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4일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가 1,67-79)
In the tender compassion of our God
the dawn from on high shall break upon us,
to shine on those who dwell in darkness
and the shadow of death,
and to guide our feet into the way of pea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윗 임금은 하느님의 궤를 모실 성전을 짓겠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신다(제1독서).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주님께서 아들 요한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계획을 노래하며 주님을 찬미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UN 산하 전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 네트워크(SDSN)에서는 매년 ‘세계행복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이 발표에서 한국은 전체 149개국 중에서 59위를 차지했습니다. 1인당 GDP가 35,000달러가 넘는 우리나라이지만 행복 순위는 한참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통해 행복한 나라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유사시에 기댈 누군가가 있다.’
자신이 겪은 사고나 트라우마를 겪으며 힘들어하는 분들을 보면, ‘왜 내게 발생했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자기를 부정적인 틀에 가둬둘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삶을 쉽게 바꿔서 행복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질문의 초점이 ‘왜’가 아니라 ‘어떻게’ 또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로 바꿀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계속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나의 삶을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도 ‘왜’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듣고는, 자신들은 나이가 많다며 ‘왜’ 자신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는 말문이 닫혀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 인해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했던 말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통해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나’에서 벗어나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왜’라는 질문에서 벗어나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쁘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초점은 어디에 맞춰져 있습니까? 이제는 ‘나’에서 ‘우리’를, ‘왜’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나’와 ‘왜’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큰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서 살아간다면, 주님의 뜻에 한층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서로 연결될 수만 있다면 희망은 어디에나 존재한다(허남웅).
-조재형신부=
지난 11월 30일 한국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꿈과 열정을 담아낸 영화 ‘탄생’이 개봉되었습니다. 영화는 개봉되기 전에 바티칸에서 ‘시사회’를 가졌습니다. 시사회 현장에서 김대건 신부님 역할을 맡았던 배우 윤시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조선의 청년 김대건은 바다 건너 어느 곳에 바티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청년은 언젠가 바티칸에 가고 싶은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청년 김대건의 꿈은 200년이 지난 오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청년 김대건의 역할을 하였지만 청년 김대건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화의 제목 ‘탄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탄생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탄생은 새로운 시대의 기준점이 되기도 합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에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천동설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지동설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스마트폰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 선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탄생’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살던 시대의 조선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새로운 문물은 왕조시대가 아닌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봉건제도가 아닌 산업혁명의 시대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세상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시대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에는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같은 형제 자매였습니다. 귀족도, 평민도, 노예도 모두 같은 형제 자매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새로운 학문을 배웠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웠습니다. 문을 굳게 잠갔던 조선의 문을 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함께 하였던 가톨릭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박해의 칼날이 무서웠고, 고통과 죽음의 터널이 길었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동료 순교자들은 103위 성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탄생을 역사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예수님 탄생 이전(Before Christ)과 예수님 탄생 이후(Anno Domini)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던 한 아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께서 오셨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신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세리, 창녀, 이방인, 중풍병자, 나병환자,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죄는 용서받았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면 우리들 역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세주의 탄생입니다. 구세주의 탄생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악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경건한 마음으로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우리에게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독서는 새 다윗의 나라를 다스리는 메시아 오시기 전에, 먼저 다윗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다윗 가문에 영원한 왕좌가 약속되고, 화답송 역시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시 89,5)고 노래하며,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환호합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따온 이 구절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요,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어둠과 질곡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둠이 짙기에 우리는 빛을 더더욱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 때 드리고 있는 이 찬가(Benedictus, 찬미받으소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8-75)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찬양드리는 노래로,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구원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심을 찬미합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거룩함’과 ‘의로움을’으로 노래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
(루카 1,75)
후반부(1,76-79)는 어제 복음의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일 될 것인가?”(루카 1,66)에 대한 답변으로, 태어날 아기가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노래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드러내줍니다.
곧 세례자 요한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카 1,78-79)
여기서 “크신 자비”라는 말의 직역은 ‘자비의 내장으로’ 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고 깊으심에서 그리스도 오시어, 어둠과 죽음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고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결국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 빛은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힘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타오르는 빛이 우리의 발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어두운 이 세상에 곧 오시어, 참 빛을 밝히실 것입니다.
어둠 속 우리를 당신 빛 속,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빛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등불을 밝혀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
(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겠나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겠나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겠나이다.
아멘.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루카 1, 78)
-한상우신부-
마지막까지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준비했던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기억합니다.
평화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음을
알려줍니다.
별은 망설이지
않습니다.
떠나오지 않고서는
빛이 될 수 없는
빛의
신비입니다.
빛은 죽음을
비추고
우리의 어둠을
비춥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우리는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참된
빛입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용서의 빛입니다.
빛은 빛날수록
소중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는
사랑의 빛입니다.
사랑의 빛은
삶의 여백을
보게 합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여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백이 있기에
우리자신을 만나고
우리자신을 비추는
별을 보게 됩니다.
별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제자신을
만납니다.
별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법을 배웁니다.
별도
사람도
내려놓을 때
더욱 빛납니다.
여백을
채워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빛과
여백(餘白)이
하느님께서
탄생하실
빈자리가 됩니다.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려야
별을 만나고
보게 되는
참된 사랑의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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