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Margaret K 2022. 12. 26. 05:52

2022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스테파노 성인은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뽑은 부제이다. 식탁 봉사를 위한 일곱 봉사자의 하나로 뽑힌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는 일뿐 아니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진리를 증언하는 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또한 유다인들과 벌인 논쟁에서도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사도 6,8)는 지혜로운 언변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유다인들은 스테파노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그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그는 돌에 맞아 순교함으로써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오 10,17-22)

 

When they hand you over,

do not worry about how you are to speak

or what you are to say.

You will be given at that moment what you are to say.

For it will not be you who speak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speaking through you.

 

 

St. Stephen the First Marty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평화를 맛보지만, 그를 죽이려는 자들은 화를 참지 못하며 평화를 잃어버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앞으로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겠지만,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맞벌이 부부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 와 있는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직장 상사로부터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문제의 원인이 아내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먼저 잘못했네. 그 직장 상사를 욕하면 안 되지.”

남편의 이 말에 아내는 어떠했을까요? 더 화가 나서 “당신이 그러고도 남편이야?”라고 소리친 뒤에 남편과 한동안 냉전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아내 역시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에게 말한 것은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것이 아니지요. 앞으로 어떻게 관계 개선을 해야 할지 그 방법을 물은 것도 아닙니다. 즉, 해결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화난 감정을 풀어줄 남편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비결은 해결사나 재판관이 많이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보다 어떻게든 인정하고 지지하며, 정답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닌, 잘 들어주는 사람, 잘 경청해주는 사람이 많을 때 삶은 더 풍요로웠습니다.

오늘은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입니다.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도 그렇지만 많은 순교자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의 횡포에 의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인 생명까지도 자기 자리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그들의 자리는 하늘 나라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면서, 자기 생명보다 하느님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영광스럽게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끝까지 견딘 이는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순교자들을 박해했던 기득권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려는 모습으로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과 함께한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게 됩니다. 자기 말은 하지 않고, 하느님의 소리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유한하고 짧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보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무한한 시간이 보장되는 하느님 나라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 그 나라가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 삶에 우연히 찾아와 준 것들에 대한 발견이다(최인철).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nGnTNa4c7rE

 

​-조재형신부-

한국에서 오는 월간지가 있습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글들이 듬뿍 들어있습니다. 최근에 ‘꿈(CUM)'이라는 월간지를 받았습니다. 한국어로 꿈은 희망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라틴어 ’CUM'은 ‘함께’라는 뜻입니다. 미사 때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Dominus vobiscum)'라고 하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Et cum spiritu tuo)'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꿈은 혼자서는 이루기 어렵습니다. 꿈은 주님과 함께하면, 이웃과 함께하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꿈을 선포하셨고, 그것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복음 선포의 꿈을 7명의 부제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7명의 부제 중에 한명이었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의 축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 다음 날에 ‘첫 순교자 스테파노’를 기억합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두고 시메온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은 비록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그래서 죽음의 골짜기를 건널지라도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월간지 ‘꿈(Cum)'에서 이창영 신부님은 4가지 유형의 사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세상이 나에게 빚지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연히 나를 사랑해야 하고, 부모님은 당연히 나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교만하기 마련이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회당에서 대접받기를 원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같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나는 나이고, 너는 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칼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온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레위인과 사제와 같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받은 것은 되갚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빚지고는 못 산다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받은 만큼만 베푸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만 살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갚지 못할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에서 보상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 유형은 ‘사람들로부터 빚지고 살아가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주변의 많은 이웃들에게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자캐오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지내면서 나는 어떤 유형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 ‘허영엽 신부가 만나 사람들’이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지난 12월 4일 신문에 ‘치과의사 강대건(라우렌시오)’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수도자, 신학생, 사제들은 무료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선생님께서 ‘사랑니’를 뽑아 주셨습니다. 주일에는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한센인’들의 치아건강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도와준 한센인들이 만 오천 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분들의 진료기록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치과의사로 살면서도 그다지 부유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네 번째 유형의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네 번째 유형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양승국신부-

 

