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3일 금요일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
.(루가 1,57-66)
When they came on the eighth day to circumcise the child,
they were going to call him Zechariah after his father,
but his mother said in reply,
“No. He will be called Joh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주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시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요한이라고 이름 짓자,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다. 이웃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서품을 받으신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의 서간집(1842-1860, 스승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을 읽고 있습니다. 순교하지는 않으셨지만,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셨습니다. 12년 동안 127개나 되는 교우촌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당신을 찾아오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찾아가셨습니다. 매년 7,000리(약 2,749km) 이상을 걸으며 어떤 고난과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신자들을 찾아 나셨습니다. 그 결과 탈진해서 만 40세의 한창나이에 병사하시지요.
이런 사목적 열정이 서간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음을 신자들의 열성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제를 만나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석하기를 바라는 신자들을 외면하실 수 없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제는 훌륭한 신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은 과거와 달리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지 고해성사를 볼 수 있고, 미사 참석도 자기 편안한 시간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계속해서 편안한 신앙생활만을 추구합니다. 단적인 예로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때, 잠시 방송 미사를 허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계속 신앙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당에 가서 미사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당에 아예 나가지 않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어도 주님께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그 시대,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주님께 대한 열정보다 세상 것에 관한 관심이 더 많은 지금 시대 중, 누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실까요?
주님께 대한 열정을 키워야 합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관점보다 주님을 더 윗 자리에 모실 때 가능합니다.
즈카르야는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듣고 세상의 눈으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아이를 갖기에는 자기나 엘리사벳 모두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요.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즈카르야의 입을 닫은 것입니다.
이제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관습대로 아버지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로 부르려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이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으면서, 세상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그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이 필요한 요즘이 아닐까요? 너무나 편하고 쉬운 신앙생활만 따르다가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게 입이 닫히고 혀가 굳어질지도 모릅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스티브 잡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마리아처럼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집안에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요한의 집안에서는 요한을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즈카르야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이름은 자신에게서 오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대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제 요한은 즈카르야가 아닌 주님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 66)
이름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이름이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것인지 결정하는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개밥 그릇을 가져온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사람 먹을 음식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사람 밥그릇을 가져와야 합니다. 밥만이 아니라 밥그릇도 자기 부모님이 주는 것입니다.
노력하면 될까요? 노력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이가 노력하면 어른이 될까요? 노력이 아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모든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일까요?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을 받게 만드는 것이 자녀에게 해로운 일이 아닐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97회에 ‘분노 조절 불가 금쪽이’가 등장했습니다. 하도 불안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데 이 아이의 화풀이 대상, 혹은 자기 마음을 안정 시켜주는 대상은 엄마입니다. 학교 갔다 와서 엄마가 없으면 아이는 분노를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욕은 물론이요, 폭력까지 쓰기도 합니다. 사람 많은 곳에서 남이 스치기만 해도 나이 불문 화를 냅니다. 화가 통제가 안 되는 아이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일까요?
자기 자신은 자기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그래서 도움을 찾습니다. 그게 엄마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처방을 내립니다. 그리고 마치 그 처방이 잘 된 것처럼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프로그램에서 하는 처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진짜 문제는 도움을 부모에게서 찾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속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엄마에게 좋은 아이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엄마는 아이 마음을 알고는 자기가 더 열심히 해주지 못한 것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열심히 아이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때 아이가 변했나요? 아이가 불안한 이유는 자기 안전을 부모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기 안전을 온전히 책임져줄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아이의 불안은 자기 생명을 책임져줄 수 없는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을 책임질 창조자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지 않았고 다시 줄 수도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는데도 책임지려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망칩니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새로운 도움을 줄 수 있는 창조자가 있음을 알려주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창조자가 주는 이름을 받는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 우승은 아르헨티나였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프랑스가 이긴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는 아르헨티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메시는 나이가 많음에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의 호날두가 비슷한 연령대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것과 대조됩니다. 메시는 ‘메갓’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메시를 응원하는 이들은 거의 그를 신처럼 떠받듭니다.
물론 메시는 골의 영광을 무조건 하느님께 돌립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축구의 신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인정한 것이 호날두와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서명은 ‘전 요셉’을 휘갈겨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십자가 모양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삼용’은 죽고 ‘요셉’의 새 이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으로 저의 육체적 부모로부터의 도움을 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그분의 도움을 받는 사람임을 되새기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 이유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분명 자신의 이름이 왜 요한인지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 이후부터는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보살핌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정말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고 인간 중에 세례자 요한만큼 큰 인물은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으로 불러줍시다. 그러면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이름을 지어준 이를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을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나의 자녀가 누구의 손길 밑에서 자라게 할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조재형신부-
대림특강이 있어서 필라델피아 한인성당에 갔었습니다. 같은 서울교구라서 하루 전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 강의를 시작하는데 1시간 전에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봉사자들이 왔습니다. 음향을 점검하는 분도 있었고, 제단의 꽃에 물을 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성령기도회 봉사자들이 와서 찬양으로 교우들을 맞이했습니다. 대림특강은 제가 하지만 대림특강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리 와서 봉사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특강이 끝난 뒤에는 여성구역에서 따뜻한 차와 간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교우들은 차와 간식을 드시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매주 미사를 가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에도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10시 30분에 미사를 하는데 9시면 성가대에서 와서 연습을 합니다. 비슷한 시간에 성모회는 그날의 친교 음식을 준비합니다. 형제님들은 탁자와 의자를 준비합니다. 전례 봉사자들은 미사 준비를 합니다. 복사들도 미리 와서 연습합니다. 재정 봉사자들은 미사예물을 받고, 교무금도 받습니다. 미사는 제가 주례하지만 미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리 와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곧 주님의 성탄을 맞이합니다. 성서를 보면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500년 전에 이미 임마누엘의 탄생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주님이 오시기 전에 길을 닦을 사람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사자는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보라 나의 뒤에 나보다 더 크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 질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사막에 샘이 넘쳐날 것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거닐 것입니다.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골짜기는 메우고, 언덕은 평평해 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평등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즈카리야의 아내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마리아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마리아에게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저는 아직 남자를 모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성령의 힘으로 그리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의 꿈에도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리아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있었고,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가 있었고,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순명의 구유 위에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오십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은 이웃과 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며, 이런 이들은 형제의 고통과 절망,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그런 자신의 행동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임을 깨닫게 되며, 이런 사람들에게 “임마누엘”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성탄이 임박해지면서 우리는 엘리사벳의 축복과 마리아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엘리사벳처럼, 마리아처럼 우리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합시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
(<복음의 기쁨> 273항 )
그리고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의 이름은 요한'
(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게 하소서.
당싱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아기의 이름은 요한』
-반영억신부-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야훼께서 기억하시다.’는 의미)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신뢰가 형성되어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이름을 쓴 순간 즉시 혀가 풀렸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이 실천되었을 때 입이 열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말에는 공수표가 많지만, 하느님께는 공수표가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말씀에 대한 신앙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다. 주님께서 너그러우시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몫에 충실했습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카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하느님의 역사에 순종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매여 있던 모든 고리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를 옭아매고 있는 거추장한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입이 열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 세례 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인 동시에 은혜를 전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새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탄생이지만 기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성탄이 늦어진답니다. 자가격리를 하고 오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 혼란 속에서 주님의 손길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주님께 내어 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려있는가요?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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