광을 찾으려 해야 할까요? ‘성체’입니다. 보잘것없는 밀떡이지만 그 밀떡 안에 완전한 하느님 신성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았냐고 물으면 신자들은 못 보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려는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직접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육체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남겨놓고 간 흔적에서 그분을 발견하려고 머물러야 합니다. 이 겸손함이 진정 하느님을 보게 합니다.
-조재형신부-
다른 신부님들의 강론을 듣거나, 읽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복음 말씀인데 저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신부님은 문학적인 접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신부님은 철학적인 접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신부님은 동양의 고전을 접목해서 접근하기도 합니다. ‘자캐오 통장’을 만들었다는 신부님의 강론도 제게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피정이나 특강 때 받은 강사료는 따로 모았다고 합니다. 축일에 받은 축하금도 따로 모았다고 합니다. 그 통장의 이름은 ‘자캐오 통장’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통장에 있는 ‘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때로 자캐오 통장을 개인적인 용도에 사용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아직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한 강론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으니 신부님의 강론은 살아있고,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하나의 강론을 쓰기 위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제들 강론의 원천은 ‘복음’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4개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복음입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표징을 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전하는데 있어서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3개의 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아예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만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의 공동체에는 예수님의 탄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의 조상’이었습니다. 마태오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아담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전합니다. 루카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을 넘어서 모든 인간의 원형인 아담의 후손이며, 곧 하느님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차원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사실과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표징과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도 새로운 관점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로고스찬가’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땅을 기어 다니는 것이 숙명입니다. 그러나 애벌레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얀 날개가 날린 나비가 됩니다. 이제 나비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비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찬가를 읽으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웅장한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오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요한복음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면 어떨까요? 저는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보고 믿었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성탄 8부 안에서 요한 사도의 축일을 맞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했고 또한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식사를 하였고, 골고타 언덕까지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 십자가 아래에 있었고,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그분의 아들이 된 제자였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의 ‘새로운 벤야민’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곧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벤야민은 주님의 “사랑은 받는 이”(신명 33,12)였듯이,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요한 13,23;19,26;21,7;21,20)라 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이 도착하였지만, 먼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젊은 요한이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동시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도착한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기만 하지만, 요한은 들어가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빈 무덤’과 ‘구유’는 예수님께서 몸을 눕혔던 같은 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마침’, 곧 오실 때와 가실 때에 머무른 땅의 자리입니다.
그분은 ‘구유’로 우리의 출생을 성화시키시고, ‘빈 무덤’으로 우리의 죽음을 성화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탄생이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도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은 돌을 통과해서 지나가신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주간 첫날 아침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무덤은 봉인된 상태였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마태 28,2)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한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가 구세주 탄생의 표시가 되듯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아마포 수의’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부활의 표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포’는 놓여있었고, ‘수건’은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수동태는 하느님의 개입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렇게 잘 단정된 ‘수의’와 ‘수건’은 제자들이 밤중에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한 경비병들의 거짓 증언에 대한 반대 물증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세주의 ‘강생의 표시’와 ‘부활의 표시’를 동시에 봅니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주님이 계신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세를 낮추어 더러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들어가’야 합니다.
무덤의 돌문을 열 듯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울고 있고 지친 이들이 있는 곳, 춥고 베고픈 이들이 있는 곳, ‘세상 속의 마구간’과 자신의 ‘마음 속 마구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 사도의 축일을 기념하면서, 생명을 가져다 준 ‘구유’의 아기 예수님과 ‘빈 무덤’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시에 만납니다.
이토록 우리는 더없는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신 분을 기립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요한 20,4)
주님!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듯, 목동들이 구유로 달려가듯,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리게 하소서!
무덤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비어져 나오게 하소서.
비어진 눈으로 보게 하시고, 본 바를 믿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반영억신부-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또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디선가 그 속내를 드러내게 됩니다. 물론 없는 사랑을 있는 척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제자는 무덤을 향해 함께 달렸습니다. 듣자마자, 그것도 달려갔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 줍니다.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있습니다. 역시 주님은 그런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아닌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젊어서이든 주님을 더 사랑해서 빨리 달렸든, 이유는 모르겠으나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덤을 들여다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본 후에야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이지만 그를 받아들이고 베드로를 여전히 으뜸제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그는 주님의 제자이고, 죄를 범했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들의 맏형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그것을 알기에 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준 모습입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신 것(요한13,23; 19,26; 20,2; 21,7.20)처럼 베드로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상대방의 어떤 과거를 알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는 낙인이 찍히고 미래가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넘어지지 않았는데 저 사람은 왜 넘어졌을까?”판단하고 단죄하지 말고 “자비와 연민의 눈길”로 봐야 합니다. “의인은 자신의 판단과 판결을 미안해합니다. 의로운 판결은 편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옛말이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고 바뀌었다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마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 식의 사랑과 우리 식의 사랑
-김찬선신부-
요한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하고,
최후 만찬의 복음에서는 "그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요한뿐이었겠습니까?
오늘 같이 무덤에 달려간 베드로는 주님께서 사랑치 않으셨고,
열두 제자 중 다른 제자들은 주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다 사랑하셨어도 혹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혹 인간 중에는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은 그럴 리 없다는 것이 예수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유일하게 얘기하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나
예수님의 '사랑받은 제자'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이겠습까?
사랑을 주고받는 데 두 가지가 있고,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데 주지 않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와
사랑을 주는데도 받지 않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후자의 경우 정확히 얘기하면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는 거지요.
그러므로 누가 사랑을 받는 것은 양쪽이 일치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지요.
받고 싶은데 주고 싶지 않다고 하면 받을 수 없고
주고 싶은데 받고 싶지 않다고 하면 줄 수 없는 거지요.
그런데 사랑에는 기울기가 있습니다.
똑같이 사랑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와 자식 간에는 사랑의 기울기가 있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자식의 사랑보다 훨씬 크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자식을 사랑하는데 자식은 엄마만큼 사랑하지 않고,
심지어 엄마보다 이성이나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합니다.
이성이나 다른 사람의 사랑이 엄마의 사랑보다 못한데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랑을 받는 것이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줘도 내가 받아야지 받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받지 못함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거겠습니까?
하느님 식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 식의 사랑은 우리 식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고 그래서 귀로 고백을 들으며,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껴안으며 아무튼 감각되어지는 사랑입니다.
남녀 간에 '꼭 말로 표현해야 알아?'라고 하면
'말로 표현해야 할지!'라고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도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임을 강조하여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오신 분은 볼 수 없는 하느님이
볼 수 있는 분, 만져볼 수 있는 분으로 오신 거라는 얘기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와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너무도 감동과 감탄을 하며 감사드리며 그 사랑을 눈으로 보고 또 보고
싶어서 성탄 구유를 만들어 베틀레헴의 성탄을 재현하기까지 하였잖아요?
그러나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줘도 받아야 받는 것처럼
보여주셔도 봐야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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