젊디젊은 부제 스테파노의 놀라운 신앙과 신심은 오늘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저마다 손에 큼지막한 돌 하나씩 들고 달려온 살기등등한 수많은 적대자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둘러서 있던 적대자들은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던진 돌에 한 번 맞아본 적 있으십니까? 어린 시절, 다른 동네 아이들과 ‘살벌한’ 눈싸움을 하던 중, 큼지막한 돌에 맞아 잠깐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단 하나의 돌에 피가 철철 흐르고, 기절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스테파노에게 날아온 돌은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수십 개, 수백 개였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사형방법입니다. 하나하나 맞을 때마다 극심한 고통에 비명과 신음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무수한 돌팔매질을 온몸을 향하는 와중에도 스테파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스테파노가 바쳤던 위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바치셨던 예수님 기도와 거의 흡사합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100% 복사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적대자들의 끔찍한 돌팔매로 인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인 가운데서도 스테파노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원수까지 사랑하신 그 어이없는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스테파노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어떻게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그처럼 당당하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죽음을 자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순교자들의 당당한 죽음, 그 이면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을 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뵙듯이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풍요로운 곳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온 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영근신부-

어제는 하느님의 지상 탄생일이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천상 탄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지상 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 탄생, 이 두 탄생 이야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탄생이 ‘자기 비움’이라는 일종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그것이 ‘타인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구세주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스테파노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신 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있는 하느님의 지상 탄생 없이는 뒤에 있는 천상 탄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오심으로 얻어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았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한 사랑의 순교로 죽으셨듯이, 스테파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순교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사도 6,59)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26)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 7,60)

이처럼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서도 불타는 사랑으로 기도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서서 기도했지만, 원수들을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사도 7,60), 자기를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 죽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랑에 “하늘이 열리고”(사도 7,56), 하늘은 그를 받아들여 사랑의 순교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목숨 바쳐 순교할 기회는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바로 ‘순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는 믿고 있는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분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내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자신 안에 품은 하느님의 사랑을 퍼 올리면, 우리 안에서 ‘열리는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이름 때문에~”

(마태 10,22)

 

주님!

제 안에 새겨 두신 당신 이름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부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에 희망을 두오니 당신 이름에서 구원을 주소서!

당신 이름 때문에 돌팔매질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이름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김찬선신부-

어제 저는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로 오르게 되는

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말씀드렸고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의 신비를

잘 사는 것은 이 교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도 말씀드렸습니다.

 

이 교환의 신비에 참여한 사람의 탁월한 본보기 가운데 하나가 스테파노이고,

그 결과로 스테파노가 순교하게 되었는데 그 순교는 주님의 지상 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 탄생의 교환이라는 점을 우리 교회는 오늘 기념하는 겁니다.

 

성탄 팔부 축일 첫날 왜 우리 교회가 스테파노의 순교 축일을 지내는지

우리가 의아해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스테파노는 죽어 하늘에 올라 천상에서 탄생했을 뿐 아니라

그 전에 이미 하늘을 본 사람이고, 자기만 하늘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하늘을 보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라는 하늘은 보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하늘로 눈이 향해 있는 스테파노와

스테파노에 눈이 꽂혀 있는 적대자가 비교되고,

하늘에 눈이 열려 있는 스테파노와

하늘에 귀를 닫고 있는 적대자가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적대자에게 대적하려는 마음이 애초에 없고,

그저 하늘을 향하고 하늘을 같이 보자고 초대할 뿐인데

그런 그를 적대자들이 적으로 삼고 적대시할 뿐입니다.

 

적대시라는 말을 우리는 오늘 새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적으로 대하는 눈 또는 시선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적대시합니까?

같이 하늘을 봤으면 적대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적대시하지 않았으면 하늘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오늘 독서에 묘사된 적대자들의 행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회당에 속한 몇 사람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스테파노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의 행위는 이렇듯

시선이 사람으로 향하고,

사람을 적으로 대하고,

달려들어 논쟁이나 벌이고,

화를 내고.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그런 것뿐입니다.

 

이런 그들과 달리 스테파노는 그들에게

말려들지 않고,

걸려들지 않습니다.

 

하늘에 시선을 둔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자고 초대하는 사랑은 있지만,

그들의 시비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들과 갈등할 이유나 싸울 이유는 없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부러운 스테파노의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